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영국 작가 앨런 무어는 <왓치맨>으로 휴고 상을 수상하면서 장르를 초월하는 슈퍼스타덤에 올랐다. 그는 <왓치맨> 이전에도 <V 포 벤데타>, <미라클맨> 등 여러 깊이 있는 수작을 집필했는데 그의 잘 알려지지 않은 걸작 중에는 <사가 오브 스웜프 씽>이 있었다.
'스웜프 씽'은 늪지대에서 막 기어나온 듯한 모습을 하고 있는, 처음 보면 영락없는 몬스터이지만 선한 얼굴을 하고 있는 히어로다. 스웜프 씽은 괴기스런 겉모습과 달리 팬들에게는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는 DC 코믹스의 주요 캐릭터로 자리매김했다. 그런데 경쟁사 마블에도 그와 비슷한 외형과 기원을 가진 캐릭터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맨-씽'이었다.
스웜프 씽의 아류가 아니다!
스웜프 씽은 앞서 언급한 앨런 무어의 <사가 오브 스웜프 씽> 연재분과 1990년대 초 방영했던 TV시리즈 <스웜프 씽> 등의 영향으로 나름 인기 캐릭터의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을 정도의 인지도를 얻은 상태였다. 그런데 마블의 맨-씽은 그보다 훨씬 인지도가 떨어져서 많은 원작 만화 팬들조차 맨-씽을 스웜프 씽의 인기에 편승한 마블의 치졸한 아류작 정도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맨-씽이 스웜프 씽보다 1개월 먼저 출간되었다는 것이다.
맨-씽은 1971년 5월 출간된 <새비지 테일즈> 1호에 처음 등장했다. <새비지 테일즈>는 성인 취향의 내용을 추구하는 잡지로서, 마블이 코믹 코드의 규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에서 만든 흑백 간행물이었다.
스탠 리와 로이 토마스가 합작해 만든 맨-씽은 원래 정부 산하 기관에서 캡틴 아메리카를 만든 슈퍼 솔져 세럼과 비슷한 약을 비밀리에 개발하고 있던 생화학자였다. 그는 연인의 배신으로 테러리스트 집단에 쫒기게 되자, 죽음 직전 자신에게 약을 투여하고 늪지대로 추락하게 되는데, 죽지 않고 늪지대의 내용물들과 융합된 괴물이 된다. 이전 삶에 대한 기억과 인간성은 거의 사라지지만, 무의식 속에 잔존하는 과거의 기억 때문에 안티히어로에 가까운 역할을 하게 된다.
같은 뿌리
맨-씽의 기원 이야기만 읽어도 스웜프 씽의 기원과 너무 비슷다. 여기에는 의외의 원인이 있다. 초기에 맨-씽의 각본을 담당했던 젊은 작가 제리 콘웨이와 경쟁사 DC 코믹스의 유명 작가 렌 윈은 절친한 친구였다. 과거에 둘은 룸메이트로 생활한 적도 있는데, 각자의 회사에서 진행하고 있던 ‘알고보면 히어로인 늪지대에서 기어나온 몬스터’ 기획에 대한 얘기를 언젠가는 서로 나눴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 재미있는 점은 렌 윈이 맨-씽의 각본도 썼다는 점이다. 즉 그는 두 경쟁사에 이름과 외형만 조금 다른, 같은 개념의 캐릭터를 동시 연재한 것이다.
심지어 마블의 스탠 리와 로이 토마스는 <스웜프 씽> 1호 출간 후 DC 코믹스를 상대로 소송도 고려했지만, 두 작가들의 친분에 대해 알게 되자 법적 절차를 밟지 않기로 한다. ‘늪지대 몬스터’라는 개념 자체가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 1940년대에 유명했던 ‘더 힙’이라는 몬스터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는 점도 이같은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이후 맨-씽과 스웜프 씽은 별다른 마찰 없이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맨-씽은 앞서 언급했던 1970년대 초중반의 안티히어로 붐을 타고 1974년에는 자신의 이름을 단 솔로 타이틀도 출간되었고, 다른 히어로들의 타이틀에도 가끔씩 얼굴을 내비치지만 스웜프 씽 정도의 인지도를 얻지는 못하게 된다.
현재 70~80년대의 히어로들이 끊임없이 재조명되고 재소비되는 현재에도 두 캐릭터의 위상은 상당히 달라서, <사가 오브 스웜프 씽>의 경우 10년 정도 주기로 끊임없이 새로운 판형으로 재판되고 판매 부수도 높은 반면, 맨-씽은 몇 년 전 <스티브 거버의 맨-씽>이라는 단권짜리 옴니버스 책이 한 권 나온 것이 고작이다.
마블의 시행착오
마블은 재정 상태가 다시 안정화되어가던 2000년대 초중반, 폭스에 판권을 넘긴 <엑스맨>과 <스파이더맨> 시리즈가 잘 되는 것을 보고 아티잔/라이온스게이트 영화사와 자사의 캐릭터들 영화화 계약을 맺는다. 이 때 대상에 오른 것이 퍼니셔, 아이언 피스트, 블랙 위도우 등 저예산으로도 TV용 영화로 제작 가능하다고 판단된 캐릭터들이었고, 이 중에 의외로 맨-씽도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2005년, 케빈 파이기와 아비 아라드가 제작에 참여한 맨-씽은 TV용 영화로 제작되었는데, 당시의 많은 코믹스 원작 영화들이 그러했듯이 원작의 내용을 크게 훼손시킨 금방 잊혀질 만한 영화였다. 맨-씽의 기원이나 주변 인물들도 전혀 다르게 바뀌었고, 정작 주인공이어야 할 맨-씽은 악당 몬스터에 가까운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결국, 비슷한 시기에 뜨뜻미지근한 평가와 흥행 결과를 얻은 <판타스틱 포: 실버 서퍼의 위협>과 <퍼니셔> 등의 영화와 함께 맨-씽은 다시 깊은 늪지대 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그래픽노블 번역가 최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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