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괄구매'당한 영국
<남아 있는 나날> 이야기를 좀더 해보자.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에서 저택을 산 사람은 미국인 패러데이였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달링턴 경의 저택을 사들인 사람은 루이스다. 1936년의 그 비밀 회담에 참석해 달링턴 경을 점잖게 조롱하던 예의 그 미국 하원의원 말이다. 회담 말미 그는 ‘신사정신’에 따라 독일의 안정화(실은 재무장)를 도우려는 달링턴 등의 신사들을 ‘고결한 아마추어’라 비판하고, 이제 현실 세계는 ‘프로’들이 지배하게 될 것이란 취지로 딴지를 걸었던 적이 있다. 이 장면은 ‘스티븐스’가 연회장에서 시중을 들며 유일하게 감정의 동요를 겪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는 끝내 화를 감추지만, ‘당신이 프로라고 말하는 그것은 실은 탐욕 아니오’라는 달링턴의 답을 듣기 전까지 자리를 뜨지 않는다. 위층에서는 아버지가 방금 죽었는데도 말이다.
달링턴 사후 헐릴 뻔한 저택을 바로 그 루이스가 구입한다. 경매장에서 ‘신사도’란 제목의 엘리자베스 시대 그림도 사들이고, 집사 스티븐스도 재고용한다(이시구로는 소설 속에서 이를 매정하게도 ‘일괄구매’라고 표현한다). 자신이 가장 싫어했던 미국인을 이제 주인으로 모셔야 하는 스티븐스의 처지는 참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그런 아이러니보다 더 강조되어야 할 것은 ‘저택’의 상징성이다. 1980년대 이후 영국 헤리티지 영화들 속에서 저택은 항상 ‘지난 시절 영국의 영광’에 대한 향수의 매개체이자 복원되어야 할 ‘위대한 영국’의 상징이었다(아이보리 감독이 이 분야의 전문가였다). 그런 저택을(일급의 집사인 스티븐스와 함께) 루이스가 사들였고, 그 벽에는 거액을 주고 구매한 ‘신사도’를 걸었다. 신사도(영국의 정신)도 저택(영국의 영광)도 이제 미국인 루이스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캐스팅이다. 루이스 역을 맡은 이는 ‘크리스토퍼 리브’, 그 유명한 미국산 슈퍼 히어로 ‘슈퍼맨’으로 유명해진 바로 그 배우다. 어떤 강렬한 캐릭터는 이후의 캐릭터에 의해 완전히 덮어쓰기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를 아이보리가 아니다. 가령 송강호는 어떤 캐릭터를 연기해도 <초록 물고기> 시절의 송강호와 겹쳐지기 마련이고, ‘로다주’는 어떤 캐릭터를 연기해도 <아이언 맨>과 겹쳐지기 마련이다. 심지어 초인이었으니, 크리스토퍼 리브는 어떤 역을 해도 슈퍼맨을 데리고 다닐 수밖에 없다. 그런 그에게 아이보리 감독이 루이스 역을 맡겼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영국을 일괄구매하게 했다.
그것은 미국식 자본주의(모든 견고한 가치들을 녹아내리게 만드는)가 ‘영국적인 것’을 잠식해 가는 사태에 대한 위기감의 소산이었을까? 아니면 무엇이든 사고파는 장사치 미국인(영화에서는 영국의 귀족들이 그를 장사치라 비아냥거리며 키득거리는 장면이 한 번 등장한다)에 대한 냉소였을까? 아니면 격식 없고 유머러스한 미국식 문화가 답답한 저택으로부터 비둘기 한 마리(마치 고대 비극의 ‘기계장치 신’처럼 단박에 영화를 마무리지어주던)라도 날려주기를 바라는 기대감이었을까?
그 이유야 어찌되었건,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흘러 이제 2016년, 슈퍼맨에 의해 일괄구매당한 영국은 어찌되었나? 스티븐스와는 사뭇 다른 한 노인이 지금의 영국을 증언한다. 그는 ‘다니엘 블레이크’다.
댄!
나는 그를 케이티가 그랬듯 애칭인 ‘댄’으로 부를 셈이다. 그러지 않을 도리가 없는데, 그것은 그가 오래 같이 보고 지낸 친구 같고, 마르크스만큼 존경스럽고, 죽기 전의 내 아버지처럼 안쓰럽고, 비오는 날 폐지를 줍는 등 굽은 할머니처럼 불쌍하고, 바위를 향해 돌진한 달걀처럼 자랑스럽고, …… 기타 등등의 이유 때문이다.
40년을 목수로 살아 못 만드는 것이 없는 댄, 바닷바람에 기대 여행하는 게 꿈이었던 미친 아내를 위해 물고기 모빌을 만들었고, 몸이라도 팔지 않고서는 두 아이들을 돌볼 여지라곤 없는 케이티를 위해 책상을 만든 댄…… 전기가 끊겨 추위에 떠는 데이지와 딜런을 위해 순식간에 뚝딱뚝딱 촛불 난로를 만들어주고, 다 팔아도 손때 묻은 공구는 팔지 않던 장인(사실 이런 이들이 ‘프로’다) 댄…… 인터넷을 몰라 죽은 댄, 서류를 작성할 줄 몰라 죽은 댄, 이력서 파일을 만들 수 없어 죽은 댄,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도 아프지 않다는 사실도 증명할 수 없어 죽은 댄……,
그러나 어떤 순간에도 고집스럽게 자존감을 잃지 않던 댄…… 실은 나는 그가 이렇게 말할 때 그를 존경하는 친구로 여기기로 작정했다.
앤 : 이해가 안 되네요. 구직 활동을 안 하신 건가요?
댄 : 웃기는 노릇 아니오? 당신처럼 친절한 사람이 그런 이름표나 달고 앉아 잡지도 못할 일자리를 헛되이 찾아다니는 환자나 상대해야 하다니. 내 시간, 고용주 시간, 그쪽 시간 낭비해봐야 나한테 돌아오는 건 수치심뿐이잖소. 그냥 내 이름은 명단에서 빼주시오. 이제 그만하리다. 난 할 만큼 했소.
앤 : 잘못했다가는 모든 걸 잃을 수도 있어요. 제발 이러지 마세요. 전에도 봤어요. 착하고 정직한 사람들이 거리에 나앉더군요.
댄 : 고맙소만 앤.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은 거요.
질병 수당 VS 구직 수당
그의 곤란을 짐작케 하는 상담 대화로부터 영화는 시작한다.
댄 : 심장에선 점점 멀어지는군.
아만다 : 그럼 계속해서 질문 드릴게요. 혹시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으신 적 있나요?
댄 : 심장 얘기를 하자는데 안 통하는 지금이 그렇소.
아만다 : 블레이크 씨 계속 이렇게 나오시면 자격 심사에 득 될 게 없어요, 질문에만 대답해주세요.
댄 : 알겠소
아만다 : 감사해요. (서류 넘기는 소리) 배변 장애가 생길 정도로 통제력을 상실하신 적이 있나요?
댄 : 이렇게 답답해서야 곧 그렇게 될 거 같소.
아만다는 고용 연금부 파견 직원이다. 정확히는 ‘고용 연금부가 (아마도) 입찰에 의해 선정한 미국 업체에서, 고용지원수당 대상자 심사를 위해 파견한, 의료 전문가’이다. 의사도 간호사도 아니니 그 전문성의 정체를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전문가니까 프로정신(푸코는 이렇게 미국에서 탄생한 신인류를 ‘호모 이코노미쿠스’라고 부른 적이 있다)으로 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스스로를 의료 전문가라고 칭하는 저 직원에게 댄의 아픈 심장은 관심사가 아니다. 그렇다고 다른 신체 부위의 건강이 관심사인 것도 아니다. 팔을 올릴 수 있는지, 모자를 쓰거나 전화를 받을 수 있는지, 말하자면 이 자가 일할 수 있는 자인지 아닌지가 그녀의 유일한 관심사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매뉴얼화된 질문지를 다 채우는 것, 그리고 댄에게 질병 수당을 줄 것인지 말 것인지를 점수화해 보고하는 것이 그녀의 업무다. 결국 댄은 12점짜리……, 15점짜리 중증은 되어야 질병 수당을 받는데 말이다.
항고하려는 댄, 그러나 항고하려면 시간이 걸리고 그 전에 질병 수당은 틀렸으니 구직 수당이라도 받아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인터넷이다.
상담원 : 일할 여건이 된다면 구직 수당 청구하시고 환자시면 질병 수당 신청 창구에서 자격 심사를 받으세요.
댄 : 그 심사 받았다가 떨어졌소.
상담원 : 그럼 고용 대상자니까 구직 수당을 타시거나 탈락 판정에 항고하세요.
댄 : 구직 수당 신청과 항고 신청 양식을 지금 받아 볼 수 있겠소?
상담원 : 인터넷 신청입니다.
댄 : 못 할 거 같은데.
상담원 : 전화 도우미 이용하세요.
댄 : 차라리 집을 한 채 지으라 하시오. 컴퓨터는 근처도 안 가 봤소.
상담원 : 디지털 시대잖아요.
댄 : 또 그 소리! 전화에서도 디지털 타령이더군. 난 연필 시대 사람이오. 그런 사람들 배려는 안 하나?
상담원 : 난독증 대상 특별 상담 번호는 있어요.
댄 : 몇 번이오? 난 컴퓨터 난독증인데.
상담원 : 인터넷에 나와요. 예약 없이 오셨으면 이만 가 주세요.
댄 : 환장할 노릇이군.
짧지 않은 저 대화(엄밀하게는 대화라고 볼 수 없다. 상담원의 목소리는 녹음된 것이나 진배없을 만큼 기계적 절차밖에 모르므로)를 요약해보면 이렇다. ‘인터넷에서 신청하세요, 못 하시겠으면 난독증 상담을 받으세요. 번호는 인터넷에 있어요’.
아, 이 복지 권력(푸코라면 ‘생명권력’이라 불렀을 테지만)을 어떻게 납득시킬 수 있을까? 영화를 보는 내내 멀쩡한 사람의 심장도 협심증에 걸리게 만들 것 같은 저 가장 비효율적으로 효율적이고, 가장 비인간적으로 인간적인(복지!) ‘민영화’(신자유주의의 꿈!)된 공적 서비스 시스템을 말이다. 어쩌면 댄은 답답해서 죽었는지도 모르겠다.
살릴 수 있으나 죽게 내버려 두는
푸코와 아감벤은 20세기에 권력의 지배소가 된 ‘생명권력’을 종종 “살게 하거나 죽게 내버려 두는” 권력으로 정의한다. 따라서 케이티가 댄의 장례식장에서 이렇게 말할 때, 그 말은 반드시 늙고 고집 센 마르크스주의자 켄 로치의 과장된 정부 비판 의도를 반영한 것만은 아니다. “이웃과 많은 것을 나눈 이 훌륭한 사람을 정부가 너무 빨리 죽음으로 이끌었죠.”
댄이 펄쩍 뛰며 화내던 장면이 있다. 인터넷 신청을 도와준 옆집 청년 차이나 덕에(그 덕에 우리 또한 한 켤레의 운동화 값 속에 얼마나 많은 제3세계 노동자들의 비지불분 노동력이 포함되어 있는지를 알게 된다. 그리고 프리미어리그가 얼마나 미친 돈놀음인지도!), 질병 수당 항고 신청서를 출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다.
차이나 : 구직 수당 신청됐어요. 근데 심장병 환자가 이게 왜 필요해요? 질병 수당 항고 신청서도 지금 인쇄 중이에요. 하지만 재심사 전에는 항고할 수가 없다네요.
댄 : 인쇄된다고? 그놈들도 뽑아 줄 수 있었단 얘기잖아.
차이나 : 앞으로도 아저씨를 물 먹일걸요. 바닥 치게 하는 게 놈들 작전이요. 우연이란 건 없어요. 수당 포기자도 많아요.
댄 : 놈들이 잘못 짚었어. 난 포기 안 해. 개처럼 물고 늘어져주지.
그러니까 저 민영화된 신자유주의 공적 서비스 시스템은 댄을 살릴 수 있었다. 그것도 간단하게…… 신청서 몇 장만 출력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 하나의 인격체이자 주체로서의 ‘그, 다니엘 블레이크’는 그들의 서류에 없었기 때문이다. 고유한 한 인간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개인들을 생물학적 수준으로 환원시켜 ‘인구’로 셈하는 것이 또한 생명권력의 통치 기술이다. 다니엘 블레이크는 이 권력에게 그저 실업률과 질병인구 비율, 그리고 그들에게 소용될 예산의 효율성에 관여하는 하나의 숫자 이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를 살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죽게 내버려 두었다.
댄이, 왜 그토록 ‘나’에 집착했는지 우리는 이제 알 수 있을 듯도 하다. 그는 바로 그 민영화된 생명권력의 담벼락에 이렇게 낙서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굶어 죽기 전에 항고일 배정을 요구한다. 상담 전화의 구린 대기음도 바꿔라.” 그러나 그는 정작 항고가 성사된 당일, 화장실에서 비참하게 숨을 거둔다.
숫자 아닌 '나', 다니엘 블레이크
장례식장에서 케이티가 대신 읽은 댄의 메모에는 이런 말들이 적혀 있었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아닙니다. 나는 보험 번호 숫자도 화면 속 점도 아닙니다. 난 묵묵히 책임을 다해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난 굽실대지 않았고 이웃이 어려우면 그들을 도왔습니다. 자선을 구걸하거나 기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명문은 아니다. 그는 컴퓨터도 못 다루는 늙은 목수였으니까. 그러나 이제 영화를 본 우리들은 저 문장들이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를 안다. 그리고 미국산 영웅 슈퍼맨이 일괄구매한 지 수십 년이 지난 영국의 생명권력에 대해 다니엘 블레이크가 얼마나 담담하고 고결하게 저항했는지도 안다.
저자 | 김형중
1968년 광주에서 태어나 전남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0년 문학동네신인상 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평론집 《켄타우로스의 비평》 《변장한 유토피아》 《단 한 권의 책》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후르비네크의 혀》 등과 에세이 《평론가 K는 광주에서만 살았다》가 있으며, 소천비평문학상(2008), 팔봉비평문학상(2017)을 수상했다. 현재 조선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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