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블랙 오키드>로 만화계에 큰 인상을 남긴 영국 작가 닐 게이먼은 DC 코믹스 편집장 캐런 버거에게 새 시리즈의 런칭을 제안한다. 1970년대 잭 커비 등이 연재했던 실버 에이지 히어로 샌드맨을 부활시키자는 것이었다. 단 미세한 설정은 본인이 바꾸게 해달라는 것이 조건이었다. 닐 게이먼을 신뢰한 DC 편집부는 ‘이름 빼고 다른 설정들이나 스토리는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한다.
그렇게 탄생한 <샌드맨>은 1990년대를 대표하는, 가히 당대 최고 미국 만화라 할 만한 역작이었다. 1970년대 샌드맨의 리부트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만화였던 것이다. 주인공은 1980년대 고스 펑크의 영향을 받아 창백하고 마른 얼굴에 삐죽삐죽한 검은 머리를 하고 있었으며, 1970년대 샌드맨은 쫄쫄이를 입고 사이드킥 샌디와 함께 악당들과 맞서 싸웠던 반면, 1990년대의 샌드맨은 판타지 요소가 강한 몽환적이고 관념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닐 게이먼의 샌드맨은 DC 코믹스의 세 번째 샌드맨이었다. 1대 샌드맨은 이미 1939년부터 선을 보였다. 닐 게이먼의 샌드맨의 인기에 힘입어 DC 코믹스는 1대 샌드맨, 또는 골든 에이지 샌드맨을 다시 연재하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를 내게 된다. 어떻게 보면, 인기에 편승해 끼워팔기 목적으로 제작된 <샌드맨 미스터리 극장>이 1993년 막을 올린다. 이 새로운 시리즈는 단명할 기획물이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걸작이었을까?
<샌드맨 미스터리 극장>의 작가진은 맷 와그너와 가이 데이비스다. 영국 계열로 <2000 A.D.> 등에도 연재 경력이 있는 정통 SF/판타지 작가들이었는데, 사실적인 묘사가 특기였다. 전작으로는 데이빗 크로넨버그에 의해 영화화된 그래픽 노블 <폭력의 역사>가 있다. <샌드맨 미스터리 극장>은 1대 샌드맨이 활약하던 1930년대 배경을 그대로 가져오되, 현대적 감각을 가미한다. 다만 그 수준과 깊이가 남달랐다. 비유하자면 약 10년 전부터 유행하던, 경성을 배경으로 한 한국영화들이 지나친 영화적 과장으로 인해 현실감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주는 것에 반해, <샌드맨 미스터리 극장>은 그 당시의 말투까지 그대로 재현하는 등 고증 면에서 나름 신경을 쓴 작품이었고, 무엇보다 만화임에도 불구하고 지나친 만화적 과장 없이 건조한 느낌을 유지하고 있었다. 두 작가는 1930년대 누아르 영화들과 펄프 소설들, 그리고 범죄 누아르 소설들을 많이 참조했다. 내러티브엔 영화적 문법을 차용해 바로 영화화해도 될 것 같은 수준의 구성과 전개를 갖췄으며 고루하지 않고 박진감이 있었다.
주인공 웨슬리 도즈는 <배트맨>의 브루스 웨인처럼 어느 정도 부를 갖춘 30~40대 정도의 중년이다. 하지만 배트맨과는 달리 격투 능력이 없다. 샌드맨이 가진 무기 혹은 능력이라고는 본인이 조제한 수면 유도 가스총밖에 없다. 그는 집에 비밀리에 설치한 화학 실험실에서 각종 환각, 수면 유도 가스들을 조제해, 밤마다 방독면과 트렌치코트, 페도라를 걸치고 목표물에 은밀히 접근한다. 의도가 특이한데, 그는 범죄 사건이 근처에서 일어날 때 엄청난 악몽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본인의 악몽을 해결하기 위해 범죄를 해결한다는 설정은 1930년대 원작 만화에는 없던, 맷 와그너가 새로 만든 설정으로 지금 봐도 신선하다.
필자는 1996년에 만화가게에서 이 만화를 처음 접했다. 당시 학생이었던 필자가 좋아한 요소들이 모조리 담겨 있었다. 영화 <세븐> 등에서 볼 수 있던 감각적인 편집과 건조한 연출 스타일, 일본 만화풍의 정밀 묘사와 사실적인 데생, 에피소드(한 에피소드는 4개월 분량의 연재분량으로 구성된다)마다 등장하는 다채로운 악당이 매력적이었다. 특히 앞에서도 언급한 샌드맨의 악몽 시퀀스가 백미였다. 실제로 악몽을 꾸는 듯한, 매우 몽환적이면서도 창의적인 묘사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샌드맨 미스터리 극장>은 확실히 당시 즐겨보던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이나 <엑스맨>과는 차별화된 매력이 있었다.
2000년대 초반 슈퍼히어로 영화들이 흥행하기 전, <L.A. 컨피덴셜> 등의 네오 누아르가 흥행하는 것을 보면서 <샌드맨 미스터리 극장>의 영화화도 꽤 현실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시리즈는 닐 게이먼의 <샌드맨>이 전설적인 위치에 오른 것과는 반대로, 많은 대중의 지지를 얻지는 못했는지 단행본 발매도 2000년대 중반부터 중단된 상태이고 필자가 염원한 영화화 계획도 없어 아쉽다.
최원서 / 그래픽노블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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