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두 손을 들고 '스필버그 포즈' 한 번 해보고 읽어야 할 분위기군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사진을 검색하다 보니 저런 손 동작을 한 사진이 많더군요. 마치, 현장에서 "이만큼" 혹은 "이렇게"라며 양과 질을 강조하는 모습처럼 느껴집니다. 안 그래도 스필버그 감독 하면 누구입니까? 블록버스터 영화의 아버지 아닙니까? 요즘 젊은 관객들은 잘 모를 텐데 블록버스터 영화라는 용어 자체가 스필버그 감독 때문에 생긴 것이지요. 12월 18일은 스티븐 스필버그 할아버지의 70번째 생일입니다.
영화를 누리고 사는 감독
아무튼 21세기 블록버스터 시대를 탄생시킨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생일을 맞이해서 그가 지금껏 만든 29편의 극장용 장편 영화 중에서 베스트를 한 번 선정해볼까 합니다. 안 좋은 영화를 꼽는게 더 어려울 것 같긴 한데 아무튼 가장 기억에 남고 또 언제 꺼내 다시 봐도 두근거리는 영화를 골라봤습니다. 이의 제기는 환영합니다!
가로등거미 에디터가 꼽은
스필버그 베스트 10
10위. <레이더스 Raiders of the Lost Ark>(1981)
영화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캐릭터를 꼽으라면 상위 10명 리스트에 인디아나 존스가 빠질 수 없겠죠? 인디아나 존스는 조지 루카스 감독과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합작품입니다. 조지 루카스 감독은 신인 시절, 두 개의 아이디어를 꼭 영화로 만들겠다고 생각했지요. 하나는 우주 배경의 영화(<스타워즈> 시리즈), 그리고 또 하나는 신비한 보물을 쫓는 고고학자가 주인공인 액션 영화였죠. <스타워즈> 시리즈의 흥행이 성공한 이후에야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를 투자받아 만들 수 있었죠. 조지 루카스 감독은 본인은 각본만 쓰고 <007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 참여하고 싶어했던 스필버그 감독에게 연출을 맡겼죠.
처음부터 시리즈를 만들겠다는 두 사람의 뚜렷한 기획 의도에 따라서 <스타워즈> 시리즈의 한솔로를 맡아 인기가 급부상한 해리슨 포드가 합류하면서 시리즈가 성공할 수 있는 요인이 갖춰졌습니다. 세대를 아우르는 짜릿한 모험과 액션은 많은 관객들을 흥분시켰습니다. 지금에야 워낙 이에 영향받은 시리즈가 많기 때문에 혹시 찾아본다면 실망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시 한정된 기술과 제작비를 가지고 만들어낼 수 있는 온갖 창의적인 방식이 총동원된 영화임에는 틀림없었습니다. 일단 베스트 리스트는 이 영화로 시작!
9위. <미지와의 조우 Close Encounters of the Third Kind>(1977)
스필버그 감독이 지금껏 만들어온 영화들은 역사를 기반으로 한 영웅 스토리(그리고 전쟁 영화), 미지의 존재와 만나는 SF 장르로 크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아직 <이티>를 만들기 전의 스필버그 감독은 이전까지는 본 적 없었던 '진짜같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외계인과 인간이 만나는 장면을 <미지와의 조우>에서 보여줬지요. <이티>의 전신이 되는 외계인의 모습도 흥미롭고요. 외계인과 지구인들이 빛과 음악을 이용해서 소통하는 장면은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한편으로 이 영화는 '가장'. '아빠'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할 겁니다. UFO의 존재에 노출되어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가정을 힘들게 하면서도 미지의 부름에 따를 수밖에 없었던 한 남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훗날 <우주전쟁>이라는 영화에서도 유사한 테마를 찾아볼 수 있어요. <스타워즈> 시리즈의 음악감독 존 윌리엄스의 음악도 영화의 수준을 한 차원 높여줍니다. 스필버그 우주 세계의 시작 같은 영화라 할 수 있지요.
8위. <에이 아이 A.I. Artificial Intelligence>(2001)
너무나 아름답고 슬픈 SF 동화, <에이 아이>는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드라마입니다. 인간이 될 수 없는 로봇 소년이 인간보다 더 인간다움에 대해 고민하는 이야기랄까요. <이티>가 지구인의 관점에서 외계인을 떠나보내는 이야기였다면 <에이 아이>는 이티의 관점에서 지구를 이해해 보려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스티븐 스필버그의 SF 감성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살아숨쉬고 있음을 증명한 영화입니다.
그리고 또 이 영화는 스필버그 감독과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만남을 이뤄준 영화이기도 합니다. ‘SF 버전의 피노키오’ 이야기를 구상하고 있었던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자신의 오랜 숙원 사업을 들고 1990년대 중반에 직접 스필버그 감독을 찾아가 합작을 제안합니다. 하지만 큐브릭 감독이 안타깝게도 먼저 세상을 떠났죠. 스필버그 감독은 큐브릭 감독이 남긴 메모와 스케치 등을 기반으로 큐브릭 감독 영전에 헌정하는 <에이 아이>를 내놓습니다. <미지와의 조우>와 <이티>를 거쳐 이 영화에 이르기까지 스필버그 SF 영화를 연이어 보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지금은 어쩌다가 역변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아역 배우 할리 조엘 오스먼트의 열연이 돋보였기도 했죠.
7위. <워 호스 War Horse>(2011)
이 영화의 감동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전쟁의 비극을 뜷고 살아남은 말과 인간의 위대한 우정, 정도의 표현은 너무 평범합니다. 가난한 농장에서 태어난 명마 조이의 산전수전은 그 규모 면에서 어떤 비슷한 영화도 떠올리기가 쉽지 않아요. 전쟁터에 끌려갔다가 적군의 손에 들어갔다가 다시 포로에서 민간인, 다시 적군에서 아군 진영으로 돌아가기까지, 심지어 자신과 끝까지 우정을 잃지 않은 알버트와 다시 만나는 여정은 웅장하고 숭고하게 느껴집니다. 연극으로도 만들어진 이 원작소설을 영화화하겠다 결심한 건 바로 그 방대한 이야기에 끌렸기 때문입니다.
할리우드 최고의 스턴트 말 배우 파인더(<씨비스킷>, <노 맨스 랜드> 등)의 열연이 아니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을 명장면이 꽤 많습니다. 스필버그 감독은 종종 두 편의 영화를 비슷한 시기에 같이 내놓고는 하는데 이 영화로 필름에 찬사를 바치더니 <틴틴: 유니콘호의 비밀>에서는 최첨단 CG, 촬영 기술로 이뤄진 영화를 만들었죠. 컴퓨터나 그린 스크린 앞에서만 영화를 만드는 게 재미없었던 걸까요? <워 호스>는 당대 최고의 기술력을 총동원해 영화를 만들던 스필버그 감독이 고전 영화의 향취를 제대로 보여준 영화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게 스필버그의 마지막 걸작이 아니라는 것이요. 아직 이야기할 영화가 많습니다.
6위. <라이언 일병 구하기 Saving Private Ryan>(1998)
제 71회 아카데미 시상식 감독상, 촬영상, 편집상, 음향편집상, 음향효과상 수상작으로 증명된 영화의 완성도뿐만 아니라 애국의 정서가 심하게 느껴진다는 거부감도 무시할 수 없는 영화입니다. 감독의 연출력은 덧셈, 뺄셈의 저울질이 정확하다고 봅니다. 혐오하거나 혹은 옹호하지도 않으려 합니다. 그저 자기 할 일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려 하는 것이죠. 결국 사람이 아니라 '미국인'을 보여주게 되더라도 말이지요.
아무튼 전쟁 영화 역사에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이룬 것이 여럿 있다면, 그중 첫째는 분명히 '리얼리티'일 것입니다. 이 영화는 전쟁 영화의 리얼리티에 대한 관객의 눈높이를 하늘 높이 올려버린 영화죠. 30여 분에 달하는 영화의 첫 장면 전투신의 연출 기법과 정서는 이후 만들어진 거의 모든 전쟁영화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밀리터리 덕후 스필버그 감독의 능력이 집약된 영화인 것입니다.
5위. <쥬라기 공원 Jurassic Park>(1993)
10편의 영화를 선정할 때 정확한 순위는 모르겠지만 무조건 상위권에 올려 놓고 싶은 영화였습니다. 그만큼 스필버그 월드의 대표적인 작품이죠. <쥬라기 공원>보다 더 좋은 영화들이 많다는 게 충격입니다. 아무튼 <쥬라기 공원>은 상업적으로도 대성공을 거뒀고, 덕분에 수많은 관객들의 마음에 영화적 에너지를 불어 넣어줬죠. 무슨 말인고 하니, 소년 소녀들의 마음에 큰 활력이 되어준 영화라는 겁니다. 그 영화가 꾸고 있는 꿈의 크기가 완성도로 이어진 훌륭한 사례인 것이죠.
그리고 한 가지 유념할 사실. 아직 영화를 보지 못해 가족 모험 영화라고 오해할 관객들을 위해 알리자면, <쥬라기 공원>은 무시무시한 당대 최고의 호러 영화 중 한 편이라는 사실을 강조해봅니다. 상상만으로도 무서웠던 랩터와의 주방 추격 장면 등은 정말 공포 그 자체입니다.
4위. <스파이 브릿지 Bridge of Spies>(2015)
배경과 주제 등을 놓고 봤을 때 스필버그 전쟁 영화의 범주에 들어갈 <스파이 브릿지>는 스필버그 감독 영화의 주요 테마인 '원맨쇼'가 핵심입니다. 농담처럼 표현했지만 오직 한 인물이 사건의 중심에서 고군분투하는 구조는 스필버그 감독이 자주 애용하는 방식이고요.
<스파이 브릿지>는 캐릭터 영화로서 훌륭한 미덕을 두루 갖춘 걸작입니다. 올해로 칠순 잔치를 할 나이에 여전히 이런 작업을 하고 있는 스필버그 감독이야말로 대단한 사람이죠. 그 뚝심이 기술의 혁신이나 과거의 에너지로 뒤덮인 영화들보다 상위에 올려놓게 된 기준입니다. 최신작이기 때문에 줄거리 소개 등은 생략하겠지만 이 영화가 4위에 오른 이유는 '기술'을 압도하는 이야기의 스펙터클에 있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에 각색 작업이 어려웠을 것이나 스필버그 감독 영화 같지 않게 국가 시스템에 직접적인 공격을 가하기도 하는 등 꽤 과감한 영화로 완성됐습니다. 역시나 결말은 스필버그 특제표 감동.
이제부터는 스필버그 영화 중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영화 3편을 꼽겠습니다.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늘 생각하고 있는 리스트인 것이죠.
3위
<죠스 JAWS>
(1975)
꿈 많던 초짜 감독 스필버그의 무모함이 만들어낸 초기 걸작 <죠스>의 위대함에 대해서는 몇 가지 소개한 다른 글이 있습니다. ('바다 호러 원조 <죠스> 제작 비하인드 속 스필버그의 도전정신') 감독 스스로 "용기와 어리석음이 만들어낸 영화"라고 했던 <죠스>는 블록버스터 영화의 시초입니다. 당대 제작, 촬영, 배급, 개봉, 흥행 모든 면의 판도를 뒤흔들어놨을 정도죠. 스필버그 감독이 언제나 '꿈'의 순수함을 가장 강조하듯 스필버그 자신의 '꿈'으로 뒤범벅된 영화를 3위에 꼽을 이유는 충분해 보입니다.
2위
<우주전쟁 War of the Worlds>
(2005)
보자마자 걸작, 엄지를 척 하고 올린 영화입니다. 스필버그 감독이 21세기 테러에 관해 그린 잔혹한 SF 동화. 이렇게 영화를 한 줄로 요약할 수 있을 듯해요. 그동안 그의 많은 연출작에서 보아왔던 아빠와 아들 이야기의 변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 영화 자체가 리메이크 영화이긴 합니다.)
다코타 패닝이 연기하는 딸 레이첼이 다른 영화 속 소션 소녀들과는 다르게 일종의 스트레스를 유발시키는 캐릭터임과 동시에, 스필버그 감독이 줄곧 영화에서 강조했던 '미지의 존재와의 만남'을 잔인하게 비틀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죠. 구조적으로는 본인의 초창기 영화 <미지와의 조우>와 조우하고 있기도 하고요. 같은 아버지와 외계인의 이야기이기도 하죠? 자신의 영화 세계를 스스로 돌아보면서 개척도 하고 개선도 하는 모습이 바로 지금도 스필버그 감독을 거장이라 부르는 이유일 겁니다.
1위
<이티 E.T. the Extra-Terrestrial>(1982)
드디어 대망의 1위. 스필버그 상상력의 가장 순수했던 정수를 담은 영화가 바로 <이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과감하게 1위에 제목을 올리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우리가 꿈과 현실의 갈등 속에서 매순간 고민하며 살아야 할 때, 영화를 찾게 되고 영화를 좇게 되고 영화에 의지하게 될 때의 그 마음가짐 있잖습니까? <이티>는 그것이 가치 있다고 말하는 영화, 사랑을 표현한 영화입니다.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는, 그리고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변치 않는 꿈의 주인공은 스필버그 감독이었습니다. 그는 데뷔 초부터 지금까지 <미지와의 조우>, <에이 아이>, <우주전쟁> 등의 영화를 거쳐 가장 최근에 연출한 <마이 리틀 자이언트>에 이르기까지 흔들림없는 자기 세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소년이여, 영원하라
꿈 많은 할아버지 스필버그 감독의 베스트 10 리스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여러분만의 베스트 리스트를 만들어보는 것도 훈훈한 연말의 좋은 유희가 될 수 있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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