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다큐멘터리에서 이런 말이 나옵니다.
'배가 항해 중이라면, 누군가는 키를 잡아야 한다.'
영화에서는 그 키잡이가 연출하는 감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리얼>을 비롯해 '감독 교체'로 구설수에 오른 영화들이 꽤 있는데요, 
키를 잡은 감독이 교체되는 이유, 무엇일까요?

바다 건너 할리우드에서는?

할리우드는 프로젝트 단위의 제작 시스템이 확실해서 의외로 감독 교체가 잦은 편입니다. 물론 촬영 도중보다는 사전 작업(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교체되는 경우가 많죠. 각본이나 연출의 범위 등의 문제로요.

갤 가돗과 패티 젠킨스 감독

<원더우먼>으로 여성 감독 흥행 1위를 기록한 패티 젠킨스, 이전엔 나탈리 포트만의 추천으로 <토르: 다크 월드>의 감독으로 내정된 바 있습니다. 하지만 두 달만에 하차하게 되는데요, 최근 그 이유를 밝혔습니다.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가 스튜디오에서도 원하는 영화가 된다는 확신이 필요했다. 슬프지만 하차도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난 그들이 준 각본으로 멋진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토르: 다크 월드>는 이후 앨런 테일러 감독의 연출로 완성됩니다.

<앤트맨> 역시 원래 <새벽의 황당한 저주> <뜨거운 녀석들>을 연출한 에드가 라이트가 수장이었습니다. 영화에 유쾌함과 장르적 스릴을 적극적으로 배합하는 에드가 라이트와 <앤트맨>은 잘 어울릴 것 같아 팬들의 기대가 높았죠.

<뜨거운 녀석들> 닉 프로스트, 에드가 라이트 감독, 사이먼 페그(왼쪽부터)

하지만 <앤트맨>은 페이튼 리드 감독이 완성시키게 됩니다. 대외적으론 '창작 견해 차이'가 교체 이유였습니다. 에드가 라이트 감독도 "마블 영화를 만들고 싶었지만 스튜디오 측이 '에드가 라이트 영화'를 원하는 게 아니었다. 이게 적절한 대답이"라고 설명했죠.

<앤트맨>은 이후 조 코니쉬 각본, 페이튼 리드 연출로 제작됩니다.

후에 밝혀진 내용은 이렇습니다. 마블은 <어벤져스>보다 <앤트맨>을 먼저 제작하려 했지만 에드가 라이트가 다른 영화 촬영을 위해 제작 연기를 요청했고, 그 와중 양측 협의하에 각본 수정이 이뤄졌죠. 이후 돌아온 에드가 라이트는 자신이 만들려던 그 작품이 아니라며 하차에 이르게 된 겁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공개되니 팬들 사이에서도 에드가 라이트의 과한 '창작욕'이 화근이었다는 의견이 주를 이뤘습니다.

에드가 라이트 감독은 결국 <지구가 끝장 나는 날> 제작으로 <앤트맨>은 하차, 대신 <베이비 드라이버> 개봉을 앞두고 있습니다.

두 작품 모두 디즈니-마블이란 거대한 스튜디오 아래 케빈 파이기라는 총괄 제작자가 있어서 상대적으로 감독 교체라는 강수에도 영화 제작이 원활했던 편입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사정이 조금 다릅니다.

한국 영화계의 2010년 초 '대격변'은?

<리얼>은 이전에 메가폰을 잡았던 이정섭 감독이 촬영 현장을 거의 마무리짓고 이후 이사랑 감독에게 바통을 넘겼습니다. 이사랑 감독은 "기획 단계부터 같이 했던 공동 작업이다"라고 설명했지만 영화의 평을 보면, 좋은 결과물은 아니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촬영 현장 스틸컷 / 공식석상 스틸컷(오른쪽 사진 가운데가 곽경택 감독)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감독 교체에도 "공동 연출"로 인정한 예입니다. 안권태 감독이 촬영을 어느 정도 마무리하고 곽경택 감독에게 연출권을 넘겼죠. 안 감독이 곽 감독의 조연출 출신이어서 그런 호흡이 가능했던 모양입니다.

5월에 개봉했던 <석조저택 살인사건> 역시 정식 감독이 촬영을 진행한 후 김휘 감독으로 교체됐는데요, <이와 손톱>이란 원작과 같았던 제목을 <석조저택 살인사건>으로 바꾼 것도 이 즈음입니다. 영화가 큰 관심을 받지 못해(ㅠㅠ) 최근 작품임에도 감독 교체 이슈에서 거론되지 않고 있기도 하죠.

'감독 교체'라는 사건만 놓고 보면 2010년 초 한국 영화계는 그야말로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이 즈음에 제작되던 영화 중 감독 교체를 겪은 작품만 해도 <스파이>, <미쓰GO>, <동창생>, <은밀하게 위대하게>, <표적> 등이 있습니다.

<원스텝> 시사회 스틸컷 (맨 좌측이 전재홍 감독)

이 과정에서 <풍산개>를 연출했던 전재홍 감독은 두 번이나 교체되는 아픔을 겪습니다. 먼저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키잡이'로 임명됐지만 제작사와의 일정 조율 문제로 장철수 감독이 이어받게 됩니다.

<은밀하게 위대하게> 장철수 감독, <표적> 창감독

이후 전재홍 감독은 <포인트 블랭크>의 리메이크인 <표적>에 연출자로 이름을 올릴 뻔했지만 이번에는 작품의 연출 방향이 제작사와 일치하지 않아 창감독에게 자리를 내주게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작품이 (비평적 관점을 떠나서) 690만, 280만 관객으로 흥행했으니 '감독 교체'가 반드시 '폭망'은 아닌 사례이죠.

촬영이 진행되던 중 감독이 바뀐 영화들도 적지 않습니다. <스파이>는 '미스터K'란 제목으로 이명세 감독이 연출을 맡게 됐죠. 그러나 제작사가 촬영본 확인 후 시나리오와 다른 것을 발견, 촬영 중지를 요청하고 결국 이승준 감독으로 교체하기에 이르렀죠.

이명세 감독과 <스파이>의 제작사 'JK필름'의 윤제균 감독

이런 상황에서 배우들과 스태프들만 촬영 도중 갑작스러운 공백을 겪고, 이후 이명세 감독의 하차가 보도되면서 제작사 측이 기자회견을 하는 등 골은 더 깊어졌습니다. 이후 이승준 감독이 완성한 <스파이>는 340만 관객을 동원했지만 촬영 지연으로 받은 피해 때문에 큰 이익을 낸 건 아니었다네요.

박철관 감독 / 정범식 감독

<미쓰GO>는 여러 번 촬영 중단된 끝에 감독이 교체됐습니다. 고현정이란 스타 배우의 상업영화 데뷔작에 유해진, 성동일, 이문식, 고창석이란 쟁쟁한 조연 배우들. 하지만 '기후 악화'를 이유로 촬영이 중단되고, 이후 정범식 감독의 건강이 악화돼 박철관 감독으로 교체되면서 촬영이 또 멈췄었죠. 결국 손익분기점도 넘지 못한 채 60만 관객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교체ing'인 영화들은?

<리얼>과 맞물리면서 화두에 오른 건 <자전차왕 엄복동>입니다. 이범수가 주연과 제작을 맡고 정지훈(비)이 <엑스맨> 신작 출연도 포기하고 뛰어든 영화죠. <누가 그녀와 잤을까?>와 <사랑의 대화>를 연출한 김유성 감독이 연출직에 앉았습니다.

하지만 촬영 도중 김유성 감독이 하차하고 <슈퍼스타 감사용>, <국가대표2>를 연출한 김종현 감독이 '자문 감독'으로 임명됐습니다. 제작사 측은 "김유성 감독이 100억대 영화 연출에 부담감을 느꼈다"고 발표했죠.

자문 감독으로 임명된 김종현 감독

이후 김유성 감독은 인터뷰 등을 통해 "제작사의 입김이 강해 연출권 침해가 심각했다"고 밝히면서 "억울한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심경을 전했습니다. 양측 다 각자의 사정이 있겠지만 네티즌들은 "<리얼>의 재림이다"라는 반응이죠.

할리우드는 최근 여러 작품에서 사전작업 도중 감독 교체 소식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데드풀 2>는 1편의 감독이었던 팀 밀러와 주연에다 제작까지 겸하는 라이언 레이놀즈와의 견해 차이로 <존 윅> 시리즈의 연출자인 데이빗 레이치에게 감독 자리가 넘어갔습니다.

<데드풀 2> 라이언 레이놀즈 인스타그램 사진 / 벤 애플렉 / <리브 바이 나이트>

인기도 높고 혹평도 많고, 그래서인지 DCEU(DC 확장 유니버스) 작품들의 감독이 교체되는 일이 많긴 합니다. <배트맨> 솔로 무비는 원래 벤 애플렉이 각본과 연출까지 담당했으나 최근 연출작 <리브 바이 나이트>가 혹평을 받으면서 자진 하차했죠. 다행히 이 공석엔 <혹성탈출:반격의 서막>의 맷 리브스가 들어왔습니다.

<플래시>는 세스 그레이엄 스미스(<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의 원작자)가 감독직으로 발탁됐다 이후 릭 파미아 감독(<도프>)으로 교체됐다가 그마저도 하차했죠. 연이은 감독 교체로 아예 제작 일정이 연기됐습니다. DC 영화의 팬으로서 이런 허술한 기획이 가끔 얄밉기도 합니다.

드라마 <플래시>와 <저스티스 리그>의 플래시.

<맨 오브 스틸>,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 <저스티스 리그>의 연출자이자 DCEU의 수장인 잭 스나이더. <저스티스 리그> 본 촬영이 끝난 5월, 지난 3월에 자신의 딸이 자살했다는 사실을 밝히며 조스 웨던 감독을 후임 감독으로 임명했습니다. (이때는 안티들마저 잭 스나이더의 '멘탈'에 놀라고 딸의 죽음에 안타까움을 표했죠.)

잭 스나이더 감독 / <저스티스 리그> 스틸컷

조스 웨던은 <어벤져스> 1편과 2편을 연출한 감독이니 일부 팬들은 잭 스나이더의 액션성과 조스 웨던의 스토리텔링이 좋은 시너지를 낼 거라고 기대하기도 했죠.

그러나 음악감독 교체(정키XL→대니 엘프만), 재촬영 현장 사진 등으로 '산으로 가는 거 아니냐'는 불안한 목소리도 커졌습니다. 다행히 DC 엔터테인먼트 제프 존스 회장이 "<저스티스 리그>는 잭 스나이더 작품"이라고 공식적으로 밝혀 논란은 조금 잦아들었습니다.

그래도 정키XL의 '원더 우먼' 테마곡을 생각하면 아쉽긴 합니다.

씨네플레이 인턴 에디터 성찬얼 

재밌으셨나요? 아래 배너를 눌러 네이버 영화를 설정하면 영화 이야기, 시사회 이벤트 등이 가득한 손바닥 영화 매거진을 구독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