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가 함께 영화를 봅니다. 멜로물을 보며 연애 시절을 떠올리고, 육아물을 보며 훗날을 걱정합니다. 공포물은 뜸했던 스킨십을 나누게 하는 좋은 핑곗거리이고, 액션물은 부부 싸움의 기술을 배울 수 있는 훌륭한 학습서입니다. 똑같은 영화를 봐도 남편과 아내는 생각하는 게 다릅니다. 좋아하는 장르도 다르기 때문에 영화 편식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편집자 주-
“아직 연락처 넘기지 마!” 소개팅을 결정하고 나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상대방이 내 번호를 저장하기 전에 서둘러야 하는 일. 바로 카카오톡 프로필을 정비하는 일이다. 피부 보정은 물론 비율까지 손을 봐야 일단 안심이 된다. 아차차, 혹시 남아있을지 모르는 전남친의 흔적도 지워야 한다. 자칫하단 환승 연애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남편과 나는 소개팅으로 만났다. 친한 동생이 중간에서 다리를 놔 줬다. 진짜 괜찮은 사람이니 연락이나 해보라는 말과 함께. 그리고 며칠이 지났을까. 남편에게 카톡이 왔다. "안녕하세요. 소개받기로 한 OOO입니다". 그런데 이게 뭐지. 남편의 프로필 사진이 온통 풍경 사진뿐이다. 넘기고 넘겨도 제대로 된 얼굴 사진 한 장이 없다.
사진을 봐야 만날지 말지 결정하지!
영화 <러브 하드>는 남자들의 사진을 살펴보는 나탈리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나탈리의 휴대폰에는 소개팅 앱이 깔려 있다. 화면을 쓱 넘기기만 하면 다양한 남자들이 넘쳐나는 디지털 문명을 양껏 즐기는 중이다. 하지만 프로필 사진과 몇 줄 안 되는 자기소개만으로 괜찮은 남자를 고르기는 쉽지가 않다. 나탈리는 솔로 n년차인 동시에 소개팅 실패 n년차이다.
훈훈한 사진을 보고 만났더니 아내가 있는 유부남이었다. 노을이 질 무렵 배 타러 가자고 해놓고 잠수를 탄 남자도 있었다. n번의 실패에서 얻은 것은 단 하나. 소개팅 실패담을 인터넷에 올렸더니 대히트 쳤다. 남의 연애에 관심이 많은 인간의 습성 때문일까. 덕분에 나탈리는 기자라는 직업이 생기고 돈도 벌었다. 하지만 그녀의 옆구리는 여전히 시리다.
소개팅 실패담이라면 나도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것도 무려 생애 첫 소개팅에서 처참하게 당했다. 저녁을 먹으러 갔는데 세트 메뉴를 시킨다고 핀잔을 들었다. 창업을 하고 싶다고 하니 분명히 망할 것이라는 악담이 돌아왔다. 커피를 먹으러 가서 스무디를 시키니 배도 안 부르냐며 무안을 줬다. 거기에다 덧붙이는 말이 가관. “집에는 혼자 가실 수 있죠?”
내가 A를 말하면 상대방은 B를 말하고 내가 빨갛다 말하면 상대방은 파랗다고 말했다. 대화가 툭툭 끊기니 숨도 턱턱 막혔다. 주선자 성의를 봐서 화 한번 안 내고 고이 돌려보냈다. 내가 얼마나 마음에 안 들었으면 저렇게까지 했겠냐 싶어 괜히 거울만 만지작댔다. 집에 가는 길에 맥주도 몇 캔, 아니 좀 많이 샀다.
그날 이후 몇 년간 소개팅은 쳐다도 안 봤다. '역시 나는 소개팅과 맞지 않는구나'를 뼈저리게 느끼게 된 순간이었다고 할까. 하지만 나탈리는 달랐다. 소개팅을 거듭 실패하자 반경을 넓히는 묘수를 택했다. 집 주변뿐만 아니라 5천 km 이상까지 활동 반경을 넓힌다. 이제 나탈리는 먼 지역의 남자들까지 만나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완전 내 스타일인데?
두드리면 열린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나탈리는 휴대폰을 계속 두드렸다. 그랬더니 핑크빛 세계가 열렸다. 나탈리는 소개팅 어플에서 조시의 사진을 발견한다. 섹시하고 귀엽기까지 한데다 자기소개 문구도 꽤나 낭만적이다. 인생을 뜨겁게 산다는 조시에게 메시지를 보내지 않을 이유가 없다.
둘은 대화도 잘 통한다. 별 이야기가 아닌데도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 분위기에 취해 나탈리는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가정사까지 털어놓는다. 그러자 조시는 자신의 부모님은 이혼을 하셨다며 따스한 위로를 건네온다. 좋아하는 책 구절도 겹친다. 요리를 즐겨 한다는 점도 꼭 닮았다. 하다 하다 어린 시절 흑역사까지 비슷하다.
“꼭 우리 같다 그치?” 영화를 보던 남편의 한마디를 던진다. 소개팅 대참사가 발발하고 몇 년 후에 남편을 소개받았다. 연락이나 해보고 아니면 잠수 타자는 생각으로 가볍게 임했다. 하지만 웬걸. 대화가 너무 잘 통했다. 취미나 특기 같은 고전적인 이야기부터 미래에 대한 고민이나 걱정까지 나눴다. 마치 조시와 나탈리처럼. 휴대폰을 바꾸며 그때의 대화 기록이 다 날아가 버린 것이 천추의 한이다. 쿵 하면 짝. 그게 남편과 나였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막상 만났는데 마음에 안 들면 어떡하지?
나탈리는 조시를 만나러 5천 킬로미터를 날아간다. 소울메이트를 찾은 판에 거리가 대수겠는가. 짧은 치마를 입고 뾰쪽 구두도 신는다. 아끼고 아끼던 새 립글로스까지 과감히 꺼내 들었다.
하지만 실제로 마주한 조시의 모습은 충격 그 자체. 소개팅 앱 사진과는 아예 딴 판이다. 턱을 줄이고 눈을 키우는 포토샵 수준을 넘어섰다. 심지어 인종까지 속였다. 나탈리는 결국 소리친다. “어떤 사이코가 남의 사진으로 가짜 연애를 해요!”
단단히 화난 나탈리는 근처 술집으로 간다. 5천 km를 날라 왔으니 아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냥 연거푸 술만 마셔댄다.
그런데 술집에 조시의 얼굴을 한 남자가 나타났다. 소개팅 어플에서 봤던 바로 그 남자. 그의 진짜 이름은 태그라고 한다. 조시가 태그의 얼굴을 사칭했던 것이다. 그때 조시가 한 가지 제안을 해온다. 가족들에게 여자친구 행세를 해준다면 태그와 잘 되도록 도와주겠다고.
얼굴이냐 성격이냐, 선택은 너의 몫
조시는 약속대로 나탈리와 태그를 이어주기 위해 노력한다. 먼저 나탈리에게 태그의 여자 취향을 하나씩 알려준다. 하지만 그 취향은 나탈리와는 정반대다. 태그는 야외활동을 즐기는 여자를 좋아하지만 나탈리는 침대에서 내려오다가도 삐끗하는 대단한 운동 부족이다. 편하고 무심해 보이는 옷차림을 좋아하는 태그와 달리 나탈리는 딱 달라붙는 섹시한 옷을 즐겨 입는다. 하나부터 열까지 맞는 구석이 없지만 나탈리는 그저 태그가 좋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태그의 '얼굴'이 좋다.
결국 나탈리는 태그 맞춤형 인간으로 거듭난다. 머리를 질끈 묶고 편한 옷을 입고 태그가 좋아하는 애독서를 손에 꼭 쥐었다. 거기에다 화룡점정. 육식주의자 태그를 위해 익지도 않은 시뻘건 고기까지 질겅질겅 씹는다. 나탈리는 채식주의자다. 그녀는 사랑을 위해 신념까지 바꿨다.
반면 조시와는 노력하지 않아도 죽이 척척 맞다. 조시의 다소 마이너한 취미마저 나탈리는 싫지가 않다. 형에게 치여 늘 주눅들어 있던 조시는 나탈리로 인해 용기를 얻는다. 꾸미지 않은 모습으로 마주해서일까. 조시와 나탈리의 얼굴에는 자연스러운 미소가 감돈다.
이쯤 되니 나탈리가 누구를 선택할지 궁금해진다. 태그의 얼굴에 조시의 내면이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영화는 안타깝게도 그런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조시냐 태그냐. 그것이 문제다.
(남편에게는 비밀이지만) 사실 첫 번째 소개팅남의 외모는 정말 내 스타일이었다. 소개팅이라면 질색하던 내가 첫 소개팅을 치를 수 있었던 것도 그 외모가 한몫했다. 웃긴 것은 그 소개팅남도 내 외모를 보고 주선을 부탁했단다. 하지만 우리는 외모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맞지 않았다. 이 남자와 사귀게 된다면 정말 매일같이 싸우겠구나 생각했다. 상대방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애프터 신청은 불사하고 바로 옆 동네에 살면서 집에도 안 데려다줬으니 말이다.
하지만 두 번째 소개팅은 달랐다. 내가 원하는 외모는 아니었지만 말이 술술 잘 통했다. 초저녁 카페에서 만나 마감시간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지금 생각해 보면 프로필 사진을 풍경 사진으로 해 놓은 것이 남편의 묘수가 아니었나 싶다. 아 물론 남편은 멋있는 사람이다. 내 스타일이 아니었을 뿐.
내 선택은 조시
첫 단추가 잘못 꿰어져서일까. 조시와 나탈리는 결국 파국을 맞는다. 서로에게 호감은 있지만 이어지기에는 너무 많은 거짓말을 했다. 결국 약혼 깜짝파티에서 대참사가 일어난다. 조시 부모님이 마련한 파티에 이웃 주민 태그도 참석했기 때문이다. 결국 조시와 나탈리는 모든 일을 털어놓는다. 그러자 태그가 말한다. “조시가 사칭을 했다고 했죠? 그런데 당신도 저에게 똑같은 짓을 했네요. 나에게 보여줬던 당신은 다 거짓이었네요. 취향도, 옷 스타일도.”
대참사가 일어났으니 나탈리는 도망칠 수밖에 없다. 나탈리는 다시 5천 km 날아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조시에게 한 장의 편지를 남긴다.
당신을 숨기지 말아요
몇 달 후 소개팅 어플에 새로운 남자가 뜬다. 이름은 조시. 얼굴도 진짜 조시다. 그 누구를 흉내 내지도 않고, 그 누구의 사진을 사칭하지도 않았다. 나탈리는 조시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그렇게 나탈리와 조시는 해피엔딩을 맞는다.
크레딧이 올라가자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엔딩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됐으면 어땠을까. 조시가 자신의 진짜 얼굴을 밝히고 소개팅을 했다면 말이다.
조시는 영화 속에서 이런 대사를 한다. “내 진짜 프로필로는 여태껏 세명 밖에 못 만나봤어요. 그중에 한 명은 70살이었고요. 심지어 인공 심박기를 달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누가 봐도 멋진 남자 사진을 사칭했죠. 그랬더니 무슨 일이 일어난 줄 알아요? 단 5분 만에 85명과 매칭됐어요”
또 다른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남편의 프로필이 풍경 사진이 아니라 인물 사진이었다면? 주선자가 처음부터 사진을 보여주며 소개팅을 주선했다면?
어찌 됐든 우리도 해피엔딩이면 됐지!
매일신문 임소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