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쌀쌀해지면 로맨스 영화를 찾게 되는 건 왜일까. 새로운 영화들이 더는 새롭게 느껴지지 않을 때, 오래도록 작품성을 보장받아온 고전으로 눈을 돌리는 것은 괜찮은 방법이다. 고전이라고 해서 고리타분할 것이라는 걱정은 덜어도 좋다. 아직도 재밌는 고전 로맨스 영화 5편을 소개한다.


티파니에서 아침을

Breakfast At Tiffany's, 1961

검은 이브닝드레스에 큼직한 액세서리를 한 홀리(오드리 햅번)는 뉴욕 5번가 티파니 보석상 앞에서 빵과 커피로 아침을 때운다. 상류사회를 동경하는 그는 매일 밤 파티를 열며 부유한 남성들과 어울린다. 홀리의 윗집으로 이사 온 가난한 작가 폴(조지 페파드)은 이내 속을 통 알 수 없지만 사랑스러운 홀리에 빠져들고 홀리 역시 폴에게 호감을 느끼지만, 누구에게도 속박되고 싶지 않은 홀리는 그 마음을 외면한다. 오드리 햅번의 로맨틱 코미디 걸작 <티파니에서 아침을>이다. 햅번=지방시 공식을 각인시키는 스타일링,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창에 걸터앉아 부르는 ‘문 리버’(Moon River) 등 볼거리가 많은데. 영화가 홀리를 그리는 방식은 특히 인상적이다. 수동적인 여성 캐릭터가 아닌, 솔직하고 당당한 태도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유분방하게 사는 홀리는 시대를 앞서갔다는 평을 받았다. 끝내 빗속에서 이름 없는 고양이와 함께 사랑을 찾는 마지막 장면의 감동은 여전하다.


졸업

The Graduate, 1967

대학을 갓 졸업하고 집으로 돌아온 벤자민(더스틴 호프만)은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고민에 빠져 멍하니 시간을 보낸다. 부모님은 지인들을 불러 자랑스러운 아들의 환영 파티를 열어주지만 벤자민은 그게 부담스럽기만 하다. 한창 파티에 싫증을 느끼고 있을 무렵 그는 로빈슨 부인(앤 밴크로프트)에게 집에 데려다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벤자민을 집으로 끌어들인 로빈슨 부인은 그를 노골적으로 유혹하고 둘은 치명적인 밀회를 즐기기 시작하지만. 로빈슨 부부의 딸 일레인(캐서린 로스)이 등장하면서 셋의 관계는 소용돌이에 빠진다. 기성세대를 향한 저항을 함의하는 <졸업>은 당시 젊은 세대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사이먼 앤 가펑클의 ‘더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The Sound of Silence)는 곧 벤자민과 로비슨 부인의 공허함을 떠오르게 하고, <졸업> 속 장면들은 개봉 50년이 지나도록 꾸준히 오마주로 소환된다. 휴머노이드 같은 더스틴 호프만의 어투와 반응 속도, 한참 어설픈 호텔 예약 장면, “플라스틱,” “로빈슨 부인, 지금 절 유혹하고 계시잖아요,” 등이 기억에 남지만 <졸업>을 더 특별하게 만든 건 마지막 장면이다. 결혼식장을 막 도망쳐 나온 벤자민과 일레인의 웃음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짧은 해방감 뒤에 곧바로 찾아오는 불안 때문이다. <졸업>은 마냥 낭만적이진 않은 현실적인 로맨스로 끝났다.


밀회

Brief Encounter, 1945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평범한 주부 로라(셀리아 존슨)는 매주 목요일이면 시내로 나가 장을 보고 여가를 즐긴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어느 목요일, 역에서 집에 돌아가는 기차를 기다리다가 로라는 앨릭(트레버 하워드)이라는 의사를 만난다. 눈에서 먼지를 빼내 주는 뻔하고도 소중한 짧은 만남으로 둘의 인연은 시작된다. 매주 영화를 보고 식사도 하며 은밀한 만남을 이어가고 결국 사랑에 빠지지만, 가정이 있는 둘은 작별을 택하고 만다. 자기고백적으로 쏟아내는 로라의 내레이션이 <밀회>를 이끈다. 대사보다는 내레이션으로 전해지는 로라의 마음의 소리에, 번민이 깃든 그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는데. 설득력 가득한 그 애처로운 눈빛은 보는 이로 하여금 속절없이 몰입하게 한다. 마지막 장면, 비스듬히 기울어지는 앵글과 기적 소리 그리고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의 조합은 가히 상징적이다. 회상과 현재 장면을 오가는 컷이 기가 막힌 이 영화는 제1회 칸영화제 그랑프리상(지금의 황금종려상)을 받은 작품이다.


이수

Goodbye Again, 1961

파리에서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일하는 폴라(잉그리드 버그만)는 로제(이브 몽땅)와 5년째 사귀고 있다. 로제는 바람기가 있어서 일 핑계를 대며 폴라를 종종 혼자 둔다. 겉으로는 괜찮은 척하지만 폴라도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진다. 어느 날 폴라는 의뢰인의 아파트에 갔다가 그 집 아들 필립(안소니 퍼킨스)을 알게 된다. 필립은 폴라에게 첫눈에 반해 애정을 아낌없이 퍼붓고 폴라도 그런 그에 호감을 갖게 되지만. 한참 어린 연인과는 어딜 가도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탓에 폴라의 새 사랑도 쉽지는 않다. <이수>는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안소니 퍼킨스가 연기한 필립에게 원작 인물인 시몽의 오묘함은 덜하지만 폴라를 향한 그의 애절한 일편단심만은 더 크다. <이수>는 폴라의 입장에서 그려졌다. 자신이 느끼는 사랑에 벅차 자신감에 차있다가, 폴라의 마음을 얻지 못해 의기소침해지는 필립의 입장에서 서사를 소화하면 또 다른 이야기를 만날 수 있을 것. 잉그리드 버그만, <싸이코> 직후의 안소니 퍼킨스, 그리고 이 영화로 제14회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은 이브 몽땅의 열연이 눈부시다.


39 계단

The 39 Steps, 1935

런던에 출장 온 해니(로버트 도냇)는 총소리로 소란이 일고 지나간 음악당에서 신비한 여인 아나벨라(루시 맨하임)를 만난다. 아나벨라는 본인이 쫓기고 있다며 해니에게 도움을 청해 그의 아파트까지 따라간다. 본인이 스파이라는 아나벨라는 그날 밤 해니에게 자신의 임무와 ‘39 계단’이라는 알 수 없는 암호에 대해 언급하지만, 자세한 내막을 들려줄 새도 없이 다음 날 아침 주검으로 발견된다. 한순간 음모에 휘말려 범인으로 몰린 해니는, 아나벨라를 노리던 이들과 경찰의 타깃이 되고, 어쩔 수 없이 아나벨라가 남기고 간 임무를 마저 끝내러 스코틀랜드로 떠난다. 그는 그 길에 만난 또 다른 여인 파멜라(매들린 캐롤)와 함께 도피하며 ‘39 계단’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39 계단>은 서스펜스의 대가 알프레드 히치콕의 작품이다. 잘린 새끼손가락 반전, 암기 달인 반전 등 상징적인 장치를 남긴 이 영화는 <싸이코> <현기증> <이창> <새> 등과 함께 오래도록 사랑받아 왔다. 히치콕이 미스터리, 스릴러만큼 좋아하는 장르가 로맨스일 테다. 위에서 소개한 네 작품과 같이 본격적인 사랑 이야기는 분명 아니지만, 그가 그의 대표 첩보 영화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를 만들기 훨씬 전부터 서스펜스, 로맨스, 코미디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데 장기를 보여왔음을 보여주는 초기 작품이다.


씨네플레이 이지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