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설날 시즌, 같은 날 개봉한 전혀 다른 분위기의 두 영화 <남산의 부장들>과 <미스터 주: 사라진 VIP>를 모두 가로지르는 배우가 있다. 바로 이성민이다. 개봉 3주차에 430만 관객을 만난 <남산의 부장들>에서 보여준 '박통'의 불안과 폭력성을 구현하는 연기는 이성민의 저력을 다시금 증명했다. 그동안 이성민이 거쳐온 영화 속 캐릭터를 한데 모았다.

<발레 교습소>, 2004

<발레 교습소>는 2004년 충무로 영화계에 입성한 이성민이 단역으로 출연한 초기작들 중 하나다. 이성민은 영화의 주인공 민재(윤계상)와 수진(김민정)이 고3 겨울을 보내는 발레교습소를 관리하는 구민회관 공무원 '미스터 김' 역을 맡았다. 발레 강좌 강사인 정숙(도지원)과 함께 전단지를 돌리고, 수강생이 계속 줄자 정숙에게 잔소리를 한다.

<비단구두>, 2006

엄연히 따지면, 이성민의 첫 영화는 90년대 중후반 배우 겸 감독으로 명성을 떨친 여균동의 연출작 <비단구두>다. 여러 차례 일정이 밀려 2006년 6월에야 단관개봉했다. 당시 이성민이 활동했던 극단 차이무의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 영화에서 그는 주연으로 활약했다. 2006년 6월 한 사채업자가 빚에 쪼들리는 영화감독에게 치매에 걸린 아버지가 고향인 개마고원에 온 것처럼 꾸며달라고 청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그렸다. 이성민의 캐릭터 성철은 사채업자의 오른팔인 조폭으로, 감독을 감시하면서 북한군 운전사 역할을 수행한다. 북한 사람을 연기하는 걸 연기한다는 설정인 셈.

<Mr. 로빈 꼬시기>, 2006

엄정화와 다니엘 헤니 주연의 로맨틱코미디 <Mr. 로빈 꼬시기>에선 민준(엄정화)이 근무하고, 로빈(다니엘 헤니)이 CEO로 부임하는 외국계 M&A 기업의 상무를 연기했다. 회사 중역의 고압적인 태도보다는 부하 직원들을 편하게 대하고, 윗사람에겐 깍듯이 하는 '주인공 동료'의 이미지가 강하다.

<밀양>, 2007

전도연에게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의 영광을 안긴 <밀양>에선 카센터를 운영하는 종찬(송강호)의 동네친구들 중 중국집 주방장으로 나왔다. 신애(전도연)의 관심을 얻기 위해 교회 활동에 열심인 종찬에게 "진산 가가 웃통 막 이래 벗고 빤찌 딱 내려가" 기 한번 불어넣어줄걸 그랬다며 길거리에서 허리를 튕긴다. 구성진 사투리에, 개량한복에, 영락없는 경상도 아재의 모습이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2008

이성민이 몸담았던 차이무의 선배인 송강호는 처음 <밀양>에서 호흡을 맞춘 뒤 자신이 출연하는 여러 영화에 이성민을 추천했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도 그 중 하나다. 김지운 감독과의 미팅 자리에서 송강호와 친하냐는 질문에 솔직하게 그렇게 친하지는 않다고 대답해서였을까, 이성민은 대사 하나 없이 1분도 되지 않게 얼굴을 비췄다. 도원(정우성)에게 붙잡힌 태구(송강호)가 한밤 중에 도망치려다가 발각될 때 마주하는 무리들 중 하나다.

<고고 70>, 2008

그룹사운드가 청춘의 문화로 자리잡았던 70년대 중후반을 그린 영화 <고고 70>. 주연에 이름을 올린 이성민이 맡은 캐릭터 이병욱은, 잘 나가는 팝 칼럼니스트로서 상규(조승우)의 친구들이 결성한 밴드 '데블스'와 그룹사운드 문화를 물심양면 서포트 한다. 그 시대 최고의 힙스터였던 만큼, 장발과 잠자리안경 등 당시 유행했던 스타일을 두루 선보였다.

<카페 느와르>, 2009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감독 데뷔작 <카페 느와르>에선 주인공 영수(신하균)가 사랑하는 미연(문정희)의 남편을 연기했다. 딸의 생일 파티에 찾아온 음악선생 영수의 존재를 눈치챈 듯 아리송한 말들로 그를 압박하고, 아내의 얼굴에 와인을 뿌리고 이에 따지는 딸의 따귀를 때리는 냉혈한이다. 영화와 TV뿐만 아니라 연극까지 병행하던 이성민은 <카페 느와르> 특유의 문어체 대사를 가장 자연스럽게 소화했다.

<해결사>, 2010

<해결사>는 강력계 형사였지만 지금은 흥신소를 운영하는 강태식(설경구)이 급습한 불륜 현장에서 시체를 발견하고 누명을 쓸 뻔하다가 의문의 인물로부터 변호사 윤대희(이성민)를 납치하라는 지시를 받게 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단순히 피해자라 보긴 어렵다.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간신배 같은 태도의 밉상 연기를 톡톡히 해내 <해결사>의 톤을 한결 가볍게 한다.

<부당거래>, 2010

주양(류승범)의 심기를 건드리는 건 최철기(황정민)만이 아니다. 상사인 부장검사 역시 주양의 속을 뒤집어놓지만, 비리 검사인 주양을 짓누른다고 해서 좋은 인물인 건 아니다. 최철기의 뒤를 캐는 주양을 타박하는데, 실은 "좋은 게 좋은 것" 마인드로 정치인들의 눈치를 보면서 알아서 사건을 마무리하겠다는 의도다.

<내 아내의 모든 것>, 2012

세상 모든 불만을 다 짊어진 채 불을 뿜어대는 아내 정인(임수정)과 헤어지려고 바람둥이의 힘을 빌릴 정도로 노력(?)하는 두현(이선균). 이성민은 두현이 일하는 건축사무소의 이사로 특별출연 했다. 두현이 아내와 떨어져 있기 위해서 갖은 애를 쓰지만 매사에 허허실실인 나이사는 좀체 두현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변호인>, 2013

또 한번 송강호와 호흡을 맞춘 <변호인>에선 돈만 좇던 속물 변호사 송우석(송강호)에게 일침을 날리는 부산일보 사회부 기자 역을 맡았다. 언론의 자유가 가로막힌 상황에서 자신도 기자로서 소임을 다하지 못하며 괴로워 하다가 진우(임시완)의 사건을 맡으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송우석에게 묵묵히 힘이 되어준다.

<관능의 법칙>, 2013

신혜(엄정화), 미연(문소리), 해영(조민수) 40대 여성들의 사랑을 따라가는 영화 <관능의 법칙>. 이성민은 만족스러운 부부 관계를 원하는 미연의 남편 재호 역을 맡아 19금 코미디 연기를 선보인다. 매번 거사를 치르기 전에 약을 먹고 나름 최선을 다하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아서 괴로워 하는 '고개숙인' 남자를 능청스럽게 구현했다.

<방황하는 칼날>, 2013

이성민은 <베스트셀러>(2010)를 함께한 연으로 이정호 감독의 <방황하는 칼날>을 시나리오 없이 간단한 얼개만 듣고 출연을 결정했다. 잔인하게 살해당한 딸의 죽음을 파헤치다가 살인을 저지른 상현(정재영)을 추격하는 형사 억관 역이었다. 사람을 죽인 상현을 잡아야 하지만 딸을 잃은 그의 심정을 이해하기에 선뜻 나서지 못하는 딜레마가 이성민의 메마른 얼굴에 선명히 맺혔다.

<군도:민란의 시대>, 2013

이성민의 첫 사극. 군도의 평등한 질서를 관장하고 의적활동을 위한 전술을 짜는 지도자 노사장 대호를 연기했다. 카리스마와 인간미를 동시에 품은 히어로 캐릭터. 자기 몸 만한 창칼을 쓰고 말을 타는 등 액션을 소화하기 위해 두 달간 연습에 매진했다. 윤종빈 감독은 <군도> 이후 연출/제작하는 작품에 그를 꾸준히 캐스팅 하고 있다.

<빅매치>, 2014

최호 감독은 일찌감치 <고고 70>에 이성민을 주연에 기용한 데 이어 신작 <빅 매치>에 다시 한번 그를 중심 캐릭터로 캐스팅 했다. "비즈니스" 하러 갔다가 악당 에이스(신하균)에게 납치당한, 파이터 익호(이정재)의 형 역이다. 화려한 액션이 넘쳐나는 영화 속에서 망가진 얼굴을 한 채 상암 경기장, 서울역 등을 누비며 악을 쓰는 게 그의 역할.

<손님>, 2015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를 1950년대 한국과 무속신앙을 통해 재해석한 <손님>. 이성민은 처음엔 온화한 미소로 마을에 온 우룡(류승룡) 부자를 맞이하지만 마을 사람들을 철저히 통제하는 촌장을 연기해 영화의 유일한 악역으로 활약했다. 무속이 만연한 폐쇄적인 마을 특유의 광기보다 끝까지 자신의 그릇된 뜻을 굽히지 않는 강직한 태도가 두드러지는 악역이다.

<로봇, 소리>, 2015

<로봇, 소리>는 이성민이 원톱으로 영화 전반을 이끌어가는 작품이다. 스무 살 때부터 10여 년간 연극을 했던 대구에서 진행되는 영화라 더욱 뜻깊었다. 10년 전 실종된 딸(채수빈)을 찾기 위해 여전히 전국을 헤매는 해관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기억하는 로봇 '소리'를 만나 희망을 잃지 않고 딸을 찾아나서는 이야기다. 이성민은 해관뿐만 아니라 로봇 소리의 캐릭터까지 연구해 모든 걸 잃은 사내와 로봇이 나누는 우정을 설득했다.

<검사외전>, 2015

<검사외전>의 우종길은 <부당거래>의 부장검사의 나쁜 미래처럼 보인다. 권력자에게 빌붙는 걸 넘어 아예 그 권력자가 되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쓰는 냉혈한. 공교롭게도 <검사외전>에선 <부당거래>의 황정민과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구도에 놓인다. 이성민의 몇 안 되는 악역이 '절제'하는 인물이었다면 우종길은 빈번하게 분노를 드러내다가 고꾸라진다.

<보안관>, 2017

사나이픽쳐스가 제작한 <보안관>은 '아재' 냄새가 물씬한 코미디영화다. 이성민은 체중을 감량하고 몸을 만들어, 과잉 수사로 해고 당하고 고향에 돌아와 넓은 오지랖으로 마을을 지키는 자칭 보안관 대호로 출연해 영화를 이끌어나간다. 가정을 돌보는 건 뒷전, 바깥으로만 돌면서 집에서는 남자랍시고 온갖 큰소리는 다 치는 밉상인데 은근 밉지 않다.

<리얼>, 2017

희대의 괴작으로 손꼽히는 <리얼>의 캐스팅 진은 꽤나 화려하다. 이성민, 성동일, 조우진, 김홍파 등 출중한 연기력의 배우들이 김수현의 원맨쇼를 서포트 한다. 특히 이성민은 장태영(김수현)의 주치의 최진기와 더불어 1인2역을 맡아 폭넓은 캐릭터 스펙트럼을 증명했다.

<공작>, 2018

이성민의 연기는 건조한 캐릭터를 만났을 때 더욱 빛난다. 꾸준히 그에 대한 편애를 드러내온 윤종빈 감독의 최근작 <공작>은 그 지점을 정확히 관통하는 작품이다. 대북사업가로 위장한 흑금성(황정민)이 상대하는 북한 고위간부 리명운은 좀체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냉철한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흑금성과 두터운 정을 쌓는다.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듯한 위태로운 관계를 이어지는 긴장을 퍼트리고 유지하는 에너지가 혀를 내두를 정도.

<목격자>, 2018

이성민의 주연작이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건 <남산의 부장들>과 <미스터 주: 사라진 VIP>가 처음이 아니다. 2018년 텐트폴 시즌을 노린 <공작>과 <목격자>는 서로 한 주 텀으로 개봉했다. 초반부터 살인범의 얼굴을 공개하는 <목격자>는 가족의 안위를 위해 목격자가 아닌 방관자로 남기로 한 남자의 내면에 집중했다.

<마약왕>, 2018

<내부자들>로 큰 성공을 거둔 우민호 감독은 송강호를 기용한 야심작 <마약왕>에 극단 차이무 출신의 배우들을 초대했다. 송강호, 이성민, 김소진, 이희준, 이중옥, 이봉련, 최덕문 등이 모두 한 극단의 출신이었다. 이성민은 이두삼(송강호) 일당의 밀수를 눈감아주는 비리 형사로 짤막하게 등장한다. <마약왕> 이후 꼭 1년 만에, 이성민은 우민호 감독의 최신작 <남산의 부장들>에서 '박통' 역을 맡게 된다.

<비스트>, 2019

이성민과 유재명의 성장은 닮은 구석이 많다. 영화계에서 차근차근 얼굴을 알린 그들은, 큰 성공을 거둔 드라마(<미생>과 <비밀의 숲>)를 '하드캐리' 하면서 제 이름을 확실히 각인시켜, 주연급 배우로 거듭났다. <비스트>는 바로 그 두 배우의 지독한 연기 대결을 만날 수 있는 영화다. 희대의 살인마를 잡기 위해 또 다른 살인사건을 은폐한 형사의 괴물 같은 면모를 마음껏 발산했지만, 영화에 대한 관객과 평단의 반응은 싸늘했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