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의 본능은 우리 DNA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증오와 탐욕으로 얼룩져 있다고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엔 세상에는 사랑이 넘친다. 항상 멋지거나 뉴스거리가 되진 않지만, 늘 존재한다. (중략) 잘 찾아보면 당신도 사랑은 사실 어느 곳에나 있단 사실을 알게 될 거라 생각한다. (If you look for it, I’ve got a sneaky feeling you’ll find love actually is all around.)”
영화 <러브 액츄얼리>는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휴 그랜트의 내레이션에서 그 제목을 따왔다. “사랑은 사실 어느 곳에나 있다.” 뜬금없지만, 나는 MBC <꼰대인턴>을 보다 문득 <러브 액츄얼리>를 떠올렸다. 어쩌면 이 드라마의 진짜 제목은 <꼰대 액츄얼리>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꼰대는 사실 어느 곳에나 있으니까.
제목만 놓고 보면 이 작품의 최고 꼰대는 잘 나가던 과거에 취해 여전히 윗사람 대접을 받고 싶어하는 시니어 인턴 이만식(김응수)일 것만 같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 보면 그것도 아니다. 일단 5년 만에 180도 뒤바뀐 입장으로 이만식을 만난 걸 계기로 급속도로 꼰대의 혼을 불사르는 가열찬 부장(박해진)부터가 경이로운 스킬을 선보인다. 국물 없으면 밥을 못 먹는 이만식 한 명을 괴롭혀 보겠다고 팀 전체 식사메뉴를 계속 샌드위치와 햄버거로 통일시키는 악랄함부터, 빠른 속도로 탑재한 “기본이 안 되어 있다”는 말버릇까지. 지난 5년간 자신은 이만식 같은 상사가 안 되겠다는 마음으로 세상 선량한 상사가 되려 노력했지만, 그러면 뭐하나? 자기를 괴롭혔던 전 직장상사가 시니어 인턴이 되어 제 밑으로 들어오자마자 복수심에 눈이 멀어버렸는데.
그럼 결국 가열찬과 이만식의 대결인가 싶었던 순간, 드라마는 카메라를 줌 아웃해 사무실 전체 풍경을 보여준다. 가열찬 앞에서는 입안의 혀처럼 알랑거리면서 인턴들에겐 온갖 잔심부름을 시키고 부탁한 적 없던 훈계질에 자기 잘못 뒤집어 씌우기까지 다양하게 저지르는 오동근 대리(고건한), 아버지 잘 만나서 지분도 하나 없이 사장 자리 꿰찬 주제에 아랫사람들에게 온갖 악랄한 공작질을 펼쳐 대는 철없는 재벌 2세 남궁준수 사장(박기웅), 가열찬을 챙겨주는 척하면서 사실은 그를 견제해 제 자리를 보전하려 하는 구자숙 전무(김선영), 가열찬을 믿어주고 지지하는 현명한 CEO인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가장 흑막인 남궁표 회장(고인범)… 꺼진 불도 다시 보랬다고, <꼰대인턴> 속 준수식품은 꼰대 아닌 줄 알았던 캐릭터들도 알고 보면 꼰대인 꼰대의 지뢰밭이다. 아주 가관이다.
<꼰대인턴>의 세계 속에서 꼰대는 단순히 나이가 많다고 되는 것도, 직급이 높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나이, 학력, 학벌, 직급, 고용형태, 성별. 자신이 상대보다 조금이라도 우위를 점한 거라면 그게 무엇이든 동원해서 대접받으려 하고, 그 우위를 근거로 상대의 의견을 부당하게 묵살하고 훈계하려 드는 순간 사람은 누구나 꼰대가 될 수 있다. 위아래 서열을 정하고 그를 통해 권력을 줄세우려는 꼰대의 본능은 우리 DNA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물론 짐승의 시간에는 분명 그런 본능이 필요했을 것이다. 누가 알파인지를 정해야 무리 전체에 질서가 생기고 불필요한 갈등이 줄어드니까. <동물의 왕국>만 봐도 나이 먹고 이빨 빠져 노쇠해진 우두머리 알파에게 도전하는 어린 풋내기의 서사가 가득하지 않나? 하지만 그건 정말 짐승들의 이야기이고, 근거에 따른 합리적인 논의 방식과 민주적인 의견 결정 제도를 만드는 데 성공한 인간까지 그래야 할 이유는 또 뭐란 말인가?
진화가 덜 된 건지 아니면 그냥 대장 놀이가 좋아서 그러는 건지, 인간은 아직도 서열놀이를 하는 데 여념이 없다.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는 소년이 “나 3월에 4학년이니까 내 말 잘 들어라”고 말하는 전설적인 짤방이나, “우리 형아는 중학생이야”, “우리 아빠가 나이 더 많아” 같은 무의미한 대결로 서열을 정하려 버둥거리는 어린 아이들의 골목싸움도, 생판 남이랑 언쟁이 붙어서 수 틀리면 “민증 까보라”고 말하는 중년들의 유치찬란한 연식인증도, 43년생 어르신이 35년생 어르신에게 깍듯하게 커피 수발을 드는 노인정 속 위계질서도 사실은 다, 전부 다 꼰대본능의 흔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꼰대인턴>을 보는 일은 인간이 우리 생각처럼 그렇게 많이 진화한 건 아니라는 걸 새삼 확인하는 자각이자, “우리 회사에도 저런 짐승 같은 X끼 있어…!”라고 외치게 되는 공감이며, “잠깐만, 나도 오늘 후배들한테 저런 이야기 한 거 같은데…”라며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자기검증의 체험이다. 그리고 저 지경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가장 엄하게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다시 한번 휴 그랜트의 말을 뒤틀어 인용하자면 꼰대는 사실 어느 곳에나 있으니까. 당신과, 나의 마음 속에도.
이승한 TV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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