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연 1주기 추모전 '강수연, 영화롭게 오랫동안'

누군가는 말한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남은 자들의 손에 쥐어진 자유가 있다면, 그건 바로 먼저 떠난 사람을 기억할 수 있는 자유일 것이다. 2022년 5월 7일, 한국영화계에서 활동하는 매 순간 족적을 남긴 배우 강수연이 세상을 떠났다. 10년 만에 복귀하는 영화 <정이> 공개를 앞둔 시점이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2023년, 영화인들은 강수연을 기억하고자 강수연 추모사업 추진위원회를 꾸렸고 강수연 1주기 추모전 ‘강수연, 영화롭게 오랫동안’을 열었다.

5월 6일부터 9일까지, 한국영상자료원(6일)과 메가박스 성수(7~9일)에서 열린 이번 추모전은 <처녀들의 저녁식사> 상영과 이어진 '스페셜 토크: 강수연의 선택들'로 막을 올렸다. 특히 이 '스페셜 토크'는 같은 작업한 동료 영화인들이 참석하는 GV 행사와 달리 배우 김아중, 작가 정세랑라는 다소 낯선 조합의 게스트가 참여해 강수연에 대한 특별한 기억과 애정을 나눴다. 6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진행한 '스페셜 토크: 강수연의 선택들'에서 나온 이야기 일부를 강수연을 기억하는 팬들과 함께 나누고자 정리했다.


김아중과 정세랑과 강수연. 누가 들어도 '무슨 인연일까' 궁금증이 들만한 조합이다. 모더레이터 손희정 평론가가 이 자리에 참석하게 된 이유를 묻자, 정세랑 작가는 “처음엔 추모집에 수록할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팬이긴 하지만 좀 더 가까운 분들이 (추모집 글을) 써야 하지 않나 싶었다. 하지만 뒤따라가는 세대로서 사랑을 표현할 기회를 주신 건가 싶어 용기를 내 참여하게 됐다”고 대답했다. 정세랑은 가족들이 워낙 팬이고, 특히 어머니가 강수연 배우를 무척 좋아한다며 “추모 글을 쓴다고 하니까 ‘네가 뭔데 그걸 써, 내가 팬인데’ 하면서 화를 내셨다. 아, 찐팬은 화를 내는구나 생각했다”고 언급했다. 단순히 어머니만 그런 것이 아니라 가족 모두 강수연을 좋아했기에 “강수연이 출연하면 본다”가 기본 전제였고, 정세랑이 어려서 시청 연령이 안되는 작품들도 “‘너 눈 가리고 있어’ 하면서 봤다. 그래서 이번에 작품을 다시 보니까 영화를 줄무늬처럼 봤구나 싶었다. '영화'라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얼굴이 강수연 배우님이다”라고 강수연 배우에 대한 진심 어린 찬사를 보냈다.

정세랑 작가의 글이 실린 강수연 추모집. 정성일 평론가, 봉준호 감독, 설경구와 김현주의 글 또한 수록됐다.

반면 김아중은 '배우'라는 공통점 때문에 강수연과 인연이 있다고 했다. 김아중과 강수연은 작품으로 만난 적은 없지만, 김아중이 <미녀는 괴로워>로 갑작스럽게 스타가 된 후 고민이 많을 때, 강수연이 먼저 식사 자리에 초대했다고. <미녀는 괴로워>가 흥행에 성공하고 김아중에게 여우주연상이라는 영예를 줬기에 스스로 아끼는 작품이지만 동시에 당시 김아중은 그런 상황을 무겁게 느꼈다고 한다. 그런데 강수연이 영화인들과 만나는 사적 자리에 김아중을 불렀고, “어린 나이에 상을 받아서 질투하는 사람들 많지? 힘들지?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열심히 잘하면 돼”라고 독려해 주었다고. 그런 개인적인 기억 외에도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최초의 배우, 그러면서도 영화계에 크고 작은 일이 있을 때마다 행정적인 부분까지 앞장섰던 정말 멋있는 선배라고 강수연을 떠올렸다. 김아중은 “사실 영화계에서 바라는 '여배우의 분위기'가 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움츠려들 때가 있다. 그냥 아름다운 액자형 배우가 돼야 하는 건가 (싶기도 하다). 그런 생각이 들 때 강수연 선배님은 그런 액자를 뚫고 나와 현업인이자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셨다. 후배 배우 입장에서 정말 멋있는 배우의 모습은 저런 거구나 (생각했다)”라고 덧붙였다.


강수연 1주기 추모전 '강수연, 영화롭게 오랫동안' 포스터

「보건교사 안은영」, 「목소리를 드릴게요」 등 참신한 상상력의 소설을 집필한 정세랑 작가는 최근 영상물의 시나리오도 작업 중이다(최근 공개한 <스타워즈: 비전스> 시즌 2의 '어둠의 머리를 벨 수 있다면'도 그의 작품이다). 때문에 그는 언젠가 자신의 각본이 영화화된다면 꼭 강수연을 캐스팅하고 싶었다고 추모집 글에 적었단다. 어떤 작품의 어떤 역할에 강수연을 캐스팅하고 싶었냐는 모더레이터의 질문에 정세랑은 “호러 스릴러”였다며 굉장히 중요한 키를 가진 인물, 카리스마가 필요한 인물에 강수연을 캐스팅하고 싶다고 밝혔다. 한때는 “나랑 작업하기엔 너무 먼 배우”라고 느꼈는데, 강수연이 SF 영화 <정이>에 출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SF에도 마음이 열려 계시면 다른 장르에도 되게 마음이 열려 계시다는 뜻이니까 내가 열심히 하면 나랑도 일하실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품었다. 이제는 이뤄질 수 없는 꿈이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강수연 배우님을 보면 발밑에 드러눕고 출연을 부탁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김아중은 강수연이 한국영화가 진화하는 데 중심점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80년대 중반쯤부터 강수연 선배님이 성인으로 연기를 시작했다. 그 이전 에로티시즘의 영화에서는 진지한 고찰이 크게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지점에서 소비되는 영화들이었다”며 “그런 영화들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품고 진지한 고찰을 담아내면서 영화가 더 영화답게 진화했다고 생각한다. 그 한가운데 강수연 선배님이 있었고, 양쪽의 손을 딱 맞잡고 타협을 하셨던 것 아닐까”라고 말을 이었다. “이런 부분(에로티시즘)을 상업적으로 놓칠 수 없는데. 동시에 배우와 작품으로서 담아내야 하는 것도 놓칠 수 없고, 그래서 그 양쪽을 굳건히 잡고 가신 것 같다. 그 안에서도 굉장히 지혜롭게 선택하셨을 것이다”라며 강수연 배우가 거둔 성취에 대해 재차 강조했다.

'스페셜 토크'는 <처녀들의 저녁식사> 상영 후 진행됐다.

이번 '스페셜 토크' 자리는 강수연에게 추모를 보내는 자리이기도 하나, 현재 활동 중인 여성 작가와 여성 배우의 만남이라 보다 폭넓은 대화가 오갔다. 정세랑 작가는 토크 전에 상영한 <처녀들의 저녁식사> 속 강수연의 연기를 예로 들어 배우가 연기하며 작가나 감독이 가고 싶은 방향과 화학 반응을 일으켜 제3의 포인트로 나아갈 때의, “배우 자체의 힘으로 뚫고 나가는 힘”을 찬양했다. 정세랑은 캐릭터가 욕망의 객체가 되지 않게 하는 배우의 연기를 “이상한 도치(倒置)”라고 언급했고, 이에 김아중 배우는 “글을 쓴 분이나 영화를 연출하는 분들이 만들어놓은 캐릭터가 있다. 배우가 어느 순간 그들보다 캐릭터를 더 사랑해버리면 나오는 것 같다”로 배우의 입장에서 설명했다. 정세랑은 김아중의 설명에 수긍하며 “늘 궁금했던 것이 풀렸다”고 화답했다.


강수연 배우

강수연의 필모그래피를 되짚는 자리였기에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 또한 빠질 수 없었다. 모더레이터 손희정 평론가는 “강수연 배우가 국제무대에서 상을 받고 돌아왔을 때, 20대 초반이었다. 그 엄청난 무게를 지고 돌아왔으니 작품 선택을 좀 더 보수적으로 할 수 있었는데, 굉장히 급진적인 메시지를 가진 영화들로 나아갔다”고 언급하며 “강수연 배우가 생전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라는, <베테랑>에 쓰인 그 말을 많이 했다는데 이런 게 이 사람의 가오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인 것 같다”고 말했다. 또 과거 「씨네21」에서 사용했다는 ‘성녀와 요부 사이’라는 말을 인용하며 “(두 단어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을 스테레오화할 때 두 가지 이미지에 가둬놓고 운신의 폭을 줄이려는 재현이었다. 강수연 배우가 연기한 많은 캐릭터는 이 스테레오타입을 뛰어넘으려는 노력이 있었다”로 강수연의 필모그래피와 연기사를 요약했다.

이에 정세랑은 <처녀들의 저녁식사>를 예로 들어 “그 이전 시대가 엄숙주의의 시대였던 것 같다. 몸이 거기 있는데, 몸이 없는 것처럼 여기는. 그러다 몸이 발견하는 시기, 내게 몸이 있고 욕망과 감정과 쾌감 등 여러 가지가 있구나 발견하고 탐구하는 시기가 온 것이다. 그걸 개인이 아니라 사회가 통과해야 하는 주제가 있는데 (<처녀들의 저녁식사>가) 그걸 사회적으로 통과하게 해준 것 같다고 생각한다”는 의견을 덧붙였다. 김아중은 “(이번 추모제는) 강수연 배우님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 기억을 이어가려는 것도 있지만, 강수연 선배님 자체가 한국영화에 굉장히 상징적인 사람이다. 한국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께서 이번 추모제를 함께 꾸준히 관심 가져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강수연 배우가 한국영화계에 남긴 잔향을 다시금 상기했다.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