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자신을 위해 노력하는 상대의 모습을 보며 더 기운을 내고, 나도 상대를 위해 더 나은 사람이 되겠노라 노력하는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구원한다.

<이 구역의 미친 X>

나의 첫 정신과 방문은 2003년이었다. 그때의 나는 개인사정으로 학교를 휴학해야 했는데, 하필 이미 학기 중간이라 질병 휴학 말고는 휴학계를 접수할 수 없었다. 특별히 어디 아픈 곳도 없는데 무슨 진단서를 끊어가야 하는 거지? 고민하며 집 근처를 걷던 나는 ‘신경정신과’ 다섯 글자를 보고는 뭔가에 홀린 듯이 병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접수 후 대기실 소파에 앉은 내게 간호사는 몇 장의 테스트지를 건네주었다. 이거 다 작성하시고 제출하시면 저희가 성함 불러드릴게요. 난생 처음 보는 신경정신과 조사지를 대기실 탁자 위에 올려놓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도 기왕 돈 주고 하는 테스트인데, 이건 정말 진지하게 해보자. 진단서야 뭐, 사정이 있어서 휴학계를 내야 한다고 말하면 끊어 주시려나.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진료실로 들어갔더니, 흰 가운을 단정하게 차려 입은 중년의 여자 의사가 묘한 표정으로 나를 맞았다. 그의 테이블 위에는 내 조사지가 놓여 있었다. 자리에 앉으며 나는 사정을 설명해야겠다 싶었다. 별 이상이 없게 나온 건 정말 별 이상이 없어서 그런 거고, 제가 사실 휴학을 해야 해서요. 이렇게 말하려 입을 떼려는 순간, 의사는 테이블 너머로 팔을 쭉 뻗어 내 손을 꼭 잡고 이렇게 말했다. 왜 이렇게 될 때까지 병원을 안 오셨어요. 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의사는 내가 심각한 수준의 우울증을 앓고 있으며, 편집증 증세도 있다고 말했다. 이런 경우에는 저희가 약물치료를 병행한 상담치료를 권해드리는데요…. 아니, 난 진단서만 떼러 온 건데, 이게 무슨 소리지? 진단서를 떼고 병원을 나오는 길, 나는 생각이 복잡해졌다. 그냥 우울한 순간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정말 많이 망가졌구나.

나는 약물치료도 상담치료도 받지 못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재수를 하게 됐는데, 잠만 집에서 잤지 아침 8시부터 밤 12시까지 재수학원에 묶여 있는 생활은 사실상 수도원 생활에 가까웠다. ‘정신이 맑아야 공부도 잘 된다’는 모토를 내걸었던 그 학원은 직접 재배한 유기농 채소로 만든 식사를 삼시세끼 제공했고, 휴식시간엔 명상과 단전호흡을 권유했다. 그 해 말 나는 목표했던 대학에 들어가는 일은 실패했지만, 편집증은 사라졌고 우울증은 일상생활이 가능한 경미한 수준으로만 남았다. 들어갈 땐 재수학원인 줄 알고 들어갔고 선생님과 부모님을 비롯한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는데, 결과를 놓고 생각해보면 일종의 요양원이었던 셈이다. (나는 다른 선택지도 없었거니와 극도로 운이 좋았던 케이스다. 의사가 치료를 권유하면 ‘명상과 단전호흡으로 극복해야지’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전문의의 판단을 믿으시라.)

나이 먹고 사회에 나와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는 자연스레 크고 작은 정신질환 하나쯤 안 가진 사람이 드물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내가 처음 신경정신과를 찾았던 2003년만 해도 신경정신과를 간다고 하면 “쟤 미쳤나 봐”라는 눈초리를 받곤 했는데, 어느덧 사람들이 모이면 자연스레 각자가 가진 증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어떤 약이 좋은지 이야기하는 게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닌 세상이 된 것이다. 아, 양극성 정동장애시구나. 전 성인 ADHD가 있어요. 저런, 그거 고단하시겠다. 의사한테 손을 붙들리고 겁에 질렸던 2003년의 나한테 말해줄 방법이 있다면 좋을 텐데. 좀 무섭고 마음이 복잡하겠지만 별 일 아니라고. 강산이 두 번쯤 바뀌고 나면 다들 자기가 무슨 약을 복용하는지 생생정보를 교환하는 세상이 온다고.

카카오TV <이 구역의 미친X>(2021)의 507호 남자 휘오(정우)와 506호 여자 민경(오연서)도 그랬다. 마약사범을 잡으려다가 아끼는 후배는 다치고, 자신은 성매매 업소 출입 누명을 뒤집어쓰고 정직당한 경찰 휘오는 온 세상이 다 싫다. 분노조절장애로 언제나 폭발 직전인 상태의 휘오는 툭하면 심호흡을 하며 자신을 가다듬어야 한다. 들이마셨다가 내쉬면서 하나, 폭발하면 안 돼. 다시 들이마셨다가 내쉬면서 둘, 화내지 말자.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던 남자가 알고 보니 유부남이었다는 배신감에 더해, 그에게 데이트폭력까지 당한 이후로 그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된 민경은 세상이 다 의심스럽다. 저 사람이 날 자꾸 수상스럽게 훔쳐보는 것 같아. 저기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은 분명 내 뒷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모두가 날 질타하는 것만 같아. 건드리기만 해도 폭발 직전인 남자와,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걸 밀어내고 도망가기 바쁜 여자는 그렇게 가장 연약하고 불안정한 순간에 마주쳤다.

마음을 잔뜩 다친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오해와 분쟁으로 시작됐지만, 하필이면 옆집 사람인데다가 다니는 신경정신과도 같았던 탓에 둘은 자연스레 서로의 병증과 아픔을 알아가게 된다. 그랬구나. 가장 아끼던 후배가 자기 때문에 다쳤다는 분노를 견디기 힘들었겠다. 그랬구나, 가장 사랑했던 사람에게 무력하게 폭행을 당하는 순간의 배신감이 널 크게 상처 입혔겠다. 서로 어디가 아픈지, 왜 아픈지, 얼마나 아픈지 이해한다고 해서 당연히 다 상대를 도울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정신적인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고 이해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크게 위안이 되는 일이다. 다들 그래 줄 사람을 찾고 만나는 일이 어려워서 비싼 돈을 주고 상담치료를 받으러 가는 거 아닌가. 휘오와 민경 또한 그렇게 서로에게 위안을 받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영부영 사귀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다들 마음 한구석에 크고 작은 병 하나씩 가지고 있으니 괜찮다는 말이 당연히 그 상태로 머물러 있어도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주변의 도움을 받아가며, 조금씩 더 건강해지려고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생각하면, 정신이 피폐하고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끼리 만나 사랑하는 게 서로에게 뭐 얼마나 도움이 될까 싶을 수도 있다. 어느 한 쪽은 그래도 맨정신으로 세상 살고 있어야, 상대가 넘어지면 끌어 올려줄 수 있지 않겠나. 그러나 휘오와 민경은 서로를 위해 자신의 공포를 극복하고 분노를 참아보기 위해 노력한다. 세상이 모두 두려웠던 민경은 자신에게 상처를 주고 공포를 안겼던 악몽의 근원과 마주할 용기를 내고, 자신을 건드리는 모든 것들에 분노하던 휘오는 그 분노를 통제하고 조절하는 법을 익힌다. 서로 자신을 위해 노력하는 상대의 모습을 보며 더 기운을 내고, 나도 상대를 위해 더 나은 사람이 되겠노라 노력하는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구원한다. 멀쩡하고 건강한 이가 아프고 망가진 이를 구해주는 게 아니라, 아프고 망가진 이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서로를 구원해 준 셈이다.

그러니 옆에서 내 아픈 걸 같이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봐서라도 더 나아져야겠다고 용기를 낼 수만 있다면, 지금 잠깐 아프고 망가졌다 해도 우린 괜찮을지 모른다. 서로 ‘미친 놈’이라 부르면서도 서로를 수렁에서 건져 올려준 휘오와 민경처럼, 우리는 서로를 구할 테니까.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