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린 랜턴과 그린 애로우의 갈등을 암시하는 <그린 랜턴> 76호의 표지. 이들은 무엇 때문에 다투는 것일까? 예상치 못한 뜻밖의 이유가 있다.
화려한 쫄쫄이 옷을 입은 슈퍼히어로들은 1930년대부터 있었다. 하지만 1960년대 초, DC 코믹스와 마블 코믹스가 선의의 경쟁을 펼치며 다양한 히어로들을 쏟아내면서 슈퍼히어로의 전성기가 열렸고, 그들은 소년 소녀들의 마음과 주머니를 완전히 점령하였다.
얼마 전 개봉한 <레고 배트맨 무비>에서 볼 수 있듯 1960년대 히어로 만화는 명랑 만화에 가까운 면이 있었다. 배트맨은 루이스 캐롤 동화 속 ‘험프티 덤프티’나 몸에 달력을 붙이고 다니는 ‘캘린더 맨’과 같은, 실소가 터져나오게 만드는 적수들과 맞서 싸웠다. 어벤저스는 히어로들을 지면에서 지워 없애는 ‘지우개 인간’ 등의 황당한 빌런들과 티격태격했다. 유치함이 미덕이었던 아담 웨스트 주연의 <배트맨> TV시리즈가 인기리에 방영되기도 했다. 슈퍼히어로 만화를 소비하는 주된 대상이 아동/청소년 층이었기에 그랬겠지만 어쨌든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그런데 1960년대 말, 아동용 만화의 내용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일단 만화책을 보는 연령층이 확대되었다. 만화책을 보며 자란 아이들이 성인이 되었고, 만화는 호당 발행 부수가 백만 부에 육박할 정도로 저변이 확대되었다. 닐 아담스 등의 작가들이 등장하며 그림체는 점차 사실적이고 과감해졌다. 스토리도 한 권으로는 완결되지 않는, 길고 깊이 있는 내용들이 주가 되기 시작하였다.
만화 애호가들이 미국 만화 변천사를 나눌 때, 1970년대 초반 이후의 이 시기를 ‘브론즈 에이지'(황동기)라 칭한다. 1970년대 초반, 발행된 <그린 랜턴> 연재분은 브론즈 에이지의 시초로 인정받고 있다.
그린 랜턴은 1940년대에 만들어진 히어로다. 1950년대 말 이후부터 지금과 비슷한 모습으로 리부트되어 DC 코믹스의 간판 스타 중 하나로 활약하고 있었다. 지구에서도 활동하지만 우주를 주 활동 무대로 삼고 외계인들과 싸우거나 행성간 분쟁 등 스케일이 큰 사건들을 다루는 히어로였다.
1970년대가 찾아오자, DC 코믹스 편집장 줄리우스 슈워츠는 만화에 사회적 이슈를 넣어 독자층을 늘리겠다고 결심한다. 테스트용 타이틀로 그린 랜턴이 채택되었다. 그린 랜턴(할 조던)은 원래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히어로였지만, 편집부는 그린 랜턴에게 조수 또는 친구를 하나 붙여 함께 지구 곳곳을 여행하게 하면서 그린 랜턴이 세계의 사회적, 환경적 문제들에 대해 눈뜨게 된다는 컨셉을 기획했다. 그 친구로는 아마 같은 녹색 계열이어서였는지 그린 애로우가 선택되었고, 1970년 발간된 <그린 랜턴> 76호부터 이러한 컨셉이 적용됐다. 창작 팀은 작가 데니스 오닐과 닐 아담스였다. 이들 콤비는 위에서 언급했듯 사실적인 묘사로 일찍부터 팬들 사이에서 지지도가 높았다. 그리고 <그린 랜턴> 연재분으로 인해 훗날엔 거장으로까지 입지가 오르게 된다.
<그린 랜턴> 76호에는 미국 슈퍼히어로 만화 역사상 최초로 사회적 문제가 전면에 등장한다. 인종차별, 계급간 차별 등의 이슈는 1950년대 EC 코믹스에서도 다룬 적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 뉘앙스만 주는 약한 강도이거나 간접적인 방법을 통해서였다. 하지만 <그린 랜턴> 76호에서, 어떤 흑인 노인이 “왜 파란 피부, 주황 피부, 보라색 피부를 하고 있는 이들은 도와주면서, 검은 피부를 한 사람들은 신경쓰지 않느냐”는 돌직구 질문을 던진다. 이어서 그린 애로우는 그린 랜턴을 데리고 미국 곳곳의 어두운 지역들을 순회하면서 자신들이 살고 있는 도시의 문제를 그린 랜턴에게 일깨운다. 결국 <그린 랜턴> 76호의 표지는 '가디언들 말만 듣고 우주적 문제만 해결하려 하지 말고, 가까운 주변의 문제에 눈을 뜨라'는 그린 애로우의 호통을 의미한 것이다.
▲ 미국 만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장면 중 하나로 꼽히는 <그린 랜턴> 76호 속 흑인 노인 장면. 바로 이 한 페이지, 세 칸 분량의 짧은 내용 때문에 <그린 랜턴> 76호는 고전의 반열에 오른다. <그린 랜턴> 76호가 브론즈 에이지의 시작으로 명명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76호의 작가는 이후 DC 코믹스의 편집장 자리에까지 오르는 데니스 오닐이다. 그림 작가는 앞서 언급한 닐 아담스였는데, 이 콤비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사회적 이슈들을 전면적으로 다루었다. 이로부터 1년 뒤 발간된 <그린 랜턴> 85호는 표지부터 충격적이다. 그린 애로우의 사이드킥인 스피디가 정맥으로 헤로인을 주사하고 있고, 그린 애로우가 ‘약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당시 중독성 높은 마약류인 헤로인은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던 때였다. 헤로인이 메인스트림 만화에서 첫 등장한 사례이다. 비슷한 시기, 마블 코믹스에서도 2대 그린 고블린인 해리 오스본이 LSD를 복용하는 장면이 나오기는 한다. 그러나 헤로인이나 크랙 코카인은 중독성과 인체에 미치는 악영향의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청소년용 만화에 나오는 것이 괜찮은 건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게다가 업계 내 자체 검열 기관이었던 ‘코믹스 코드’의 인증도 받은 책이었기에 더더욱 그러하다.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공익성을 담은 내용이었기에 허용된 것이 아닐까 싶다.
▲ 그린 애로우의 장비를 팔아서 헤로인을 구입하고 있던 사이드킥 스피디. 마약 판매상이 제약회사의 CEO였다는 결말도 충격적이다.
경계선을 넘고 나니, 아동과 청소년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만화책은 성인도 즐길 만한 수준 높은 오락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후 마블과 DC의 만화에서도 HIV, 동성애, 성매매, 강도 높은 가정 폭력, 아동 성폭력 등 민감한 주제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린 랜턴은 라이언 레이놀즈 주연의 영화 <그린 랜턴: 반지의 선택>(2011)으로 영화화되기도 하였으나 평단과 관객의 혹평 속에 잊히고 말았다. 2020년 개봉이 계획되어 있는 <그린 랜턴 군단>(Green Lantern Corps, 가제)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다면, 훗날 위와 같은 내용도 영화로 다루어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그래픽노블 번역가 최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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