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슈퍼맨의 등장과 함께 슈퍼히어로 코믹스의 시대가 열렸다. 히어로들은 처음에는 노상강도들이나 상대하다가 1960년대에 대적할 만한 적수인 슈퍼 빌런들이 처음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10년이 지나 1970년대에 이르면 슈퍼히어로 만화들이 사회적 문제를 주제로 다루는 등 질적으로 깊이 있는 변화를 보였다.

<병 속의 악마>는 1970년대 말 슈퍼히어로 만화 장르가 얼마나 성숙해졌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아이언맨이 최강의 적수인 자신과의 싸움을 하는 과정을 다루는 이 이야기는 많은 평론가들과 팬들이 최고의 아이언맨 스토리로 꼽을 정도로 유명하다. 이 스토리에도 나름의 탄생 비화가 있다.

1970년대는 단연코 엑스맨의 시대였다. 1975년에 새로운 멤버로 다시 태어난 엑스맨은 이후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만화책 시장을 완전히 평정한다. 등장과 동시에 판매 부수는 급상승했고 경쟁사 DC 코믹스의 간행물 중에도 엑스맨의 판매부수와 비견할 만한 타이틀은 전혀 없었다. 1980년대로 넘어오자, <다크 피닉스 사가> 등의 홈런 히트를 기록한 이야기들이 다수 연재되었고, 엑스맨 관련 만화들의 판매 부수는 대폭발하여 연일 기록을 경신했다. 심지어 ‘엑스맨 지수’라는 지표가 생길 정도였다. 마블 사의 간행물 중에 엑스맨과 그나마 비견할 만한 타이틀은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정도뿐이었는데, 그마저도 큰 폭으로 뒤쳐저 있었다. (역시 엄청난 판매고를 올리던 만화판 <스타워즈>는 엄밀히 따지자면 슈퍼히어로물이 아니므로 논외로 한다.)

이러한 상황이니 마블 사는 엑스맨의 제작과 마케팅에 인력을 최대한 배분할 수밖에 없었고, 인기가 없는 타이틀들은 자원 분배 차원에서 정리될 위기에 놓였다. 당시 밥 레이턴, 데이빗 미컬라이니, 존 로미타 주니어 등이 연재를 맡고 있던 <인빈서블 아이언맨>은 판매 부수가 거의 꼴찌에 가까웠다. 1970년대 말에 아이언맨은 인기 캐릭터가 아니었고, 연재 내용도 점점 지지부진해지며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결국 편집국은 1979년 중반, <인빈서블 아이언맨>을 잠정적 폐간하기로 결정한다. 1979년 11월호인 128호를 마지막으로 시리즈를 일단 중단시키고, 아이언맨이라는 캐릭터는 어벤저스 팀 안에서 또는 게스트 등장 정도로만 활용하기로 결정했다. ‘인빈서블 아이언맨’의 창작팀은 해산하는 것으로 예정되었고, 각 작가들은 각각 다른 타이틀에 배정되기로 했다.

이러한 결정이 내려진 것은 종간 예정 불과 몇 개월 전이다. 제작진은 폐간될 것이라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으나, 나름 애정을 갖고 연재하던 타이틀이었기에 어떻게 피날레를 장식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닥터 둠과 같은 초강력 적수와 싸우게 할 것인가? 뜬금없이 강력한 적수를 등장시키는 것도 부자연스러웠다. 무엇보다 식상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 데이빗 미컬라이니는 1970년대 초반부터 인종차별 문제 등 사회적 이슈 등을 심도있게 다루던 <그린 랜턴> 등의 만화들에 고무되어 있었다. 그는 밥 레이턴과 얘기하면서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 가장 어렵다고 하지 않던가?’라는 얘기가 나왔다. 결국 이들이 내린 결정은 토니 스타크를 내면의 악마와 싸우게 하는 것, 즉 그를 오래 전부터 괴롭히던 알코올 중독과 대면하게 하는 것이었다. 물론 강력한 슈퍼빌런이 등장해서 화려한 육탄전을 벌여야 판매 부수가 올라갈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차피 폐간될 타이틀이 아니던가?

그들은 ‘인빈서블 아이언맨’의 마지막 호에 편집부의 간섭 없이 자신들이 그리고 싶었던, 깊이 있고 심도 높은 이야기를 그려 보기로 한다.

<인빈서블 아이언맨> 128호의 표지에는 거울에 비친 초췌한 자신의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얼핏 봐도 심각한 금단 현상에 시달리는 토니 스타크의 클로즈업이 등장한다. 항상 빌런들과 치고받고 싸우는 장면만 등장하던 이전 표지들과는 너무 달랐다. 짧은 24페이지의 분량 동안, 토니 스타크는 롤러코스터를 타듯 급상승과 급강하를 반복하는 자신의 감정, 그리고 자신을 유혹하는 ‘병 속의 악마’와 싸운다. 짧은 이야기이지만 확실한 기승전결이 갖추어져 있고, 데이빗 미컬라이니의 심리 묘사는 깊이 있으며, 존 로미타의 그림은 수려했다. 읽고 나서 충분한 감동과 여운을 느낄 만한 스토리였던 것이다.

독자들과 비평가들은 지리멸렬한 스토리가 이어지던 <인빈서블 아이언맨>에 갑자기 이런 수준 높은 스토리가 등장하자 깜짝 놀랐다. 128호는 예상 외로 매우 잘 팔렸고, 1980년에는 작가들이 뽑은 ‘최고의 단일 스토리’ 상을 수상하는 영예도 거머쥐게 되었다.

토니 스타크가 알코올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듯이, 제작진은 저조한 판매 부수라는 적과 싸워 뜻하지 않은 승리를 거두었고 모두에게 해피 엔딩이 기다리고 있었다. 폐간은 취소되었고, 다음 달에 129호가 발간되게 된다.

<병 속의 악마>는 1984년 처음 단행본으로 발간되었는데, 단행본 제목은 원래 ‘파워 오브 아이언맨’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병 속의 악마’는 128호의 부제목이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스토리가 유명해지면서 1990년대 이후 출간된 단행본부터 ‘병 속의 악마’로 제목이 바뀌었다.

단행본을 읽다 보면, 앞에서 언급했듯이 128호의 내용이 너무 훌륭하기 때문에 나머지 분량은 지면 때우기 정도로 느껴질 정도다. 슈퍼히어로 만화의 핵심인 치고받고 싸우는 내용이 전혀 없음에도 더 긴장감과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마지막 3페이지가 백미이긴 하나, 이후에 수많은 작가들에 의해 오마주된 표지, 그리고 햄릿을 연상시키는 첫 페이지의 구성부터 무언가 다르다는 인상을 준다. 이 단행본을 처음 읽었을 때를 비유하자면, 그저 그런 필러 곡들로 가득찬 앨범 말미에 깜짝 놀랄 만한 대히트 명곡이 들어 있는 느낌을 받았다. 그냥 명곡이 아니라 전주부터 ‘아, 이 곡은 뭔가 다르다’고 느끼게 하는 정도의 명곡 말이다. (<병 속의 악마>는 국내에도 출간되어 있다.)

<병 속의 악마>는 출간된 지 30년도 더 되었지만 아직도 이를 능가할 만한 아이언맨 스토리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에서는 <아이언맨 2>에서 토니 스타크의 알코올 중독과 관련된 내용을 중반에 다루기는 하나, 많은 팬들에게 좋은 주제를 낭비했다는 혹평을 얻었다.


그래픽노블 번역가 최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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