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자들에게 있어 멀티버스라는 개념은 꽤나 매력적이다. 이 '멀티버스'는 히어로 코믹스가 긴 세월 동안 전 세계 독자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었던 원천이기도 한데, ‘다른 평행우주’라는 조건을 붙이면 고정적인 설정에 구애받지 않고 창작자의 의도에 맞는 다채로운 설정을 추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돈 많은 스파이더맨이라든지, 덕분에 독자들은 캐릭터 하나로부터 장르적으로도 서사적으로도 상당히 넓은 범위의 스토리를 접할 수 있었고 이 상상력은 오랫동안 독자들을 사로잡는 매력 요소로 작용했다.
특히 히어로 코믹스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인간을 능가하는 힘을 지닌 히어로와 신들이 공존하는 어떤 세계에서 단일한 캐릭터의 삶을 그려내는 것은 몇 가지 이슈와 에피소드에 그칠 수밖에 없다. '히어로' 코믹스다운 '영웅' 신화. 하지만 같은 캐릭터가 다른 환경과 조건 속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는 전제, 즉 멀티버스 속에서는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 역시 이 멀티버스 개념을 염두에 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DC 확장 유니버스 역시 마찬가지다. 실사화 프로젝트를 통해 그려지는 마블 혹은 DC의 영화 속 세계관은 코믹스나 애니메이션 등 이전의 세계관과는 구별되는 별도의 세계관이라는 뜻이다. 즉 같은 스파이더맨이라고 해도 특정 코믹스 이슈에 등장하는 스파이더맨과 MCU의 스파이더맨은 같지만 다른 존재다.
하지만 MCU가 초반부터 이 멀티버스 개념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던 것은 아니었다. 스크린 개봉작을 주요 무대로 하는 MCU 입장에서는 멀티버스라는 개념을 관객들에게 설명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이언맨>이 개봉하기 전, 경쟁사들에 비해 인지도도 인기도 밀리던 그 시절에는 가장 인기가 있을 만한 아이언맨의 이야기를 영화화하는 게 급선무였을 테니까.
그래서 MCU에 멀티버스가 구체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페이즈 2의 마지막 타이틀이었던 <앤트맨>에서 양자 영역을 소개하며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앤트맨이 딸을 구하기 위해 한계치 미만으로 작아지는, 즉 원자보다 작은 사이즈로 몸을 줄이면서 기이한 형태로 가득 찬 미지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장면이 나오는데 이 부분이 바로 양자 영역이다. 코믹스 원작에서는 '마이크로버스'라는 이름의 또 다른 우주인데, 앤트맨은 거의 정신을 잃었다가 딸의 목소리를 듣고 기적적으로 생환하기도 했다.
<닥터 스트레인지>에서는 에인션트 원의 입을 빌려 구체적인 언급을 하기 시작했다. 에인션트 원은 카마르 타지에 도착한 스트레인지를 멀티버스로 보내 수많은 우주들을 체험하게 하는데, 스트레인지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세계가 실제로는 광대한 멀티버스 속에서 실낱같이 작은 부분이었다는 점을 가르치는 장면이었다. 또 '도르마무'가 존재하고 있던 다크 디멘션 역시 멀티버스 중 하나였고, 작중 케실리우스의 계략으로 인해 다크 디멘션의 문이 홍콩 시내에 열리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에 와서는 앞선 두 영화를 통해 제시한 멀티버스, 그리고 양자 영역을 이용해 '핑거 스냅' 사태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아이언맨이 예상치 못한 이유로 인해 태서랙트를 로키에게 빼앗기고, 로키가 태서랙트를 훔쳐 달아나는 장면은 또 다른 멀티버스의 시작이기도 했으며 이 사건은 결국 디즈니 플러스를 통해 공개한 독점 시리즈 <로키>의 단초를 제공했다.
MCU의 페이즈4는 본격적으로 이 '멀티버스'에 대해 다룰 예정인 듯하다. 페이즈4 라인업으로 공개된 영화와 TV 시리즈들 중 상당수가 멀티버스 개념을 기반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닥터 스트레인지의 두 번째 솔로 무비인 <닥터 스트레인지 인 멀티버스 오브 매드니스>가 있을 것이고, 앞서 언급한 <로키> 그리고 <완다비전> 역시 그렇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 세 작품은 꽤 연관성이 깊다고 하며, <완다비전>에서 파격적인 스토리를 선보였던 '스칼렛 위치' 완다와 멀티버스를 통해 생환한(엄밀히 생환은 아니다) '로키'가 닥터 스트레인지와 조우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게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로키>의 경우 멀티버스를 감시하는 조직이 직접적으로 등장할 만큼 구체적으로 묘사되었으니 이후의 이야기도 기대해 볼 만하다.
어쩌면 멀티버스를 무대 위로 올리는 시점으로, MCU의 페이즈4는 딱 시기가 좋을지도 모르겠다. 자체 OTT 플랫폼인 디즈니 플러스를 포함해 기존의 영화 라인업까지, 무대는 확장되어 있으며 이전의 10여 년간 풀어 온 수많은 이야기들을 통해 MCU라는 거대한 세계관을 충분히 소개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지구에서 우주로 뻗어 나가 전 우주를 누비는 히어로들을 선보인 바, 이제는 새로운 우주로 떠날 차례라고 생각한 것일지도 모르고.
드디어 한국 서비스를 시작하는 디즈니 플러스에 힘입어 MCU의 페이즈4 전체를 풀코스로 즐길 수 있게 된 만큼, MCU가 천천히 그려내는 멀티버스에 또 어떤 문제가 숨어 있는지 그리고 닥터 스트레인지를 위시한 히어로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를 확인해 볼 순서인 듯하다.
프리랜서 에디터 희재







댓글 (0)
댓글 작성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로그인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