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시민 케인>을 안 볼 수 있죠?"
"그러는 당신은 <사운드 오브 뮤직> 봤어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브래드 피트, 마고 로비가 나눈 대화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브래드 피트는 <사운드 오브 뮤직>을 본 적이 없고, 마고 로비도 <시민 케인>을 안 봤다며 놀림을 당했다. '고전'이나 '명작'이라는 수식을 단 채 오래도록 칭송되는 영화들은 많지만, "그 영화 봤어?"라는 질문에 이들처럼 우물쭈물해 본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영화를 사랑하는 당신에게 묻는다. 혹시 당신에게도 안 봤다기엔 너무 많은 걸 알고 있고, 봤냐고 물으면 고개를 끄덕일 수 없는 영화들이 있는가? 그런 고전 혹은 명작들을 소개하는 '솔아안 시네마'로 안내한다.
* 영화 <메멘토>의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오늘의 '나'는 과거 기억들의 집합체다. 조상들의 기억이 각인된 DNA를 품고 태어났다는 생물학적 관점을 차치해도 마찬가지다. 당연하게 아침에 눈을 뜨고, 집 욕실의 위치와 그곳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떠올리며, 회사에 늦지 않도록 집을 나서 역으로 향한다. 이 일련의 과정과 만나는 이들의 얼굴이 익숙하지 않다면,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생존에 곤란을 겪을 것이다. 결국 기억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한 자기 보호 행위의 일환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인간이 기억을 발밑에 둔 채 삶을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 능동적으로 인간을 조종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심장을 멈추게 했다가 다시 뛰게 할 수 없듯, 기억은 마음대로 넣었다 뺄 수 있는 게 아니다. 사실의 파편들을 기억으로 완성하기 위해서는 사진과 기록 같은 보조 수단도 필요하다. 이는 기억이 곧 소유자에 의한 가공품임을 의미한다. 인간은 기억을 가공하며 수집한 다수의 실체적 증거들로 자신의 기억이 사실이라고 믿어 버리곤 하는데, 그조차 오염된 증거일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영화 <메멘토>는 이토록 복잡한 기억과 사실 사이의 얽힘을 한 선행성 기억상실증 환자의 행동으로 풀어냈다. 선행성 기억상실증이란 말 그대로 특정한 시점 이후 새롭게 마주한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질병이다. 정확히는 이 병을 앓는 사람들은 단기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바꿀 수 없다. 이를테면 선행성 기억상실증에 걸리기 전 운전을 할 줄 알았던 사람이 발병 후 운전을 못 하게 되는 건 아니지만,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기억하지 못할 수 있는 것이다. 주인공 레너드(가이 피어스)는 아내가 집에 든 강도에게 강간 살해당한 사건 이후의 경험을 10분 이상 기억할 수 없다. 또 자신이 그러한 '상태(Condition)'라고 믿고 있다.
레너드는 자신의 기억 능력과 아내의 목숨을 앗아간 강도를 쫓고 있다. 사건 당시 경찰은 기억상실증 환자인 레너드의 증언을 믿어주지 않았고, 그로 하여금 사적 복수를 감행하게 했다. 하지만 10분에 한 번씩 기억을 잃는 레너드에게 사건들 다시 조사하며 얻는 새 정보들은 금세 날아가 버린다. 그는 정확한 기억을 위한 습관들을 만든다. 즉석 사진의 뒷면에 적힌 메모 필적이 자신의 것인지 확인하고,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내용들은 몸에 문신으로 새긴다. 또 사람과 대화해야 할 때는 전화 대신 직접 눈을 보고 한다. 과거 레너드가 보험조사관으로 일할 때 피보험자들의 사기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만든 습관이다. 그리고 이는 사실보다 레너드라는 한 인간의 기억과 감각에 의존하는 습관이기도 하다.
레너드의 손등에는 '새미 젠키스를 기억하라'는 문신이 새겨져 있다. 새미는 사고로 레너드와 같은 병을 앓은 환자인데, 레너드가 아내를 잃기 전인 보험조사관 시절 만난 인물이다. 즉 레너드의 머릿속에 새미의 기억은 아내의 죽음만큼 멀쩡히 남아 있어야 한다. 그래서인지 레너드는 자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새미의 이야기를 한다. 새미와 그의 아내는 사고 보험금을 받으려 했지만, 선행성 기억상실증의 발병 원인이 뇌 손상이 아닌 심리적 영향이라는 레너드의 판단 때문에 돈이 지급되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레너드는 이 이야기와 함께 늘 변명 같은 말을 한다. 자신은 단지 새미의 기억이 손실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험금을 줄 수 없다고 했는데, 새미의 아내는 '새미가 돈을 얻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고 한 것처럼 믿었다고.
그러나 새미의 아내는 진짜 사실을 원할 따름이었다. 레너드의 말처럼 남편의 병이 심리적 상태 때문이라면 노력을 해서 나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새미는 낫지 않았고, 아내는 마지막 실험을 한다. 과거 새미는 당뇨병 환자인 아내에게 일정한 시각에 인슐린 주사를 투여했는데, 발병 후에는 "주사 놔 줄 시간이다"라는 말을 신호로 했다. 새미의 아내는 이 신호를 짧은 시간 반복했다. 만일 남편이 제정신이라면, 인슐린 주사를 계속 놓았을 때 아내가 죽을 것이란 걸 알 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미는 직전의 상황을 기억하지 못한 채 계속 주사를 놓았고, 아내는 사망한다.
레너드는 아내를 죽인 범인을 쫓으면서도 줄곧 새미 부부를 주워섬긴다. 레너드의 친구임을 주장하며 그에게 당장 이 마을을 떠날 것을 종용하는 테디(조 판토리아노)에게도, 애인을 잃고 비슷한 처지의 레너드를 동정하며 사건에 대한 정보를 주려 하는 나탈리(캐리 앤 모스)에게도 말이다. 영화가 타임라인을 어지럽도록 교차시키며 달리는 사이, 테디는 레너드가 말하는 새미 이야기가 점점 흥미진진해진다고 언급한다. 이는 그 이야기가 레너드의 기억이라는 가공품이었음을 폭로하는 대목이다.
테디는 레너드가 선행성 기억상실증에 걸린 이후의 모든 사실을 품고 있는 존재다. 그는 레너드 집에 든 강도 사건을 담당한 경찰, 존 갬멀이었기 때문이다. 테디는 레너드의 아내가 당시 죽지 않았고 당뇨병 환자였으며, 보험 사기꾼이었던 새미에게는 아내가 없었다는 사실을 알린다. 그러니까 레너드는 머릿속에 자신의 사연과 새미의 보험사기극을 편집해 가공한 기억으로 살아왔던 것이다.
강도 역시 테디의 도움으로 이미 붙잡은 후였고, 그럼에도 복수를 위해 스스로 기억을 조작했으며, 아내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도 결국 자신의 선행성 기억상실증이었다는 사실까지 깨달은 레너드. 그에게 복수를 위한 기억 가공은 생존의 의의를 만들려는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테디의 폭로를 통해 기억과 함께 자신의 존엄성도 사라진 나날들을 보냈음을 알게 된 그는 이 뫼비우스의 띠를 끊어내기 위해 다시 기억하기를 택한다.
“영원히 꿈속을 헤매며 복수 놀이나 하라”는 테디의 조롱도 곧 사라진다. 레너드는 테디의 사진 뒷면에 '그의 거짓말을 믿지 말라'는 말을 적고, 그의 차량 번호를 몸에 새기기 위해 문신 가게로 향한다. 기억이 사라진 10분 후에도 이 증거들은 테디를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할 것이다. 테디를 제거하면 복수의 연쇄는 끝나고, 레너드는 불완전한 기억 속에서 또 다른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기억에 대한 집착 탓에 오히려 거짓에 노출됐던 레너드는 익숙한 생존 방식과의 결별을 선언하며 처음으로 돌아가려 한다. 차라리 용기에 가까웠던 레너드의 '기억할 결심'은 그래서 더 비장하고 인간적이었다.
칼럼니스트 라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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