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W버스의 크로스오버 이벤트에 처음 등장했던 배트우먼의 시리즈가 정식 방영된 건 지난 가을 시즌의 일이다. 넷플릭스의 인기 시리즈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에서 아주 큰 비중은 아니지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던 배우 루비 로즈가 주인공 배트우먼 역에 낙점되었으며, DC코믹스에서는 큰 의미가 있는 배트맨의 도시인 고담 시를 기점으로 활약하는 내용.

하지만 첫 트레일러가 공개된 직후부터, 정확히는 캐스팅 확정이 된 그 순간부터 배트우먼은 이런저런 이슈몰이의 주인공이 되어야 했다. 첫 번째 이유는 배트우먼이 LGBT 캐릭터, 즉 레즈비언이기 때문이었으며 트레일러에서 주요하게 내세운 부분이 페미니즘 이슈와 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이슈는 <캡틴 마블>을 기점으로 히어로무비에서 크고 작게 계속해서 논란거리가 되었던 부분이다. 여성 히어로의 등장과 그녀들의 활약이 강렬하게 그려지는 이야기 자체로서는 팬들 입장에서도-실상 코믹스 팬들은 오히려 여성 히어로들의 더 많은 실사화를 원했을지도 모른다-그리 부정적인 일은 아니었겠지만, 원작을 비틀거나 꼬면서까지 굳이 캐릭터의 당위성을 부여하려 하는 방식에 대한 불만이 제기되어 왔다.

물론 세련된 방식으로 제시된 문제제기였다면 이야기는 좀 달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배트우먼의 히어로로서의 각성이나 과정에 대한 언급은 모호했던 데 반해 배트우먼이 여성이라는 것만(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 같은 분위기의 예고편에 대한 반응은 솔직히 말해 좋지 않았다.

안타까운 점은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CW버스 산하의 TV 시리즈 <배트우먼>은 기존 코믹스의 설정을 바탕으로 케이트 케인이 배트우먼이 되어가는 과정과 그녀의 삶에 얽힌 문제들을 다루고 있는데, 예고편에서 보여준 내용보다는 훨씬 다양한 논점들이 들어 있다.

<배트우먼>이 가지고 있는 차별점은 대략 이 정도였다. 레즈비언 성향의 히어로 캐릭터가 전면에 등장하는 첫 시리즈였다는 점, 그리고 배트맨이 없는 고담시에서 배트우먼이 어떤 역할을 해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서사점의 제시.


원작의 배트우먼은 최초 등장 당시에는 레즈비언이 아니었고 배트맨의 연인으로서 생겨난 캐릭터였다. 하지만 크라이시스 온 인피닛 어스 이벤트를 거치며 캐릭터의 존폐여부가 불투명했다가 캐서린 '케이트' 케인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재등장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레즈비언 캐릭터라는 속성이 부여되었다.

여성 히어로 팀업인 버즈 오브 프레이의 일원이자, 2대 퀘스천으로 활약하기도 했던 르네 몬토야와 연인사이였던 전적이 있으며 고담 시의 대부호 집안이자 웨인(브루스 웨인의 그 웨인) 가와 비등한 케인 가의 딸이 바로 케이트 케인이다.

사관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내고 졸업을 앞둔 시점, 레즈비언이라는 이유로 퇴학을 당하게 되고 이후 방황하다 배트맨의 도움을 받아 배트우먼으로 거듭나게 된다는 설정을 갖고 있던 캐릭터다.

작중에서는 이런 본작의 설정을 차용하되 수정을 거쳤다. 브루스 웨인과는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사촌지간이며, 사관학교에서의 연인이었던 소피는 케이트 케인의 아버지가 이끄는 방범단체 크로우즈로 영입되어 있다. 케이트는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아 크로우즈에 정식 입단하고자 수행을 떠난 상태였다가 소피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고담 시로 돌아오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주요한 부분은 소피와 나누었던 애정관계와, 그들의 이별에 얽힌 몇 가지 비밀들, 그리고 어린 시절 테러범의 소행으로 죽음을 맞고 말았던 케이트의 생모와 쌍둥이 자매 베스의 사고에 얽힌 배트맨과의 오해, 그리고 그 때문에 얼룩진 아버지와의 관계 등이다.

케이트 케인은 배트맨이 없는 웨인의 건물에 침입해 사촌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배트맨의 수트와 물건들을 활용하면서 자경단 히어로인 배트우먼으로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케이트는 매 화가 끝날 때마다 종적을 감추고 사라져 버린 사촌오빠 브루스, 즉 배트맨에게 편지를 쓴다.


고담 시와 배트맨이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인 것처럼 결국 배트우먼의 이야기 전반에는 배트맨에 대한 오해와 그림자, 그리고 그의 영향력으로 가득 차 있다. 결국 배트맨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캐릭터인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예고편에서는 왜 배트맨 그 이상의 무엇인가인 듯한 표현을 해야 했을까.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쌍둥이 자매 베스와 그녀의 불행하기 그지없는 귀환과 재회에 있어서도 배트맨의 영향력은 상당하다. 기본적으로는 혈연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 배신과 오해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 관계에는 배트맨에 대한 오해가 상당수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일까, 시리즈 전반적으로 '배트우먼' 케이트 케인이 보여주는 이렇다 할 통쾌한 전개는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루비 로즈의 연기가 어설프다기보다는, 그녀가 히어로로서 어떤 완성의 단계에 이르는 과정에서 그보다 더 완성되어 있는 듯한 빌런 캐릭터에 더 눈길이 가기까지 한다. 무엇보다 히어로물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왜 히어로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당위성에 대한 설명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혈통이나 전투력, 혹은 굳은 의지나 선량한 마음 등을 어필할 수도 있다. 실제로 케이트 케인의 그러한 면모는 여러 부분에서 보인다. 하지만 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끝없이 속아 주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만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녀의 정의가 과연 올바른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지울 수 없다.

뭔가 어설프고 몸에 딱 맞지 않는 듯한 코스튬, 화려하고 파워풀하기보다는 그저 몸싸움처럼 보이는 액션 씬 때문일까. 눈에 띄는 것들은 오히려 이들을 위협하는 앨리스의 계략과 마우스의 능력이며 그 능력을 상회할 만한 케이트 케인, 즉 배트우먼의 무엇인가는 부각되지 못한다.

심지어는 앨리스라는 캐릭터조차 인간적인 자아와 빌런으로서의 악의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는 듯한-마치 아니라고 절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고민하고 있는-모습을 보여주는데, 일관적이지 않은 캐릭터는 몰입에 방해될 뿐이다.


최초의 레즈비언 히어로 캐릭터라는 점이라든지, 여성 히어로 캐릭터라는 점이라든지는 사실 이제 와서는 별다른 흥행몰이 요소가 될 수 없다. 여성 히어로는 이미 많고 그들의 서사는 완성된 지 오래다. 최초도 아니며 최고도 아니다. 그렇다면 결국 평가는 같은 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히어로 드라마에 관객이 원하는 건 무엇일까. 색다른 히어로, 색다른 배경, 색다른 숙적도 좋다. 하지만 어떤 다름보다는, 캐릭터 하나하나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그가 히어로로서 자리잡게 하는 당위성과 존재감을 심어주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PNN 에디터 희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