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폰소 쿠아론의 걸작 <그래비티>가 8년 만에 재개봉해 2021년의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 <그래비티>가 음악보단 그 넓은 우주에서 살아 돌아가기 위해 애쓰던 인물들의 가쁜 숨소리가 더 기억에 남는다면, 쿠아론이 <그래비티> 전에 발표한 <칠드런 오브 맨>엔 꽤나 많은 음악들이 세심하게 배치됐다. <칠드런 오브 맨> 속 음악들을 곱씹어보자.


Ruby Tuesday

FRANCO BATTIATO

사람이 태어난 지 열여덟 해가 지난 2027년의 어느 날. 최연소 인류 디에고가 피살되었다는 뉴스로 떠들썩하다. 하지만 이 세상은 타인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조차 없다. 테오(클라이브 오웬)가 머물렀던 카페에 느닷없이 폭탄이 터지고 일대는 순식간에 폐허가 된다. 심란한 테오는 유일하게 의지할 만한 사람인 왕년의 시사만화가 재스퍼(마이클 케인)를 만나러 간다. 재스퍼의 집으로 가는 길, 차에선 과거의 음악들이 들린다. 딥 퍼플(Deep Purple)의 'Hush', 루츠 마누바(Roots Manuva)의 'Witness' 등 장르도 다양하다. 집에 도착해서도 음악은 멈추는 법이 없다.

단연 깊게 남는 건 고문후유증을 앓는 재스퍼의 아내를 돌볼 때 들리는 프랑코 바티아토(Franco Battiato)의 'Ruby Tuesday'다. 롤링 스톤즈(The Rolling Stones)의 원곡을 이탈리아의 명 싱어송라이터인 바티아토가 1999년 커버했다. 거의 모든 트랙이 60년대 명곡의 리메이크로 이루어진 앨범 <Fleurs>에 수록됐다. 원곡이 후렴마다 록 밴드 특유의 강렬한 사운드가 터져나오는 것과 달리, 바티아토의 버전은 줄곧 몽롱하고 명상적인 분위기가 이어진다. 대부분 영화 배경인 영국 출신 아티스트들의 음악이 쓰인 가운데, 'Ruby Tuesday'만큼은 영국을 대표하는 밴드의 명곡을 이탈리아 아티스트가 리메이크 한 곡이라는 건, 디스토피아 가운데서도 여유를 잃지 않으려는 외계인 같은 재스퍼의 존재와도 닿아 보인다. 피쉬단을 피해 찾아온 테오와 키(클레어 호프 아시테이)가 다시 위험에 빠지자 그들을 대피시키고, 집에 남아 '편안한 죽음'을 앞에 둔 채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때도 바티아토의 'Ruby Tuesday'가 흐르고 있다.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

KING CRIMSON

테오는 20년 전에 헤어진 아내 줄리안(줄리안 무어)을 다시 만난다. 줄리안은 피쉬단 리더로 활동하고 있고, 정부에서 일하는 테오에게 불법체류자 여자를 해안까지 데려다줄 수 있는 여행증을 만들어달라고 제안한다. 비록 달갑지 않은 재회였지만, 테오는 그걸 도와줄 수 있는 미술 콜렉터 친구 나이젤을 찾아간다. 그 여정에 킹 크림슨(King Crimson)의 데뷔 앨범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의 대미를 장식하는 동명의 트랙이 쓰이는데, 배치가 꽤 특별하다. 거대한 감정을 머금고 있는 듯한 이 대곡이 호화로운 자동차 안에서 런던의 잿빛 풍경을 바라보는 건 그 자체로 아이러니가 증폭되지만, 위험천만한 도심을 빠져 나와 마치 디스토피아 이전을 보는 듯한 안전한 일상을 바라볼 때도 계속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음악이 영화 자체에 새겨진 것처럼 쓰였는데, 나이젤의 대저택에 들어와서는 영화 속 저택에서 틀어놓은 것처럼 음량이 조절되고, 거대 다비드상과 피카소의 대형 회화가 걸려 있는 나이젤의 방에서도 음악은 방송처럼 들린다. 사람들이 고통에 허우적대고 있는 세상이 마치 가진 자에겐 선택과 컨트롤의 영역이라는 걸 나타내는 것 같달까.


Wait

THE KILLS

테오가 줄리안과 함께 키, 미리엄(팸 페리스), 루크(추이텔 에지오포)를 차 안에서 만나고, 다소 냉랭했던 분위기는 금세 누그러진다. 라디오에선 "비교적 조용한 오후군요. 추억이 그리운 분들을 위해 2003년 곡을 띄워드리죠. 그땐 종말의 임박을 아무도 믿지 않았죠" 하며 킬스(The Kills)의 'Wait'를 틀어준다. 2인조 밴드 특유의 단출한 사운드의 'Wait'는 실제로 킬스가 2003년에 발표한 첫 앨범 <Keep on Your Mean Side>에 수록된 곡이다. 테오와 줄리안이 사랑했던 시절 했던 공놀이를 하는 등 점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무르익던 중, 느닷없이 숲에서 불타는 자동차가 그들에게 뛰어들고, 수많은 테러리스트들이 테오 일행을 린치한다. 조용한 한낮에 어울리는 음악이었던 'Wait'는 줄리안이 총에 맞고 테러리스트들에게 공격받는 동안의 절체절명의 순간을 아이러니하게 수식하게 된다. 집요하게 담아낸 롱테이크 아래, 비명과 신음이 뒤엉킨 가운데 무심하게 계속되고 있는 'Wait'가 이 상황을 더욱 비극적으로 만든다.


Fragments of a Prayer

JOHN TAVENER

영국의 작곡가 존 타베너(John Tevener)는 <칠드런 오브 맨>의 음악감독으로 이름을 올렸다. 'Fragments of a Prayer', 'Eternity's Sunrise', 'Song of the Angel' 등 이 황폐한 세상에서 살아남은 인류의 지친 마음을 어루만지는 듯한 음악들을 만들었다. 주제가 격의 'Fragments of a Prayer'는 키가 테오를 헛간으로 불러 자기가 아이를 가졌음을 고백하는 순간의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18년 전에 태어난 아이의 죽음에 세상 사람들이 내 가족을 잃은 양 슬퍼하는 모습을 보았기에 관객은 아이를 품고 있는 키의 이 고백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직감하고, 타베너의 숭고한 곡조와 그걸 전달하는 소프라노 사라 코놀리(Sarah Connolly)의 목소리가 그 감동을 끌어올린다. 러닝타임이 15분이 넘는 'Fragments of a Prayer'의 여러 부분들이 <칠드런 오브 맨> 곳곳에 쓰여 디스토피아의 비감을 배가시킨다.


Bring On the Lucie (Freda Peeple)

JOHN LENNON

줄리언의 살해가 루크가 꾸민 짓이라는 걸 알게 된 테오는 키와 미리엄을 데리고 피쉬단의 아지트를 가까스로 빠져나온다. 그가 향할 곳은 유일한 안식처, 재스퍼의 집이다. 급박했던 탈출 작전에 뒤이어 등장하는 신이라, 재스퍼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욱 안전하게 느껴진다. 재스퍼가 요리를 한 걸 다섯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먹으면서 앞일을 도모하는 모습은 <칠드런 오브 맨> 통틀어 가장 평화로운 장면이라 할 만하다. 집에선 존 레넌의 'Bring on the Lucie'가 흘러나오고 있다. 레넌이 (비틀즈가 해산하고 3년 후인) 1973년에 발표한 네 번째 솔로 앨범 <Mind Games>을 통해 발표된 'Bring on the Lucie'는 'Imagine'과 'Power to the People'과 함께 레넌의 정치적인 메시지가 확실히 담긴 곡으로 회자되고 있다. 여기서 레넌의 음악이 쓰인 게 흥미로운 이유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생전 레넌의 모습을 참고해 재스퍼의 캐릭터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모든 이야기가 마무리된 후 엔딩 크레딧이 오를 때에도 'Bring on the Lucie'가 사용됐다.


Threnody for the Victims of Hiroshima

KRZYSZTOF PENDERECKI

대낮에 차 안에서 습격 받는 신만큼이나 강렬한 롱테이크가 또 하나 있다. 영화 후반 테오와 아이를 낳은 키, 집시 마리쉬카와 함께 배를 타러 가려다 피쉬단에게 붙잡혀 키를 납치 당하고 테오가 키를 다시 구출하는 6분간의 시퀀스다. 그야말로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놀라운 카메라워크도 좋지만, 시퀀스 내내 관객의 신경을 자극하는 음악 또한 인상적이다. 현대음악의 거장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Krzysztof Penderecki)가 1961년에 발표한 연주곡 'Threnody for the Victims of Hiroshima'(히로시마 희생자를 위한 애가)다. 시작하자마자 신경을 긁는 듯한 높은 음의 현약 소리가 불규칙하게 쏟아지면서 시작하는 음악은 총격과 포탄 소리가 끊임없이 터지는 가운데에도 마치 이명처럼 사라지지 않고 이 숨막히는 여정을 함께 한다. 듣자마자 좌중을 '부정적인' 기운으로 압도해버리는 아우라 덕분에 윌리엄 프리드킨의 <엑소시스트>(1973),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1980), 데이비드 린치의 <트윈 픽스: 더 리턴>(2007) 등 걸작 스릴러들이 애용한 바 있다. 이 끈질긴 롱테이크와 음악은 수많은 폭격을 피해 키를 찾아낸 테오에게 루크가 총구를 겨누는 신에서 뚝 멎는다.


Running The World

JARVIS COCKER

존 레넌의 'Bring on the Lucie'가 끝난 후에도 엔딩 크레딧은 계속 끝나지 않고, 그를 이어 나오는 노래는 자비스 코커(Jarvis Cocker)의 'Running the World'다. 실제로 이 노래의 출처는 엔딩 크레딧의 두 번째 음악으로 쓰인 <칠드런 오브 맨>의 활용과도 닮았다. 5분에 육박하는 러닝타임 내내 정치적인 메시지가 빼곡하게 담긴 'Running the World'는 90년대를 대표하는 영국 밴드 펄프(Pulp)를 이끌었던 자비스 코커가 2006년 발표한 첫 번째 솔로 앨범 <Jarvis>의 마지막을 장식하되, 그 전 트랙 'Quantum Thoery'가 끝나고 25분 4초 간의 묵음이 이어진 후에 등장하는 히든 트랙으로서 배치됐다. (LP 버전은 이 곡만 따로 7인치 디스크에 담겨져 있다) 듣기만 해도 거리를 메운 군중이 떠오르는 노래가 서서히 잦아들면, 어쩌면 <칠드런 오브 맨> 시점보다 더 미래인 세상에서 들려오는 듯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칠흑같은 화면 위를 떠돌아다닌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