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뉴욕 링컨센터는 지난 2년간 칠레의 대표적인 감독 라울 루이즈에 관한 회고전을 기획했다. 라울 루이즈(1941~2011)는 많은 비평가들에 의해 영화 역사상 가장 중요한 영화감독 중 하나로 거론되지만 여전히 그 실체가 드러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는 1960년대 칠레에서의 초기 작업부터 프랑스, 포르투갈을 경유하며 들고남이 극심했던 작가 이력이나 120여 편에 이르는 다작의 작가라는 사정과도 관련이 있다. 제19회 전주국제영화제의 스페셜 포커스 섹션으로 기획된 ‘되찾은 라울 루이즈의 시간’은 루이즈의 방대한 영화 궤적을 그리는데 있어 유익한 방향타가 될 수 있다.

라울 루이즈는 현대영화의 수수께끼다. 상업적인 지향성이 강한 동시대 영화와 거리가 있는 루이즈는 시류에 휘둘리지 않는 독창적인 작가처럼 보이고, 초현실주의와 마술적 리얼리즘, 대중문화의 아이콘, 네오 바로크, 가상공간의 매핑 등 다양한 문화적 맥락의 교차를 통해 불가능한 것들을 조합해낸다. 이를테면, 그의 공식적 장편 데뷔작으로 알려진 <세 마리의 슬픈 호랑이>(1968)는 루이즈가 “이야기의 역전”으로 묘사한, 산티아고의 중산층 공동체에 속한 한 인물에 대한 탐구다. 황량하고 우스꽝스러운 이 영화는 1973년 피노체트 쿠데타로 칠레를 떠나 파리에 정착한 루이즈와 그의 부인이자 영화적 동지였던 발레리아 사르미엔토의 불안한 상황을 미묘하게 암시한다. ‘되찾은 라울 루이즈의 시간’에서는 루이즈 자신의 행보에 대한 전망이자 칠레 역사의 어둠을 예고하는 <세 마리의 슬픈 호랑이>를 비롯한 11편의 작품을 모았다.

듀크 대학교에서 진행한 강연을 바탕으로 저술한 책 <영화의 시학>(Poetics of Cinema)에서 루이즈는 오디오 비주얼 이미지의 작동을 주관하는 무의식, 이미지의 상호오염, 복제예술의 운명, 예술적 관행과 기관 간의 관계 등 시청각 문명을 둘러싼 주제에 관한 철학을 풀어놓았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제시한 극적인 이론에서 파생한 내레이션의 통치 코드를 가볍게 비판하면서 신학, 철학, 문학 및 시각 예술을 아우르는 새로운 상상력을 제안한다. 이미지에 대한 글쓰기 및 사고의 갱신을 요구해 온 루이즈의 경력에서 가장 분명한 휴지기는 1973년까지 살바토르 아옌데 휘하에서 생산된 칠레 시절 작품과 프랑스 체류기 이후 제작된 작품 사이의 간극이다. 프랑스로 건너간 후 루이즈의 이름은 ‘Ra l’이 아닌 ‘Raoul’로 불렸다. 그러나 두 시기는 작가의 명백한 변화를 증거하지 않는다. 실제로 후기 미학과 전략을 칠레에서 이미 볼 수 있으며 그 반대로 프랑스에서 제작한 많은 영화는 라틴의 정치적 상황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정치적 차원을 가지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칠레 시기가 집단적인 제작의 관행을 따른 반면 이후 영화들은 이산자(離散子)의 상대적 거리와 고립감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두 기간 사이의 단절을 명확히 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라울 루이즈에게 있어 이 시기는 더욱 실험적인 작품들을 만들던 1980년대와는 분명하고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를테면 칠레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연출한 <흰 비둘기>(1973)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변주로, 아옌데에서 피노체트로 이행하는 정치적 혼란기의 불안을 좌, 우익 청년의 로맨스로 치환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루이즈의 작업을 다양한 작업방식과 스타일 전략에 따라 여러 단계로 구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회고전 ‘되찾은 라울 루이즈의 시간’을 통해 우리는 여러 다른 시대의 루이즈의 행적을 여행하게 된다. 영화화가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창조적으로 번안한 <되찾은 시간>(1999)에서 루이즈가 보여준 역동적이고 다채로운 패턴처럼 방대한 시간을 극적으로 압축한다. <추방자들의 대화>(1974)는 자신이 속한 유배지 공동체의 제스처를 흥미롭게 그렸다. 피에르 클로소프스키의 소설에 기초한 영화 <유예된 소명>(1978)에서 아옌데 정부의 붕괴와 피노체트 쿠데타의 잔인함에 패배한 칠레의 상황은 카톨릭 교회에서 일어난 신학의 분쟁으로 비유된다.

프랑스 시기를 대표하는 <가상의 기억>(1986)은 반체제 인사로 칠레에서 추방된 남자의 기억을 따라가면서 기억의 예술로 영화를 변형시킨다. 칠레의 요소를 사용하지 않고 칠레에서 일어난 일에 관한 영화를 만들기 위해 루이즈는 르네상스와 고딕 양식, 주술, 유머를 자유롭게 활용한다. 6시간에 육박하는 TV시리즈로도 제작된(회고전에서는 6부로 만들어진 TV 버전을 상영한다) <리스본의 미스터리 TV판>(2010)는 19세기 중반 리스본과 파리, 이탈리아, 브라질을 떠도는 사람들을 수수께끼처럼 엮는다. 에피소드가 바뀌면서 다른 인물들에게 서술의 통제권이 넘어가고 각각의 스토리는 상호 영향을 미친다. 캐릭터의 다중 정체성을 암시하는 음악의 라이트모티프, 무관심한 카메라로 그려지는 캐릭터, 장면과 장면 사이의 대화, 그리고 루이즈의 전매특허라 할 경탄할만한 광학 효과가 절창을 이룬다. 물론 구불구불한 미로를 걷는 것 같은 이 경험은 인물의 흐름도와 복잡하게 변화하는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회고전에서 소개되는 또 다른 TV 시리즈는 <길 잃은 드라마>(2017)다. 칠레에 돌아온 루이즈가 처음으로 연출한 이 영화는 1990년 제작되었으나 2017년 발레리 사르미엔토에 의해 완성되었다. 이 작품은 7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었고, TV 통속극의 클리셰를 활용하여 1990년대 이후 칠레의 상황을 풍자한다. <길 잃은 드라마>는 전형적인 '텔레노벨라'(연속극)의 방식으로 17년간의 독재가 남긴 후과를 조망한다. 몽환적인 음색을 지닌 대다수의 인물들이 몽유병에 걸린 듯 움직이는 영화는 잔인한 칠레의 운명에 관한 독특한 환유법을 구사한다. 2017년 로카르노국제영화제에서 처음으로 상영된 <길 잃은 드라마>는 여러모로 루이즈의 추종자들에게는 선물이라 할 만하다. <두 갈래로 갈라지는 한밤중의 거리>(2012)의 속편으로 볼 수 있는 이 영화는 칠레의 뿌리와 추억에 대한 마지막 회고록이기도 하다. 다음 이야기에 대한 기대를 남기는 TV 드라마처럼 라울 루이즈의 세계에서는 어떤 이야기도 끝나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끊임없이 구불거리는 이야기처럼, 이제 우리도 라울 루이즈의 시간을 찾을 때가 되었다.

길 잃은 드라마

감독 라울 루이즈, 발레리아 사미엔토

출연 루이스 알라르콘

개봉 2017 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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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비둘기

감독 라울 루이즈

출연

개봉 1973 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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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마리의 슬픈 호랑이

감독 라울 루이즈

출연 루이스 알라르콘

개봉 1968 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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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의 미스터리

감독 라울 루이즈

출연 레아 세이두, 멜빌 푸포

개봉 2010 포르투갈, 프랑스, 브라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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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원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씨네21> 전주국제영화제 공식 데일리 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