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킬링 로맨스〉의 상세 줄거리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매력을 반감시킬 만큼 결정적인 스포일러는 아니지만, 원치 않는 분은 이 글을 읽는 일을 영화 관람 후로 미루시기를 추천드립니다.
* 아울러 가정폭력과 가스라이팅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읽는 분들의 주의를 요합니다.
끝없는 속박과 억압에 지쳐 이혼을 요구한 여래(이하늬)의 말에 조나단 나, 줄여서 '존 나'(이선균)는 분노한다. 순간 뭔가 잘못됐단 걸 직감한 여래는 자신이 내뱉은 말을 철회해 보려 하지만, 집사들은 존 나의 지휘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폭력의 무대를 만든다. 온 집안의 불을 끄고, 혼자 거대한 거실 벽 앞에 서 있는 여래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떨구고, 존 나의 곁에 귤을 카트째 준비해 준다. 감히 이혼을 이야기하다니. 존 나는 산더미처럼 쌓인 귤을 하나씩 집어 들고 여래에게 던진다. 그냥 던지는 것도 아니고, 온몸을 이용해 용틀임하며 전심전력으로 피칭한다.
퍽, 퍽. 귤은 여래의 몸에, 여래 바로 옆의 흰 벽에, 여래의 발치에 떨어지며 흰 벽을 귤 색깔로 물들인다. 여래는 모멸감을 삼키며 몸을 벽 쪽으로 돌려 존 나가 던지는 귤을 피한다. 광기 어린 피칭이 끝나고 난 뒤, 집사들은 대걸레를 들고 와 간결하고 제한된 동작들로 귤 물을 닦아낸다. 존 나가 좋아하는 폭력의 방식을 정확히 파악하고 실행에 옮기고 뒤처리하는 집사들을 보나, 익숙한 표정으로 폭력의 시간을 견디는 여래를 보나, 이건 한두 번 있었던 일이 아니다. 이 폭력은 이미 여러 차례 반복되어 왔던 일이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우스꽝스러운 포스터만 보고 영화를 보러 간 이들에게 〈킬링 로맨스〉는 생각보다 묵직한 이슈를 던진다. 쉴 틈 없이 쏟아지는 유머의 임팩트 때문에 놓치기 쉽지만, 사실 〈킬링 로맨스〉 속 가스라이팅과 가정폭력은 웃어넘길 수 있는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다. 귤을 던지는 장면만 봐도 그렇다. 몸에 이렇다 할 외상을 남기지는 않는 강도, 그러면서도 당하는 사람에게 엄청난 모욕감을 선사할 수 있는 귤이라는 도구, 폭력의 무대를 연극적으로 통제하는 통제광적인 면모, 굳이 조력자들이 있어야 수행할 수 있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제 권력을 과시하는 위압. 존 나는 이 폭력 자체를 즐기는 동시에, 자신의 통제와 권력 앞에 여래가 움츠러드는 걸 즐긴다.
유머를 다 걷어내고 다시 생각해보자. 존 나는 여래의 육체와 영혼을 모두 통제하려 든다. 존 나는 “당신은 49kg일 때가 가장 완벽하다”며 여래의 식사를 조절하는데, 심지어는 자신의 이름을 딴 테마파크 건설을 위해 주최한 파티에서조차 여래는 아무것도 먹지 못하게 한다. 그렇게 “가장 완벽”한 49kg을 유지해서 어디에 쓸 것인가? 기념사진을 찍는 데 쓴다. 존 나의 초대를 받고 파티에 참석한 국회의원과 지역 유력자들은 모두 왕년의 무비스타인 여래와 웃으며 사진을 남기길 바란다. 여래는 존 나의 트로피다. 여래는 마음대로 불행할 수 없다. 당연하다. 트로피는 불행한 표정을 지으면 안 되니까. 잠시라도 무표정하게 있으면 어느새 존 나가 등장해 손가락으로 여래의 입꼬리를 끌어올린다. 미소야말로 아름다움을 완성해 주는 요소라고. 늘 웃고 있으라고. 우리는 ‘행복’하다고.
존 나가 두 사람의 사랑을 상징하는 노래로 H.O.T.의 ‘행복’을 선택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존 나의 가스라이팅과 가정폭력으로 여래가 회의감에 젖을 때마다, 존 나는 ‘행복’을 부르며 여래에게 지금 이 상태가 ‘행복’이라고 세뇌한다. 당신은 정신적으로 불안정하고 피해망상이 있어서 배우로 복귀해서는 안 되는데, 그 불안정과 우울과 피해망상은 내가 비싼 돈을 주고 사 온 한정판 에르메스 백을 가지면 자연스레 나을 것이고 나아야 한다고. 그러니까 내 곁에 있으라고. 그게 행복이라고. 그렇게 보면 ‘행복’의 후렴구 마지막 가사는 새삼 소름 끼친다. “나를 불러줘요, 그대 곁에 있을 거야. 너를 사랑해. 함께해요, 그대와 영원히.”
등장인물들이 노래를 부르면 노래방처럼 가사가 화면 아래 자막으로 깔리는 영화. 그 과감한 유머의 화법만으로도 〈킬링 로맨스〉는 충분히 당황스러운 작품이다. 그런데 그런 화법으로 다루는 주제가 ‘가정폭력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여성의 분투기’라는 사실은 관객을 한 차례 더 당황하게 만든다. “섬나라 재벌 '조나단'과 운명적 사랑에 빠져 돌연 은퇴를 선언한 톱스타 '여래'가 팬클럽 3기 출신 사수생 '범우'를 만나 기상천외한 컴백 작전을 모의하게 되는 이야기”라는 홍보용 태그만 보면, 마치 이 모든 게 배우로서 복귀하기 위한 발버둥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니다. 여래가 옆집 총각 범우(공명)의 부추김에 힘입어 존 나를 ‘킬링’하기로 결심한 까닭은, 이렇게 살다가는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원석 감독은 쉽게 삼키기 어려운 ‘가정폭력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여성의 분투기’라는 주제 위에, 특유의 과감하고 엉뚱한 유머로 당의(糖衣)를 씌운다. 쏟아지는 유머의 폭격 속에 정신없이 웃고 함께 노래를 흥얼거리다 보면, 우리는 자연스레 존 나를 미워하고 여래를 응원하게 된다. 그건 자아도취에 빠졌으며 매사가 연극적인 통제광, 자신의 배우자를 자신의 소유물인 것처럼 취급하는 사이코패스 가정폭력범을 미워하고, 그의 통제에서 빠져나와 제 생을 구원하고자 하는 여성을 응원하는 일이다. 이원석 감독의 코미디 작품에 대한 주석이 너무 거창한가? 그런데 〈킬링 로맨스〉는 그 거창한 일을 기어코 해내고야 만다.
그런 의미에서 폭력의 굴레를 끊어낸 것이 여래 본인이란 사실은 묘하게 벅차기까지 하다. 여래를 구해내겠다고 말은 늘 번지르르하게 하지만 지나치게 순박한 나머지 늘 결정적인 순간에 존 나를 죽이는 데 실패하고 마는 범우가 아니라, 늘 움츠러든 채 폭력을 견뎌내던 피해자 여래가. 영화의 결말부, 여래는 자신을 끌고 가던 집사들을 뿌리치고 존 나에게 달려간다. 귤을 카트째 끌고 온 여래는, 자신이 당했던 그대로 귤을 집어 들고 존 나에게 던진다. 그리고 그제야,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존 나의 위상은 금이 가기 시작한다. (이원석 감독이 맞았다. 이 영화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영화다.)
〈킬링 로맨스〉를 볼지, 안 볼지, 보더라도 어떤 식으로 소비할 것인가는 저마다의 자유다. 그러나 나는 이 작품의 당의 안에 숨겨진 메시지를 보다 많은 사람이 음미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 주변의 여래들이 용기를 냈을 때, 옆에서 그 마음이 사그라지지 않게 응원해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마치 존 나의 ‘행복’ 앞에서 여래가 다시 흔들릴 때, ‘여래이즘’을 부르며 여래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지 상기시켜 준 여래바래 회원들처럼.
이승한 TV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