팬아트는 예술이다!

매드맥스 시리즈

<매드맥스>(1979) 1편의 맥스(멜 깁슨 분)는 당시의 경찰이었다. 그는 상징과도 같았던 경찰의 아웃핏을 장착하고 악당들을 쓸어버린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2015) 에서 맥스(톰 하디 분)가 모래폭풍을 피하고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와 스플렌디드를 비롯한 임모탄의 신부들을 포획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눅스가 뺏아간 맥스의 더블 배럴 샷건과 가죽점퍼를 다시 찾아오는 일이었다. 이는 1편부터 맥스 (당시에는 23세의 멜 깁슨) 에게 있어서는 8기통 엔진이 탑재된 인터셉터와 몸의 여기저기에 부착된 보호대와 더불어 캐릭터를 설명해주는 핵심적인 소품이다.그는 가족을 잃고 경찰의 신분을 잊은 채 사적 복수에 몰두한다. 갖은 고초를 겪지만 결국 복수에 성공한다. 하지만 그에게 남은 것은 허무 뿐이다.

<매드맥스2> (1981) 에선 부제 그대로, 로드 워리워답게 포스트 아포칼립스 이후의 세계에서 자원을 뺏는 악당들을 박살 낸다.

<매드맥스3>(1985) 에선 문명을 찾아 떠나는 소년소녀들을 도와 전설이 되는 이야기를 다뤘으나 시리즈 중 가장 아쉬운 퀄리티를 보인다. 그리고 매드맥스 시리즈의 프리퀄 격으로 코믹스가 발간되는데, 4편은 그 이야기를 토대로 따르고 있다.

2편을 최고로 칭하는 관객도 있다.

분노의 도로의 배경

맥스는 이번에도 역시 방랑자로 출발한다. 그리고 늘 그래왔던 것 처럼 아름다운 8기통을 드러낸 그의 애마, 인터셉터는 적의 공격을 받아 전복된다. 절망으로 가득한 디스토피아에서 그가 끌려간 곳은 마지막 희망의 땅이 될지도 모르는 시타델. 척박한 사막에서 물과 젖 (정말로 젖)이 흐르는 곳이다. 그곳의 지도자인 임모탈은 자원을 차지하고 자신을 숭배케한다. 그리고 아내를 신부가 아니라 사육인 breeder 이라고 부르며 자신의 아이들을 소유물이라 지칭한다.

시타델은 그 자체가 건장하지 못하다. 노쇠한 임모탈은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자손을 남겨보려고 하지만 태어난 자식들은 장애가 있고, 사육하려고 준비한 여자들은 퓨리오사가 훔쳐 달아나 버렸다. 그에게 충성하는 워보이들은 늘 혈액이 필요하고 중병에 걸려있다. 현생보다는 임모탈을 향한 충성으로 천국행이 더 중요하며, 계속해서 되뇌이는 날 기억해줘 witness me라는 외침은 워보이들의 현재 삶이 순간에 가까움을 암시한다.

이런 곳에서 장군의 지위에 올라간 퓨리오사는 시타델에 잡혀온지 무려 7000일이나 지났다. 맥스의 소개가 끝나고 나면 영화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퓨리오사의 경추 부근에 찍혀있는 노예의 낙인이다. 외부에서 납치 당해 들어와 노예의 불도장이 찍힌 신분이 준지도자의 자리까지 올라가려면 얼마나 많은 공을 세웠겠는가. 임모탄의 심성을 보아하니 퓨리오사가 그 동안 세워온 업적은 엄청 났을 것이다. 자원을 위해 약탈하고 적을 잔인하게 처리했으며 임모탄에게 대드는 자를 거세해 왔을 것이다. 언제나 탈출을 꿈꿨을 그녀, 이윽고 좋은 기회를 잡는다.

삭발+검댕이를 소화할 여배우가 몇이나 있을까

구원과 생존

퓨리오사는 신부들을 데리고 탈출하며 자신이 하는 행위를 구원이라 믿었을 것이다. 혹은 자신이 구원받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온전히 자신만을 위하는 형태여서는 안 됐다. 그리고 실패도 용납되지 않는다.

이에 반해 맥스의 목적은 오직 생존이었다. 그러나 시리즈를 거듭하는 동안 그가 능력이 모자라거나, 외면함으로 인해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환영처럼 자신을 따라다니고 있다. 이 두 개념은 좀 다른 측면이 있다. 그리고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에서 묘하게 서로 감응한다.

녹색의 땅 어머니들은 씨를 품고 있던 여자들에게 진짜 씨앗을 나눠준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안도감

<매드맥스:분노의 도로>는 SF의 소장르인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에 속한다. 각종 재앙이 닥친 문명사회가 멸망한 뒤에 찾아오는 음울한 그림자같은 세계를 그린다. 이런 장르는 시간적으로는 미래지만 우리의 현시간을 기준으로 과거를 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런 이야기의 배경에서 외계인의 침공이나 자연 재해등으로 된서리를 맞기도 하지만, (<우주전쟁> (2005)) 기상이변(<인터스텔라(2014), <설국열차>(2013)), 기계의 반란(<매트릭스> (1999) <터미네이터> (1984)), 바이러스(<12몽키즈>(1996)), 인구문제(<소일렌트 그린>(1973), <칠드런 오브 맨> (2006)), 핵전쟁 등등 인간이 초래한 비극으로 배경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인간이 어긋나게 예상한 미래의 모습이나, 혹은 그 종이 잠재적으로 품고 있는 폭력성에 의해 자멸하는 속성이 크다. 그러다보니 이 장르는 계도적 속성과 사회를 비판하는 요소 또한 자연스레 품게 된다. 이것은 결국 현재를 살고 있는 인간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라는 의제를 던지게 된다. 그러므로 현세를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를 말하고 싶어서 미래라는 배경을 차용하여 작금의 죄악을 언급하는 형태가 된다. 이는 암울하게 맞이한 미래에서 쓸쓸함을 예상해 봄으로써 상상하게 될 것들이나, 현재는 (아직은) 그런 불행이 오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일종의 안도감을 제공한다. 이 지점이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배경이 우리에게 스며들듯 교훈을 주는 가장 큰 삼투압의 차이가 아닐까. 그러하면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는 그런 요소를 어떻게 활용하고 있을까?

주인공은 누구인가?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는 퓨리오사의 여정을 담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큰 울림을 주는 존재는 역시 맥스 로카탄스키다. 그의 목적은 오직 생존이었다. 그러나 정말로 오직 자신만을 위한 현존을 행하기에는 그가 구하지 못한 원령들에 대한 죄책감이 컸다. 그는 구원이나 희생같은, 거창하고 아름다운 단어를 믿지 않는다. 그런 뜻뜨 미지근한 태도가 과거의 자신을 망쳤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구원을 바라는 퓨리오사를 보면서 생각을 바꾼다. 퓨리오사가 녹색의 땅이 사라진것을 깨닫고 소금 사막을 건너기로 결정했을 때, 맥스는 홀로 움직이기로 결정하지만 결국 돌아와 시타델로 갈 것을 제안한다. 친구들을 버리고 혼자 살아남은 지난 날의 괴로운 기억은 떨쳐내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결정이었다. 그는 결국 그 여정을 통해 상처를 극복한다.

퓨리오사의 구원은 처음엔 개인적이었다. 후하게 해석해도 임모탈의 신부들 정도만 데리고 구원의 땅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되려 그녀에게 영향을 받은 맥스가 모두의 생각을 바꾼다. 본디 그의 심성은 차갑다 못해 얼어 붙었다. 그의 시니컬함은 몇 안되는 대사를 총해서도 잘 알 수 있다.

네가 사랑했던 것들이 망가졌는데 고칠 수 없다면, 넌 미쳐버리게 되는거야

없어진 녹색의 땅에서 머리를 돌려 시타델로 향하는 여정은 실패할 수 도 있다. 그것은 멕스에게 또 다른 형태의 절망을 안겨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형태의 구원이 아닌 (시타델에 있는) 모두를 구원하는 모양새를 먼저 제안한다. 그리고 가장 앞장서서 응한다. 엔딩 이후에 뜨는 문구인, 최초의 역사가가 묻는 질문이 있다.

희망없는 시대를 떠돌고 있는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위해 가야할 곳은 어디인가?

자발적으로 헌혈하며 퓨리오사의 '구원'에서 한발짝 더 나아가갔던 맥스의 태도를 떠올려보며 각자 구원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도 좋을 것이다.


프리랜서 막노동꾼 이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