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가 함께 영화를 봅니다. 멜로물을 보며 연애 시절을 떠올리고, 육아물을 보며 훗날을 걱정합니다. 공포물은 뜸했던 스킨십을 나누게 하는 좋은 핑곗거리이고, 액션물은 부부 싸움의 기술을 배울 수 있는 훌륭한 학습서입니다. 똑같은 영화를 봐도 남편과 아내는 생각하는 게 다릅니다. 좋아하는 장르도 다르기 때문에 영화 편식을 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편집자주-
“상여금 나온다던데, 남편한테 말할 거야?” 직장인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은 단연 보너스다. 연말이 다가오며 뒤숭숭했던 마음은 통장에 꽂히는 액수만큼 사그라든다. 하지만 기혼자에게 보너스는 검고 달콤한 유혹이기도 하다. 보너스의 존재를 알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직장인 보너스의 불문율이 됐다.
“12월에는 어머님 생신이 있지. 아, 막내 시누 취업 선물도 준비해야 하는데. 참 자기야, 이번 달에 대학 후배 결혼하다고 했지 않아?” 계산 끝에 남은 돈은 고작 몇십만 원. 부부 사이에 비밀은 없는 거라 남편에게 솔직하게 털어놨던 과거의 내가 후회되는 순간이다. 결혼하기 전 보너스는 고스란히 나의 품위 유지비에 쓰였는데, 장바구니에 묵혀둔 코트를 할부 없이 살 수 있는 기회는 훨훨 날아가 버렸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영화 <패밀리맨 : The Family Man>은 주인공 잭의 호화스러운 삶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잭은 결혼을 하지 않은 인생의 상위 1%를 보여준다. 좋은 직장, 좋은 차, 좋은 옷 그리고 항시 대기 중인 여자들. 사실 잭에게도 결혼의 기회는 있었다.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케이트와 말이다. 13년 전 잭은 영국의 한 은행 인턴으로 뽑혔다. 케이트는 가지 말라고 잭을 잡지만 잭은 사랑보다 성공을 선택한다. 그날의 선택 때문일까. 잭은 월스트리트에서 유명한 투자 전문 기업 사장님이 된다. 물론 잭의 사랑 케이트는 옆에 없다.
나도 이직의 꿈을 꾼 적이 있다. 대학을 서울로 못 갔으니 직장은 서울로 가고 싶었다. 사실 기회도 몇 번 있었다. 하지만 모두 결혼 한 이후였다. 대구에서 일하는 남편을 두고 차마 떠날 수는 없었다. 미우나 고우나 지금 다니는 직장에 충성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잭처럼 결혼 전에 기회가 왔다면 어땠을까. 결혼을 미루고 서울로 갔을까. 아니면 나의 사랑 남편을 옆에 두는 쪽을 택했을까.
사람은 자신이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후회를 한다. 결혼을 했다면 미혼일 때의 나를 상상해 보고,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기혼일 때의 나를 상상해 본다. 하지만 영화는 상상에만 그치지 않는다. 주인공 잭은 자신이 가보지 않은 삶을 경험해 볼 기회를 얻는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찾아온 뜻밖의 선물
12월 24일 퇴근길, 잭은 혼자 먹을 케이크를 사러 식료품 가게에 들른다. 그리고 그곳에서 복권을 바꾸러 왔다가 강도로 돌변한 부랑자를 만난다. 잭은 흥분한 부랑자에게 다가가 그 복권을 자신이 사겠다고 말한다. 부랑자는 흔쾌히 복권을 건네고 아슬아슬한 상황은 정리된다. 하지만 잭은 몰랐다. 그 복권이 잭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 놓을 것이라는걸.
다음날 아침 잭은 불편함을 느끼고 잠에서 깬다. 그런 잭의 품에는 누군가 안겨있다. 잭에게 “여보”라고 부르는 여성의 모습은 그가 그간 만나왔던 원나잇 상대와는 거리가 멀다. 낡고 딱딱한 침대 매트리스도 영 불편하다. 거기에다 화룡점정. 자신을 아빠라 부르는 두 아이와 침을 질질 흘리는 개 한 마리 까지 등장한다.
놀란 잭은 부리나케 집에서 도망쳐 나온다. 호주머니 속 차키 버튼을 누르자 잭이 타던 페라리가 아닌 몇십 년은 족히 돼 보이는 고물차가 노란빛을 내며 응답한다. 곧장 원래 살던 뉴욕의 고급 아파트로 돌아갔지만 문전 박대를 당한다. 회사에도 잭의 자리는 없다. 당황하는 잭에게 가게에서 보았던 부랑아가 나타났고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전해 듣게 된다. 지금은 케이트와 함께하는 삶을 택했을 때의 인생을 경험하는 것이고, 다시 돌아가는 것은 잭의 손에 달렸다는 것이다. 이런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기고 부랑아는 사라진다. 잭은 하는 수없이 뉴저지의 낯선 가족에게로 돌아온다.
그렇다. 침대 옆에 누워있던 여자는 옛 연인 케이트고, 아이들은 그 둘의 사랑의 결실이다. 그렇게 영화다운 판타지가 시작된다. 부자이지만 싱글로 살아가는 잭이 빠듯하지만 가장으로 살아가는 잭으로 뒤바뀌는 순간이다.
성공한 삶은 가족과 함께 하는 것
이제부터는 화려했던 뉴욕 생활과 너무나 다른 삶이 펼쳐진다. 알람소리 대신 아기의 울음소리에 잠에서 깨고, 커피향 대신 똥기저귀 냄새를 맡으며 출근 준비를 한다. 직업도 잘나가던 투자 회사 사장에서 타이어 판매원으로 바뀌었다. 합병이나 인수를 이야기하던 잭은 타이어 가게가 새로운 거래처를 뚫었다는 동료의 말에 그저 호응해 줘야 하는 위치가 됐다. 퇴근 후에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강아지 산책을 시킨다. 그리고 아이들이 잠들면 케이트와 거사를 치르는데, 그마저 로망도 무드도 없이 속전속결이다.
기혼자의 애처로움은 백화점 씬에서 극에 다다른다. 잭은 양복점에서 옷을 한 벌 입어보는데 전직(?) 사장님답게 옷빨이 기가 막히다. 케이트도 “정말 잘 어울린다"라며 극찬한다. 하지만 가격표를 보고는 이내 표정이 싹 굳는다. 그래도 잭은 물러설 수 없다. 양복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 “지금 내 인생이 어떤지 알아? 아이들 등교 시키고 8시간 타이어 팔고, 끝나면 애들 데려오고 강아지 산책 시키고. 운 좋게 6시간 자고 일어나면 똑같은 하루가 반복돼. 나를 위한 시간은 없어. 난 지금보다 천 배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었어”
이쯤 되면 비혼 장려 영화인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잭이 쏟아내는 대사들이 왠지 낯설지가 않다. 나는 남편보다 늦게 출근한다. 여유로운 오전 시간에 빨래도 하고 청소기도 밀고 여차하면 화장실 청소까지 해치운다. 출근이 늦은 만큼 남편보다 퇴근도 늦다. 그게 문제다. 집에 돌아왔을 때 간혹 빨래가 걷어져 있지 않거나 설거지가 쌓여 있으면 짜증이 확 난다. 그럴땐 잭과 비슷한 대사가 절로 나온다. “퇴근하고 좀 쉬고 싶은데. 집 좀 제대로 치워놓으면 안 돼? 나라고 오전에 청소하고 싶은 줄 알아? 나도 내 시간 좀 가지고 싶다고”
그렇다고 남편이 집안일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가사 분담은 공평하게 이뤄지고 있다. 대체 뭐가 문제일까. 나는 자꾸 결혼 전의 내 모습과 지금의 나를 비교하고 있었다. 결혼 전에는 엄마가 해주는 밥 먹고, 엄마가 빨아주는 옷을 입기만 하면 됐는데.
잭은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는 일을 멈춘다. 사랑하는 부인과 두 아이가 있는 현실만을 바라본다. 그러자 비로소 행복이 찾아왔다. 물론 더 나은 현실을 살기 위한 노력은 한다. 그로 인해 투자 회사에 취업해서 잘 나갈 수 있는 기회도 얻는다. 하지만 케이트가 원치 않자 그마저도 자발적으로 포기한다.
두 인생의 갈림길.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잭이 행복해지자 잔인하게도 영화는 잭을 원래 상태로 되돌려 놓는다. 잭은 다시 펜트하우스에서 잠을 깨고, 페라리를 타고 월스트리트 최고 투자 회사로 출근을 하게 된다. 두 인생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도 없다. 후자의 인생은 경험일 뿐이니, 현실의 잭만이 유효할 뿐이다. 잭은 이제 적극적으로 나선다. 곧바로 케이트를 찾아간다. 케이트 또한 잭 못지않게 성공한 여성이 돼 있었다. 결혼을 하지 않은 두 남녀는 각자의 인생을 멋지게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잭과 케이트는 성공한 삶은 잠시 접어두고 서로를 택하는 결정을 한다.
이 영화는 사실 공평하지 못하다. 러닝타임만 봐도 알 수 있다. 솔로인 잭의 모습은 잠깐이고, 가족과 함께하는 잭의 모습을 훨씬 더 오래 비친다. “가족이 있는 삶이 더 행복할 걸?”이라는 '답정너'식 이야기 같기도 하다.
영화가 끝나고 남편에게 물었다. 잭의 시점이 바뀌었다면 어땠을까. 고물차를 타다가 페라리를 타게 되고, 타이어 판매원으로 일하다 유명 투자 회사의 사장으로 살아가게 됐다면 말이다. 아기의 울음소리에 밤잠을 설치다가 고급 매트리스에서 꿀잠을 자게 되면 그 황홀한 맛을 과연 포기할 수 있을까. 하지만 뒤따르는 남편의 말에 코끝이 찡해졌다.
수십 번의 인생을 살아보게 되더라도 어찌됐든 나는 자기랑 결혼할래. 그게 내 행복이야
매일신문 임소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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