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언 존슨

그렇게 무너질 사람이 아니긴 했다. 그래도 이렇게 빨리 자신의 능력을 만천하에 알릴 줄은 아무도 몰랐다. 라이언 존슨은 <나이브스 아웃>이란 신작으로 찾아왔다. 2017년, 대망의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로 팬덤에게 욕 한 바가지를 먹은 이후 첫 작품이었다.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했지만, 라이언 존슨에 대한 불신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해내고 말았다. <나이브스 아웃>은 로튼 토마토 지수 97%(8.32점), 메타크리틱 82점을 기록했다.


8년을 기다린 데뷔 <브릭>

<브릭>

라이언 존슨은 2005년 <브릭>을 발표하며 연출로 데뷔했다. 이전에도 단편 영화를 연출하거나, 영화 <메이>의 편집으로 영화계에서 활동했지만, <브릭>이 선댄스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할 때 비로소 그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다. 사실 라이언 존슨은 훨씬 더 빨리 데뷔할 수 있었다. <브릭>의 시나리오는 1997년 완료됐기 때문. 하지만 제작비 투자를 받는 게 녹록지 않아 8년 후에야 영화를 완성할 수 있었다.

<브릭>(왼쪽)의 라이언 존슨과 조셉 고든 레빗은 7년 후 <루퍼>에서 재회한다.

<브릭>은 라이언 존슨의 장기와 취향이 모두 담겼다. 평소 미스터리 소설을 탐닉하던 그는 <말타의 매> 저자로 유명한 대실 해미트 스타일의 소설을 한 편 썼다. 그 소설을 시나리오로 옮기고 스파게티 웨스턴풍의 분위기와 <카우보이 비밥> 스파이크 스타일의 주인공을 결합시켜 <브릭>을 만들었다. 미스터리 장르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변칙적으로 전개한 이야기는 이야기꾼 라이언 존슨의 차기작을 기대케 했다.


꾸준한 활동, 드라마로 세운 대기록

<블룸 형제 사기단>

<루퍼>

라이언 존슨은 직접 집필한 시나리오를 연출하는 감독이라 차기작까지 공백이 긴 편이다. <브릭> 이후 <블룸 형제 사기단>이 나오기까지 3년, <루퍼>를 완성할 때까지 4년이 걸렸다. 그렇게 오래 공들여 나온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호평을 받았다. 그의 작품 중 가장 미적지근한 평가를 받은 <블룸 형제 사기단>도 보는 재미는 충분했고, <루퍼>는 구태의연한 SF 소재 시간 여행을 흥미롭게 풀었다는 호평을 받았다.

<브레이킹 배드> 에피소드 연출 중인 라이언 존슨 (가운데 위)

와중 라이언 존슨은 드라마 <브레이킹 배드> 연출에 참여하며 대기록까지 세운다. 그는 시즌 5로 완결한 <브래이킹 배드> 중 시즌 3 10화 ‘플라이’, 시즌 5 4화 ‘피프티 원’, 14화 ‘오지맨디아스’에서 연출 메가폰을 잡았다. 그리고 이 세 에피소드는 <브레이킹 배드> 베스트로 손꼽히는 희대의 에피소드로 기록됐다. IMDb 평점을 보면 ‘플라이’는 7.8점, ‘피프티 원’은 8.9점을 받았다. 그리고 ‘오지맨디아스’은 <브레이킹 배드> 에피소드 중 10만 명이란 역대 최다 투표인에도 10점 만점에 10점을, 연예전문 매체 ‘벌쳐’ 선정 <브레이킹 배드> 최고의 에피소드 1위를 차지했다.


시리즈 파괴 논란에도 차세대 리더로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

그럼에도 그의 명성은 이 영화에서 정점을 찍었다.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 디즈니가 루카스 필름을 인수해 제작에 착수한 <스타워즈> 시퀄 3부작은 J.J. 에이브람스가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로 출발선을 끊었다. J.J. 에이브람스가 3부작 전체를 연출할 거란 예상과 달리, 루카스 필름은 곧바로 라이언 존슨이 속편의 각본과 연출을 맡을 것을 천명했다.

팬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가 지나치게 자기복제라고 느낀 관객들은 라이언 존슨이 이전 작품들처럼 신선한 비틀기를 보여줄 것이라 기대했다. 반면 라이언 존슨의 커리어가 J.J. 에이브람스보다 떨어지는 편이라 불안하다는 팬들도 적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스타워즈> 신작과 시리즈의 새로운 감독 라이언 존슨에게 쏟아지는 관심은 여느 때보다 높았다.

(왼쪽부터)<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 라이언 존슨 감독, 존 보예가, 오스카 아이작.

결과는? <스타워즈> 역사상 최고의 호불호가 갈리는, 심지어는 관객들이 팬덤 이탈을 선언하고 마는 문제작이 등장했다. 라이언 존슨의 기존 작품처럼 클리셰를 영리하게 활용한 부분도 있었으나, <스타워즈>라는 시리즈의 전통마저 무너뜨리는 과격함이 문제였다. <스타워즈 에피소드 5 - 제국의 역습>(이하 <제국의 역습>)과 대구를 이루는 ‘실패담’이란 접근은 좋았으나 캐릭터를 제대로 묘사하지 않은 채 메시지를 앞장세운 장면들은 관객들을 경악게 했다.

사실 영화만 나빴다면 다행이었을지 모른다. 화난 팬덤과 라이언 존슨의 소셜미디어 설전이 더 문제였다. 팬덤은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는 <제국의 역습>과 비견될 것”이라는 감독의 발언에 동의하지 못했다. 그들은 <스타워즈>의 전통을 깡그리 무시한 라이언 존슨의 연출에 실망감을 느꼈고, 감독의 트위터에 찾아가 수많은 글을 남겼다. 라이언 존슨 또한 이에 지지 않고 “몇몇 팬보이들이 악의적으로 영화를 비판”한다며 “그들이야말로 프랜차이즈를 망치고 있다”고 반박했다. 결국 이 소셜미디어 설전은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에 실망한 기존 팬덤이나, 라이언 존슨의 새로운 감각에 열광한 팬들이나 그야말로 정이 뚝 떨어지는 아수라장이 됐다.

(왼쪽부터) 램 버그만 프로듀서, 라이언 존슨 감독, 캐슬린 케네디.

이런 혼란 속에서 루카스필름의 수장 캐슬린 케네디는 라이언 존슨을 <스타워즈: 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 이후 새로 시작할 트릴로지의 담당자로 임명했다.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는 전 세계 13억 달러 수익으로 흥행에 성공했고, 평단이 호평을 내린 결과였다. 더 이상 <스타워즈>는 없다는 극렬한 팬덤의 반대에도, 차세대 <스타워즈>는 지금까지와 달라질 것이란 선언과도 같았다. 팬들에게 그나마 다행인 건 <스타워즈: 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가 라이언 존슨의 손에서 떠났다는 정도였다.


“화난 팬들에게 영감받은” <나이브스 아웃>

<나이브스 아웃>

전화위복. <나이브스 아웃>이 나온 경위를 보면 그 말이 딱 맞다. 라이언 존슨은 다시 자신의 주특기 미스터리 장르의 시나리오를 썼고, 처음으로 디지털 촬영을 선택했으며, 처음으로 직접 제작에도 뛰어들었다.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를 제외한 자신의 모든 작품을 함께 한 음악감독(이자 자신의 조카) 나단 존슨도 다시 불러왔다. 자신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고 증명하기 위해 진검승부를 준비하는 듯 보였다

라이언 존슨은 “<나이브스 아웃>이 아가사 크리스티 소설의 기반으로 하면서 소셜 미디어처럼 현대 인터넷 문화 경향을 웃을 수 있게 스크린으로 옮겨보는 시도”라고 설명했다. 한 마디로 그동안 자신이 겪은 ‘사이버 불링’(온라인상의 집단 괴롭힘)을 영화에 녹였다는 암시였다.

<나이브스 아웃>

제작비 4000만 달러의 이 영화는 공개와 동시에 호평을 받았다. 라이언 존슨의 최고작이란 반응부터 올해 최고의 오락영화라는 극찬들까지 이어졌다. 북미에서 11월 27일 개봉 당시, <겨울왕국 2>의 자리는 뺏지 못했지만 초반부터 빠른 기세로 관객들의 주머니를 털고 있다. 국내에선 12월 4일에 개봉한다. <겨울왕국 2>, <포드 V 페라리>와 만났다. 라이언 존슨이 자신을 향한 불신의 눈초리를 <나이브스 아웃>으로 완전히 씻어낼 수 있을지 궁금한 건 어쩔 수 없다.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