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관심을 갖고 마시기 시작한 지 벌써 10년이 넘은 것 같다. 모든 기호식품이 그렇듯이 술에도 엄연히 중독성이 있다. 

그래서 집에서 술을 마실 때는 밥을 완전히 먹고 난 후 안주 없이 마시고 하루에 한잔 이상은 마시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바에서보다 집에서 술을 더 까다롭게 고르는 편이다. 술은 그대로지만 내 입맛이 그날그날 바뀌기 때문이다.

힘든 하루를 마치고 집에 와서 살림살이를 마치고 온전히 혼자가 된 시간에 잔에 따른 술을 조금 입에 머금은 뒤 ‘아, 오늘은 다른 거였는데...’라는 생각이 들면 기분이 그다지 좋지는 않다. 굳이 비교하자면 김광석 형님의 말씀처럼 중국집에서 짜장을 한입 먹고 나서 ‘아, 오늘은 짬뽕이었는데...’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그래도 세월이 세월이다 보니 뭘 마시면 좋을지 도대체 모르겠는 날에도 어느 정도 그날의 내 입맛을 파악하는 꼼수는 갖게 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자주 듣는 음반 중 그날 듣고 싶은 음악과 술을 매칭시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운 나만의 방법일 텐데 예컨대 메탈리카의 'Moth into flame'이 듣고 싶은 날에는 와일드터키 101을 마시고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를 들을 때에는 좀 부드럽고 달달한 발블레어를 마시는 식이다. 그랜트 그린의 발라드 앨범에는 잭 다니엘 시나트라 셀렉트가 딱일 것 같고.

Jack Daniel Sinatra Select. Bar Code

최근엔 얼마 전 발매된 유러피안 재즈 트리오의 <서촌> LP를 자주 듣는 편이다. 국내의 가요 명곡들을 유러피안 재즈 트리오가 듣기 편한 스타일의 재즈로 편곡해 녹음한 LP다. 

들을 때마다 ‘아 이건 글렌드로낙이 딱이로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멜로디를 흥얼거리곤 하는데 그러다가 며칠 전 퍼뜩 들은 생각, 

아! <킹스맨: 골든 서클> 마지막 부분의 스카치위스키, 그거 글렌드로낙 아니었나???

Old Forester 'Statesman'과 Glendronach 'Kingsman'

술을 워낙에 좋아하다 보니 어느 매체에서건 술이 나오면 집중도가 세배 상승하는 편인데 이건 뭐 붉은 혜성도 아니고  최근 소위 ‘유명한’ 콘텐츠 중 이 정도로 술이 많이 나온 영화가 없었던 것 같다. 당장 스테이츠먼의 첩보원 이름들도 데킬라에 위스키고 야외 파티 장면에 비행기 안에서 마티니를 마시는 장면까지, 모든 장면 하나하나가 술을 부르고 그 술들이 스토리를 이끌어간다.

전편에서 마티니가 스토리를 이끌었듯, 이번 <킹스맨: 골든 서클>에서는 위스키라 불리는 술들 중 양대 산맥이라고 해도 될 스카치와 버번이 스토리를 이끌어 가는데 화면에 많이 비친 스테이츠먼 버번은 올드 포레스터(Old Forester)라는 증류소에서 만들었고,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킹스맨 스카치는 글렌드로낙(Glendronach)이라는 증류소에서 만든다. 두 증류소가 무슨 관계가 있길래 이렇게 같이 등장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실 분도 있을 것 같은데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증류소의 소유 관계라는 게 꽤나 복잡한 편이긴 하지만(글렌드로낙은 벤리악 증류소 소유, 그런데 벤리악은 브라운 포 맨 소유) 결론적으로 두 증류소 모두 브라운 포 맨이라는 거대 주류 자본 소유다.

James Allardice라는 사람이 1826년에 증류소를 세우고 ‘Guid GlenDronach’이라는 싱글몰트 위스키를 만든 것이 글렌드로낙 증류소의 첫걸음이었고 이후 1860년대 즈음에는 이미 하이랜드 지역에서 가장 많은 세금을 내는 증류소로 성장했다. 이후 소유권이 여러 차례 바뀌다 1996년에 일시적으로 생산을 중단한 후 2002년에 다시 생산을 재개했다.

스카치 위스키 증류소 치고도 정규품 라인업 이외에 다양한 형태의 특별판을 출시하는 편이지만 거의 대부분 쉐리 캐스크 피니시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스카치위스키는 대개 미국의 버번 위스키나 스페인 쉐리 와인을 숙성했던 캐스크(나무통)를 수입해서 그 통에 숙성시키는데 버번 통에 숙성시킨 위스키는 대개 달달한 바닐라 향을 내고 쉐리 통에 숙성시킨 위스키는 약간 꾸덕꾸덕하고 묵직한 향을 낸다. 쉐리로 유명한 증류소는 누가 뭐래도 맥캘런이겠지만 최근 스페인 쉐리통이 품귀현상을 빚으면서 맥캘런도 최근 적극적으로 버번 통을 도입하기 시작했는데 글렌드로낙은 아직 쉐리 위주의 라인업을 고수하고 있다.

예전 맥캘런보다도 쉐리 느낌이 강한 위스키를 주로 생산해 ‘쉐리 몬스터’라 불리기도 하는데 최근 10여년간 인기가 확 올라가면서 다른 위스키보다도 훨씬 더 가격이 수직 상승했다. 정규품도 괜찮지만 싱글 캐스크 형태로 출시되는, 특히나 고숙성 라인을 맛볼 기회가 있다면 꼭 맛보시길 추천드린다. 쉐리 고숙성의 표본이라 봐도 될 정도의 훌륭하고 모범적인 맛이다.

Glendronach Single Cask Series 'Whisky Live Tokyo 2015 Edition'

글렌드로낙이 영화 속에서 킹스맨을 대표하는 위스키로 선정된 건 브라운 포 맨 소유라는 현실적인 이유가 가장 컸겠지만, 맛을 본 사람이라면 맛으로도 킹스맨, 특히 해리의 이미지와 딱이라고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해리의 절도 있고 무게 있는 이미지에 정말 잘 어울리는 위스키다. 

해리 하트, 그리고 위스키

글 서두에 <서촌> LP를 들을 때마다 글렌드로낙이 생각난다고 언급했는데 그건 아마 이런 이유에서일 것 같다. 이 LP를 녹음하고 제작한 오디오가이 스튜디오와 스테레오마인드 사는 편집증적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음반의 음질과 퀄리티에 집착하는 회사다. 수년 전 오디오가이에서 제작한 이광조의 LP를 처음 들었을 때의 놀라움이 아직도 기억난다. ‘이게 진짜 LP소리야?’ 하고 몇 번을 확인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 회사가 보다 많은 대중을 위해 우리의 가요 명곡을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티스트 유러피안 재즈 트리오를 초청해 재즈로 만들었다. 그야말로 글렌드로낙 그 자체다. 스코틀랜드의 증류소 중 가장 마지막까지 석탄을 사용한 증류 방식을 고집했던 증류소이자(2017년 현재는 일본의 요이치 증류소가 유일하게 석탄을 사용한 증류를 하고 있다) 구하기 힘들고 가격도 비싼 쉐리 통 숙성을 고집하는 증류소, 하지만 다양한 대중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재고 관리도 판매도 번거로운 다종다양한 특별판을 생산해내는 증류소. 생각해보니 비슷하다고 느꼈던 것이 당연했다.

킹스맨과 스테이츠먼이 힘을 합쳐 악당을 물리쳤듯, 스카치건 버번이건 사람의 시름을 덜어준다는 면에 있어서는 같을 것이다. 과음만 안 하면 될 일이다. 그래서 오늘도 오래된 싸구려 턴테이블 위에 LP를 얹는다.

European Jazz Trio의 ‘서촌’ LP

오늘은 특별히, 두 잔을 마셔야겠다. 글렌드로낙과 올드 포레스터를 ^^

킹스맨: 골든 서클

감독 매튜 본

출연 태런 에저튼, 줄리안 무어, 콜린 퍼스

개봉 2017 영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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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렉 / 술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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