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를 꼭 배워요. 한국어보다 영어를 잘 해야 해. 한국어는 사람 속여 먹을 때나 쓰지, 쓸 데가 없어.”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내게 ‘한국어 무용론’을 설파한 대화 상대는 지난 세기에 치열하게 청춘을 보내고 이제 노년을 맞이한 엘리트였다. ‘젊은이’에게 이런저런 덕담을 건네던 중 나온 이야기인데, 내가 한국어로 글을 써서 밥 벌어먹고 사는 사람이라는 걸 미처 모르고 한 소리라고는 하지만, 초면의 한국어 사용자에게 “한국어 아무 쓸모 없다"라는 말을 하는 사람은 처음이라 숫제 신선하기까지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영어를 한국 사회 제2 공용어로 도입하자’는 영어 공용화론도 벌써 10여 년 전쯤엔 유행이 다 지나간 이야기 아닌가. 영어 공용화론도 이제 지나간 옛 노래가 된 마당에, 이처럼 극단적으로 한국어 무용론을 설파하는 사람이라니 신선하지 않을 도리가 있나. “한국어는 사람 속여 먹을 때나” 쓴다는 말을 한국어로 하고 있다는 점이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다” 논증이 떠오르기도 했다.
하긴, 한국어 무용론까지는 아니어도 비슷한 이야기는 살면서 여러 차례 듣긴 했다. 한국어의 세계적 위상은 지금과 같지 않았고 인공지능 번역의 질은 아직 형편없던 시기, 동년배 친구들조차 “한국어로 글 써서 밥벌이가 되겠냐”라고 물어오곤 했다. 심지어는 같은 업계에서 글을 쓰는 동료들 중에도 몇몇 “한국어로 공략할 수 있는 시장에는 한계가 있다"라며 영어나 일어, 중국어를 배워볼 것을 권유하는 이들이 있었다. 어떤 이는 남미권이 한류의 다음 진원지가 될 거라면서 스페인어를 배울 것을 권하기도 했었지.
그런 이야기에 흔들린 적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나는 늘 한국어로 말하고 쓰는 내 자리로 돌아오곤 했다. 태어나서 일평생 써 왔던 한국어로 쓰는 글도 이렇게 어눌하기 짝이 없는데, 남의 말글로 밥벌이를 할 자신 같은 건 없었기 때문이다. 더 좋은 한국어 문장을 쓰려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에 겨운데 말이다. 게다가 더 많은 독자층을 공략할 수 있는 영미권 칼럼니스트들이 받는 고료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에는 더더욱 욕심이 없어졌다. 기왕 같은 박봉에 하는 고생이라면 내 나라 내 말로 고생하고 싶었다.
현실적인 이유만 있었던 건 아니다. 조금 촌스러운 이야기 같아 부끄럽지만, 나는 우리 말을 쓸 수 없던 시기를 살았던 이들을 생각하곤 했다. 우리말글을 빼앗긴 채 남의 말을 쓸 것을 강요당했던 나의 조부모들을 생각했고, 조선어로 글을 썼다는 이유로 탄압을 받았던 수많은 문사들을 생각했다. 뜬금없는 애국심인가 싶겠지만, 내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는 목숨을 걸어야 했다는 사실이 주는 무게감은 결코 작지 않았다. 그렇다면 더 열심히 써야 하는 거 아닐까. 한국어가 가장 아름다운 언어라거나 가장 과학적인 언어라는 프로파간다에 동의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지만, 그래도 누군가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언어이며 여전히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우리의 언어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가능하다면, 우리말글을 지키는 사람들의 계보 맨 끄트머리 말석 정도에는 앉고 싶었다.
독립운동가 송몽규를 프리즘 삼아 시인 윤동주의 삶을 돌아본 영화 〈동주〉는, 윤동주의 시 세계를 지배한 정서인 ‘부끄러움’의 근원을 찾아 떠난다. 동주(강하늘)는 사촌 형이자 평생의 벗인 몽규(박정민)의 그것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의 문재(文才)가 부끄럽고, 몽규처럼 신춘문예 같은 정식 경로를 통해 등단하지 못한 자신의 실력이 부끄럽다. 언제나 행동이 앞서는 액티비스트 몽규와 달리, 늘 내면으로 침잠하는 자신이 부끄럽다. 보는 이들은 성찰이라 하겠으나, 부끄러움이 많았던 동주는 그걸 주저함이라 여겼을 것이라고, 〈동주〉는 해석한다. “세상이 날 필요로 하는데, 어찌 책만 보면서 살겠니?” 기세 좋게 독립운동에 나서는 몽규가 늘 자신은 떼어놓고 갈 때, 자신에겐 같이 가자는 말도 하지 않을 때, 동주는 한없이 부끄러워한다.
하지만 그 모든 부끄러움도, 자신에게 익숙한 조선어로 배우고 말하고 쓸 수 없는 상황만큼 부끄럽지는 않다. 조선어 교육이 금지되고 조선어 서적을 가지는 것도 금지되며 창씨개명을 강요당하는 시대, 일제의 입김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운 공간이었던 연희전문 교정에도 창씨개명을 독려하는 벽보가 붙는다. 한때 민족의 계몽을 이야기하던 문인 이광수가 똑같이 ‘민족의 계몽’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쓴 창씨개명 독려문 ‘창씨와 나’를 읽으며, 동주는 치밀어 오르는 굴욕감을 참지 못한다. 동주는 자기 손에 쥐어진 창씨개명 신청서를 조용히 찢는다.
“여기 남아도 어차피 일본 이름으로 살아야 한다. 좋게 생각하라.”
나고 자란 땅에서 남의 나라 이름으로 살아갈 바에야, 차라리 그 나라에 가서 공부라도 더 하는 게 낫지 않겠냐는 생각에 오른 유학길. 일본 유학을 위해 내키지 않는 창씨개명을 한 동주는 몽규의 말에 깊은 한숨을 내쉰다. 조선어로 글을 써서 조선 사람들의 마음을 한 명씩 한 명씩 움직이고 싶었던 시인은, 히라누마 도쥬라는 일본 이름이 영 치욕스럽다. 동주는 조용히 자신이 쓴 시를 떠올린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24년 1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참회록’ 中)
몽규가 선택한 저항의 방식이 액티비즘이었다면, 동주가 선택한 저항의 방식은 ‘끝까지 조선어로 글을 쓰는 것’이었다. 일본어로 영문학 수업을 듣는 릿교대학 강의실 안에서도, 동주는 짬이 날 때마다 조선어로 시를 끄적였다. 그는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며 제 저항이 고작 그것에 머무는 것을 부끄러워했지만, 그건 결코 작은 저항이 아니었다. 지식분자가 조선어를 쓰는 것만으로도 ‘불령선인’으로 분류가 되고 조선어 서적을 가지는 것도 금지되던 시대, 욕된 시대를 살아가는 제 부끄러움을 감추지 않고 우리말글로 적어내려가는 건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동주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자기 방식의 투쟁이라는 사실을. 투쟁을 결심하고 몽규와 함께 조선인 유학생들을 규합하는 활동을 하던 동주는, 결정적인 순간 몽규와 다른 선택을 한다. 일경의 추적에 쫓기던 몽규가 찾아와 함께 도망치자고 했던 새벽, 동주는 단호하게 자신은 아직 갈 수 없노라 말한다. 쿠미(최희서)가 정리한 시집 영역본 원고를 확인하고 가야 했기 때문이다. 잡힐 때 잡히더라도 자신이 조선어로 남긴 글이 일어 완역과 영어 중역이라는 단계를 거친 결과물을 확인해야겠다고 결심한 순간, 동주는 자신이 싸우는 전선이 글쓰기의 전선임을 인정한 것이다.
안전을 생각했다면 굳이 원고를 확인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다카마쓰 교수(김우진)의 제자들이 영역한 것이니 그 번역은 또 얼마나 유려했으랴. 하지만 그럼에도 원고를 눈으로라도 보고 일어나겠다고 결심한 건 분명 글 쓰는 이의 자의식이었을 것이다. 핍박받는 언어인 조선어로 생각하고 말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제 글이 다른 언어로 얼마나 정확하게 옮겨졌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 자신이 의도한 조선어의 뉘앙스가 얼마나 잘 살아남았는지 보고 싶은 마음. 제 말글로는 시집을 출간할 수 없었던 시인의 절박한 마음.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내가 한국어로 아무리 오랫동안 글을 쓰고 말을 한다 해도 윤동주가 이룩한 단정하고 웅숭깊은 한국어 시들을 따라갈 방도는 없을 것이다. 그런 경지는 감히 꿈꿔본 적도 없다. 하지만 우리말글을 마음 놓고 사용하는 것이 꿈이었던 시인, 살아생전에 제 이름으로 된 시집을 발간할 수 없었던 시인의 생을 생각하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내가 밥벌이의 도구로 선택한 것이 누군가에게는 생을 걸어 지키고 싶었던 무언가였다는 사실은 무심하게 넘기기엔 꽤나 무겁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우리말글을 더 잘 쓰려 노력하는 것으로 그의 꿈을 살고 싶다. “한국어 아무 쓸모 없다"라는 말을 듣고, 새삼 우리말글을 마음 놓고 사용할 수 없었던 욕된 시절을 사는 걸 부끄럽게 여겼던 시인을 생각하게 된 건 그런 마음 때문이었다.
이승한 TV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