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는 두 개 이상의 시간, 혹은 시공에서 사는 존재라 할 수 있다. 어느 소설가가 엽기 연쇄살인마에 관한 소설만 줄곧 써댄다고 해서 그를 연쇄살인마라 일컬을 수는 없듯, 괴물 같은 형상을 시종일관 그려대는 화가를 괴물이라 단언할 수도 없다. 연쇄살인마든 괴물이든 일종의 환상의 소산이다. 그 환상은 예술가 내부의 고유한 체험과 세계관에 의해 출현한다. 소설가가 창조한 연쇄살인마나 화가가 그려낸 괴물은 예술가 자신이 세계와 자신 사이에서 벌이는 갈등과 사투의 흔적이랄 수 있다.
마음의 병을 훑는 영혼의 내시경
일상적 삶이라는 건 대체로 어떤 사람이나 엇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오로지 자신만이 떠안고 있는 고민과 고통과 상처가 있다. 굳이 예술가가 아니어도 마찬가지다. 주식을 불리는 사람이든, 국가를 지키는 사람이든 자신의 사명이나 삶의 목적에 의해 부가되는 각기 다른 가치가 있을 수 있다. 그로 인해 타인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세계 하나쯤 누구나 가지거나 꿈꾸게 된다. 그리고 그게 때로 병이 되거나 폭력을 불러오거나 자기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 상처의 빌미가 되기도 한다.
잉마르 베리만은 자아와 타인과의 관계 및 그로 인한 상처와 모순의 음영을 줄기차게 파헤친 감독이다. 일차원적인 3인칭 서사의 규칙으로 그의 영화를 이해하려 들면 난삽하고 지루하고 암울한 장면들만 나른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된다. 베리만은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마음의 병’의 인과와 핵심에 대해 줄기차게 메스를 든다. 보다 보면 ‘영혼의 내시경 필름’이라는 표현이 선뜻 떠오르기도 한다. 인물들은 항상 어딘가 뒤틀려 있고 마음의 온도가 지나치게 차갑거나 뜨거워 보인다. 목에 사레라도 걸린 듯 뭔가 갑갑하게 소리치고 싶은 심정을 느끼게도 만든다.
다 보고 나서도 그 이상한 갑갑증이 해갈되진 않는다. 되레 더 막막하고 먹먹한 공허 같은 게 몰려온다. 그런데 그게 굉장히 매혹적이다. 낱낱이 쪼개지고 이지러진 마음의 균열을 고스란히 찍어낸 뢴트겐 사진을 보는 듯한 느낌도 있다. 그 사진이 왠지 이 세계의 진짜 지도 같은 기분이 든다. 음영이 분명히 나뉜 그 지도는 사람이라면 평생 헤매고 방황해야 하는 숙명의 도해(圖解) 같기도 하다. 누구도 괴물은 아니지만, 누구나 괴물이 될 수 있다는 암시의 부적 같달까. <늑대의 시간>(1968)은 베리만의 영화 중 그 ‘부적’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낸 작품이라 할 만하다.
그들은 나의 환상이고, 그들의 환상이 나인가
화가 요한(막스 폰 시도우)은 아내 알마(리브 울만)와 함께 외딴섬에 들어와 그림에 몰두한 지 7년째다. 요한은 항상 절망 중이다. 그림에 몰두할수록 그림으로부터 멀어지고 알마와의 사랑을 온전히 유지하려 할수록 알 수 없는 갈등에 휩싸인다. 알마는 요한의 절망과 분열을 고스란히 떠안은 채 그를 보호하려 한다. 요한은 불면과 환상에 시달리는데, 그 내용을 일기로 적어놓는다. 그림은 점점 기괴해진다. 알마와 섬의 풍경을 그리는 동시에, 섬뜩하고 형상을 알 수 없는 이상한 그림들도 쌓여간다. 요한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지워버리는 상태에 이르고 만다.
섬엔 폰 메르켄이라는 성주가 있다. 요한과 알마는 그의 성에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아 간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가 상영되는 등 영화의 중반 이후는 그 성에서 벌어지는 기괴한 일들로 점철돼 있다. 그 성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요한의 환상에 불과한지는 이 영화의 주요한 쟁점이 되는데, 성에서 나타나는 인물들 또한 마찬가지다. 모든 게 실재하는 듯 보이지만 모든 게 환상이고, 모두 사람인 듯싶지만 그저 환영이거나 유령이라 불릴 만한 소지도 다분하다. 프로이트나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을 토대로 분석한 내용들도 국내외 막론 적지 않은 영화이지만, 새삼스레 이론적 확증이나 분석을 내놓진 않겠다. 이 영화가 예술가에 대한 베리만 나름의 존재론적 성찰에서 출발한다는 점만 밝히겠다.
굴레에 갇혀, 굴레를 표현하지 않으면 풀리지 않는 굴레라니!
앞서 예술가는 두 개 이상의 세계에 산다고 했거니와, 요한은 그러한 분열증을 표일하게 드러내는 인물이다. 그는 현실을 그리는 동시에, 현실 표면엔 드러나지 않는 자신의 내적 세계에 휘둘리듯이 빨려들어간다. 알마는 그가 완전히 현실을 이탈하지 않도록 고삐를 죄어주는 인물이지만, 결국 알마 또한 요한의 환상 속에 빠져버리고 만다. 하지만 알마는 요한의 환상 속에서 가장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살아있는 인물이다. 어쩌면 요한은 알마라는 구체적 대상이 존재하기에 더 깊은 환상 속으로 빠져버린 것일 수도 있다는 역설도 성립 가능하다.
알마는 요한의 환상에 동참하되, 요한을 환상 바깥으로 다시 끌고 나오는 존재이기도 하다. 요한의 환상은 오래도록 품고 있는 죄의식과 강박의 소산이다. 알마를 만나기 전 사랑했던 베로니카라는 존재는 요한의 강박을 대표적으로 표상하는 인물이다. 요한이 그리는 그림들은 자신 안에 내재한 여러 다른 존재를 현실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원인이자 결과이다. 모든 예술가가 그런 식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다는 건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그게 곧 예술가의 진심이자 능력이자 동력인 동시에, 정신적 굴레이자 억압으로 작용한다는 사실 또한 부언 불필요하다. 하지만, 그 굴레를 떼어내지 않으면 더 이상 어떤 예술 작업도 예술가에게 무의미하다는 점에서 끝없이 되새겨지는 예술의 기본 원리이기도 하다.
요한을 성으로 불러들인 자들은 요한의 환상이자 요한이 현실에서 맞닥뜨린 소위 ‘예술 후원자’들의 악랄한 가면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들에게 예술가는 자신들의 환상이나 미의식, 품위와 허영을 치장해주는 일개 장식물에 지나지 않는다. 속을 썩이고 내장을 불태우듯 자기 자신과 분투하여 완성한 작품에 대해 그들은 단 몇 마디의 안일한 재단으로 자신의 위세를 드러내곤 한다. 요한에게 그들은 시체를 뜯어먹고 사는 까마귀이거나 살아있는 그대로 죽어있는 시체나 마찬가지다. 요한의 정신적 균열을 더 깊숙이 난자하며 그들은 깔깔거리고 이기죽댄다. 물론, 이 역시 요한의 강박일 수 있지만, 그 강박이 현실적인 내상과 고통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그들의 악마이다. 더 골치 아픈 건 요한은 그 악마들의 지령(?) 없이는 그 어떤 그림에도 몰두할 수 없다는 점. 요한은 쪼개진다. 그 쪼개진 틈엔 요한 스스로도 돌이키고 싶지 않은 어떤 원형적 죄의식이 있다.
바다의 침묵, 그 고요는 얼마나 많은 말을 전하는가
요한이 알마에게 자신의 환상을 설명하는 내용 중 핵심적인 장면이 있다. 바닷가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낚시를 하는 요한에게 한 소년이 접근한다. 소년은 요한의 등 뒤에 그림자처럼 바짝 붙는다. 요한은 소년이 자신을 물에 빠뜨릴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힌다. 소년이 자신의 그림을 보려 하자 요한은 짜증을 낸다. 요한에게 소년은 사람이 아니라 뱀이거나 미친개나 마찬가지이다. 이내 요한과 소년이 엉겨 붙어 싸운다. 치고받고 넘어뜨리는 게 아니라 서로 목과 어깨를 물어뜯는 방식이다. 그러다가 소년이 쓰러진다. 요한이 자리를 뜨려 하자 소년이 갑자기 요한의 발을 물어뜯으며 다시 덤빈다. 요한이 돌을 집어 들어 소년을 여러 차례 내려친다. 그러곤 소년의 시체를 바다에 던져버린다. 물속에 가라앉는 소년의 머리카락이 수면 위에 무슨 산호처럼 꿈틀꿈틀 떠 있다.
이 장면에서 대사는 하나도 없다. 급박하게 죄였다가 다시 느슨해지는 음악과 거친 행위만 진동한다. 요한에게 소년은 어떤 존재일까, 하는 물음은 여러모로 해석 가능하다. 자신의 어린 시절일 수도, 또는 어린 시절 품었던 막연한 에로스적 환상의 대리물일 수도, 평생토록 그의 멍에를 자극하는 뱀의 유혹일 수도 있다. 뭐라 해석하든 요한이 결국 그 환상과 억압의 굴레에 사로잡혀 있다는 암시만은 분명하다. 산호처럼 떠오른 소년의 머리카락은 바다 한가운데 외따로 떠 있는 섬 같아 보인다. 요한이 그림을 그리려고 멀리 떠나온 섬이 바로 그 소년의 머리 위가 아닌가 싶어질 정도다.
예술가에겐 사랑도 결국 타인의 일
반복건대, 예술가는 두 개 이상의 세계를 실제로 산다. 그 두 세계 사이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면서 싸우고 사랑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는 결국 항상 혼자다. 사랑하는 사람도 그가 넘나드는 세계의 아름다운 교량이 될 수는 없다. 사랑도 결국 타인의 일이다. 예술가는 언제나 자신 안에 갇혀 있다. 낚싯대를 드리우나 결국 그가 낚는 건 자신의 또 다른 환상뿐이다. ‘그’에게 ‘나’는 늘 헛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아는 모든 사람이다. 이것은 예술에 대한 ‘비터스윗’한, 영원히 답이 돌아오지 않는 공허한 질문에 불과하다. 예술은 바로 그렇기에 누군가에겐 유효한 업이자 굴레이다. 여기까지만 말하자. 나무아미타불.
강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