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이란 무엇인가. 짧은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시작은 분명 좋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준비한 용돈을 어머니에게 드렸고, 그에 더해 장 보실 때 쓰시라고 마트 상품권도 두어 장 드린 참이었다. 넌 뭘 이런 걸 다 주냐고 싫지 않은 목소리로 말하는 어머니를 볼 때까지만 해도 이번 명절은 이렇다 할 잔소리 없이 끝날 것이라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식사를 하고 왔다고 몇 차례 이야기했지만, 어머니는 간단하게 맛이나 보라며 잡채와 전을 데우고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점심식사를 마친 지 두 시간도 안 되어 아직 배가 부른 상태에서 두 번째 점심식사를 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남기면 서운해할까 싶어 천천히 식사를 하고 있는 동안, 어머니는 또다시 힐난하는 투로 정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OOO는 정말 나쁜 사람이지 않니? 어떻게 그렇게 태연하게 거짓말을 할 수가 있어? 내가 OOO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몇 번을 이야기했지만, 어머니의 논리는 늘 한결같았다. 네가 XXX를 지지하지 않으니 결국 OOO 편인 거겠지. 넌 그런데 뉴스를 보고도 OOO 편을 들 수가 있니?

나는 한사코 기분 좋은 명절에 정치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호소했지만, 어머니는 정치 유튜브에서 본 이야기를 기세 좋게 옮기며 말을 이어갔다. 나는 결국 왜 내가 XXX를 지지할 수 없는지를 한참 설명하고, 나는 OOO가 아니라 △△△를 지지한다고, 왜 명절 밥상에서 이런 이야기를 나눠야 하냐고 호소했다. 어머니는 서운한 티를 물씬 내면서 말했다. 그래, 난 △△△도 마음에 안 들더라. 어머니의 정치 이야기를 들으며 억지로 씹어 넘기는 음식들은 가슴께에서 턱턱 걸렸다. 잘 안 넘어가는 음식을 어떻게든 넘기려 천천히 꼭꼭 씹던 그때, 어머니가 용의 눈에 점을 찍었다. 너 그런데 또 살찐 것 같다. 아니, 살쪘다고 타박할 거면 먹이지나 말던가!

이미 새카맣게 타들어간 속에, 어머니는 다시 기름을 붓고 불을 당겼다. 너는 정말 결혼 생각은 없는 거니. 결혼하면 따로 살고, 명절 때 굳이 안 찾아와도 괜찮으니까 결혼을 하면 어떠니… 조만간 다가올 나의 생일에도, 그 뒤를 이어 다가올 어머니의 생일에도 이와 똑같은 대화를 나누게 될 거라는 생각에 벌써부터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보나 마나 또 난 잘 먹지도 않을 음식을 상다리가 부러져라 차리고는, 왜 더 안 먹느냐고 잔소리를 하다가 갑자기 차선을 급변경해 살찐 건 어떻게 할 거냐고 뭐라고 하겠지. 내가 듣기 싫은 정치 이야기를 한 무더기 하면서 내 속을 박박 긁은 뒤, 팔뚝에 있는 타투가 보기 싫어 죽겠다고 나무라고, 결혼은 언제 할 거냐고 묻겠지.

쓰디쓴 입을 다시며 어머니 집을 나서다가, 내가 이런 장면을 영화에서도 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맞아.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이하 〈에에올〉) 속 에블린(양자경)이 그렇지. 에블린은 딸 조이(스테파니 수)가 하고자 하는 말을 좀처럼 제대로 듣지 않는다. 조이는 할아버지(제임스 홍)에게 여자친구 베키(탈리 메델)을 소개하고 싶어 하지만, 가뜩이나 딸이 여자를 사귀는 걸 내심 못마땅해하는 에블린은 ‘할아버지 심장마비 오실라’ 같은 핑계를 대며 조이의 말을 묵살한다. 하긴, 에블린이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게 어디 베키 하나뿐이랴. 에블린은 조이가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것도, 팔뚝에 문신을 새긴 것도 마음에 안 든다.

한결같은 엄마 에블린의 태도에 지치고 서러운 조이는 대화를 포기하고 세탁소를 뛰쳐나간다. 에블린도 안다. 조이가 자신의 말에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그래서 에블린은 부랴부랴 조이의 뒤를 따라 나간다. 하지만 살면서 낯간지러운 사랑의 말을 해본 적이 별로 없을 에블린은 기껏 불러 세운 조이에게 뭐라고 하면 좋을지 몰라 더듬거리다가, 하면 안 되는 말들만 골라서 한다. “너, 좀 더 건강하게 챙겨 먹어야겠다. 살쪘네.” 조이는 실망에 찬 눈으로 에블린을 보다가 차를 타고 떠나버린다. 그게 에블린 방식의 사랑의 언어라는 걸 조이도 안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상처를 안 받는 건 아닌 탓에, 조이의 마음은 자꾸만 부스러진다.

에블린은 왜 조이에게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을까? 자신의 아버지 또한 자신을 그렇게 키웠기 때문이다. 에블린의 회상 속에서 아버지는 한 번도 따스하게 에블린을 품어준 적이 없었다. 아들이 아니라 딸이라는 이유로 시작부터 냉담했고, 골목을 뛰어다니는 에블린에게 고함을 치며 뛰지 말라고 혼을 냈다. 사랑하는 남자 웨이먼드(키 호이 콴)를 데리고 가자, 고작 이런 남자애랑 결혼할 거라면 넌 더 이상 내 딸도 아니라는 모진 말을 내뱉었다. 사랑을 표현하는 일이 극히 드물었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에블린은, 자신이 배운 유일한 양육 방법을 반복했다.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를 생각한다면, 역지사지로 딸이 느낄 상처를 감안해서 좀 더 따스하게 말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굳이 변명을 하자면, 남편 웨이먼드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온 뒤 에블린의 삶은 하루하루를 견디는 것 자체가 도전이었다. 에블린은 처음부터 세탁소를 운영할 생각 같은 건 없었고, 원치 않는 직장에 갇혀서 하루하루를 견디는 것은 형벌 같았다. 그나마 조이가 생겨서 기쁜 순간들도 있었지만 (그랬으니 딸의 이름을 ‘기쁨’이라고 지은 거겠지만) 망해가는 세탁소를 어떻게든 지탱하려는 발버둥 속에서 그 감정들도 조금씩 무뎌졌으리라.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미나리〉, 〈페어웰〉, 〈메이의 새빨간 비밀〉 등 북미권 아시아 이민 2세대들이 만든 영화들 속에서, 〈에에올〉은 다소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앞서 언급한 대부분의 아시아 디아스포라 영화들은 부모를 바라보는 자식의 자리에서 영화를 풀어간다. 사회적으로 존중받는 감독이나 작가의 자리에 도달한 아시아 이민 2세대가, 마침내 얻은 기회를 자신들의 성장기 이야기를 풀어내는 데 쓴 것이다. 〈에에올〉은 다소 접근 방향이 다르다. 〈에에올〉 또한 아시아 이민 2세대의 눈으로 바라본 가족 이야기를 꺼내지만, 〈에에올〉이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건 자식이 아니라 그 부모다. 촌스럽고 무뚝뚝하며 정치적으로 공정하지 못한, 그래서 자식들을 숨 막히게 하는 부모.

감독 대니얼 콴과 대니얼 샤이너트는, 그 답답하고 억압적인 부모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셀 수 없이 많은 멀티버스를 여행하게 시킨다. 그리곤 그 수많은 삶 속을 다 보여준 뒤에 원치 않는 직장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 발버둥 친 부모 세대의 삶조차도 그 자체로 아름다웠노라 말한다. 그렇게 먼저 자신들이 부모의 삶을 이해하려 노력한다면, 부모 또한 자신들의 삶을 이해하고 다정함으로 품어주지 않을까 하는 간절한 바람이 〈에에올〉 기저에 깔려있는 정서다. 실제로 영화가 끝나는 지점에서도 에블린은 조이에게 넌 살이 쪘고 좀처럼 연락도 안 하는 게 못마땅하며 문신도 마음에 안 든다고 말한다. 그런 말을 툭툭 내뱉는 에블린의 삶의 태도는 잘 바뀌지 않을 것이며, 감독들은 그런 에블린의 삶을 존중한다. 그 뒤에 이어지는 ‘그럼에도 난 네 곁에 있겠다’는 에블린의 말은 그러니까 ‘내 마음엔 안 들지만 그럼에도 네 삶을 이해해 보겠다’는 노력이다.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할지 모른다. 내 마음에 안 들지언정 이해하고 곁에 있어주겠다는 말.

추석이 지나가고 연휴가 끝나가도록, 나는 어머니와 함께 했던 두 번째 점심을 곱씹었다. 나를 상처 입혔던 그 모든 잔소리와 나로서는 관심도 없는 어머니의 정치 장광설이 나에게 무엇이었나를 생각했다. 이런 게 명절이라면 우리는 왜 모여서 서로를 상처 입히는 걸까?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그러라고 명절이 있는 거라고. 그 서툴고 모질고 날 선 말들이 진짜로 가리키는 게 무엇인지 깨달으라고, 할 수 있다면 그 뒤에 숨은 사랑의 언어를 찾아서 더 키워내라고. 다행히도, 나는 아직 어머니가 내게 던지는 날 선 말들을 견뎌내고 그것도 다 사랑이겠거니 하고 생각할 마음의 여유는 남아있다. 우리도 참 지겹도록 오래 싸워왔으니까, 그 뒤에 숨은 진의를 읽어낼 때도 되었지. 내가 어머니의 삶을 그 자체로 아름다웠노라고 이해한다면, 어머니도 내 삶을 조금은 더 다정하게 이해해 줄 수 있을까. 그건, 어머니와의 다음 식사에서 확인해 봐야겠다.


이승한 TV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