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이자 브랜드 ‘지방시’의 창립자인 위베르 드 지방시가 지난 3월 10일, 91살 나이로 타계했다. 17살 때 고향인 보베에서 파리로 넘어와 패션 디자인을 시작한 지방시. 25살이었던 1952년 본인의 디자인 하우스를 창립한 그는 당시 파리의 가장 젊고 진보적인 패션 디자이너로 이름을 떨쳤다. 지방시가 본격적으로 ‘세계적인’ 디자이너 반열에 오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건 바로 영화다. 1954년부터 약 10여년 동안 짧게나마 스크린에 제 감각을 수놓은 그. 영화사에 남은 지방시의 흔적들을 간단하게 모아봤다.


최초의 의상 협찬 브랜드가 되다

<사브리나>(1954)

오드리 헵번 주연 영화 <사브리나>(1954)는 특정 브랜드의 의상 협찬을 받은 최초의 영화다. 부잣집 운전기사의 딸 사브리나가 파리에서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세련된 모습으로 돌아오자, 주인집 형제들이 그녀에게 반해 삼각관계를 이루게 된다는 내용을 담은 로맨스 코미디. ‘사브리나’ 역을 맡아 세련된 의상을 찾고 있던 헵번은 당시 이름을 날리던 패션 디자이너들 대신 떠오르는 샛별이었던 지방시를 선택했다.

<사브리나>(1954)

스타덤에 올랐던 <로마의 휴일>(1953)이 개봉하기 전이었던 터라 무명 시절에 가까웠던 헵번. 그녀는 ‘미스 헵번’이라는 이름으로 의상을 의뢰했다. 당시 지방시는 그녀가 ‘캐서린 헵번’이 아닌 ‘오드리 헵번’이라 당황하기도 했다고. 당시 첫 컬렉션을 마치고 두 번째 컬렉션을 준비하던 지방시는 직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작업을 거절했지만, 그의 첫 컬렉션 의상을 보고 단번에 반한 헵번이 다시 한번 의상을 부탁하며 지방시의 의상 협찬이 이뤄질 수 있었다. <사브리나>는 헵번을 패션 아이콘으로 굳힌 영화임과 동시에 지방시의 이름을 널리 알린 영화가 됐다. 영화 속에서 헵번이 입었던 팬츠와 슈즈는 각각 ‘사브리나 팬츠’, ‘사브리나 플랫’이라 불리며 유행의 중심에 섰다. <사브리나>는 제27회 아카데미 의상상을 수상했다.

<사브리나>(1954)
사브리나

감독 빌리 와일더

출연 험프리 보가트, 오드리 헵번, 윌리엄 홀든, 월터 햄프던, 존 윌리엄스

개봉 1954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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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시의 영원한 뮤즈,
오드리 헵번

지방시 드레스를 입고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쥔 오드리 헵번

<사브리나>는 의상상을 수상했지만, 그 트로피를 지방시가 가져가진 못했다. 지방시의 이름은 <사브리나>의 크레딧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영화사와 계약을 맺은 총괄 디자이너의 이름만 크레딧에 올랐던 것. 함께 <사브리나>를 관람한 지방시와 헵번은 그의 이름이 크레딧에 올라오지 않은 데 실망했고, 이후 헵번은 출연 계약에 ‘반드시 지방시를 의상 디자이너로 고용할 것’이란 조건을 내걸기도 했다. <사브리나> 이후로도 헵번 주연 영화의 지방시 의상 협찬은 계속 이어졌다.


<파리의 연인>(1957)
<파리의 연인>(1957)
<파리의 연인>(1957)

<파리의 연인>에서 헵번은 우연히 찍힌 사진을 계기로 모델계에 입성한 조를 연기한다. 화려한 색감의 의상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던 영화. 그녀가 입었던 웨딩드레스는 후에 클래식의 정석으로 남기도 했다. <파리의 연인> 프로모션 행사 당시 입었던 드레스 또한 지방시의 레전드로 남았다.

<파리의 연인>(1957) 프로모션 당시 입었던 드레스
파리의 연인

감독 스탠리 도넌

출연 오드리 헵번, 프레드 아스테어

개봉 1957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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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파니에서 아침을>(1961)

20세기 영화사에서 가장 상징적인 의상으로 손꼽히는 <티파니에서 아침을> 속 헵번의 블랙 드레스 또한 지방시의 손에서 탄생했다. 블랙 드레스와 커다란 선글라스, 긴 벨벳 장갑과 화려한 다이아몬드 목걸이까지 모든 것이 헵번을 위해 탄생한 아이템 같은 느낌이랄까. 현재까지도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블랙 드레스는 경매에서 약 9억 7천만 원(80만 달러)에 낙찰됐다.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
티파니에서 아침을

감독 블레이크 에드워즈

출연 오드리 헵번, 조지 페파드

개봉 1961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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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밖에 <하오의 연정>(1957), <샤레이드>(1963), <뜨거운 포옹>(1964), <백만 달러의 사랑>(1966) 등에서도 감각적인 지방시 룩과 그를 완벽하게 소화한 헵번을 만나볼 수 있다. 사진으로 감상해보자.

<하오의 연정>(1957)
<하오의 연정>(1957)
하오의 연정

감독 빌리 와일더

출연 게리 쿠퍼, 오드리 헵번

개봉 1957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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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레이드>(1963)
<샤레이드>(1963)
샤레이드

감독 스탠리 도넌

출연 캐리 그랜트, 오드리 헵번

개봉 1963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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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포옹>(1964)
뜨거운 포옹

감독 리처드 콰인

출연 윌리엄 홀든, 오드리 헵번

개봉 1964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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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달러의 사랑>(1966)
<백만달러의 사랑>(1966)
백만달러의 사랑

감독 윌리엄 와일러

출연 오드리 헵번, 피터 오툴

개봉 1966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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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시의 옷을 사랑한 고객들

잉그리드 버그만
그레이스 켈리
잔느 모로
재클린 케네디, <재키>(2016)

아무래도 헵번을 능가할 순 없겠지만, 여러 셀럽들이 지방시를 즐겨 찾았다. 잉그리드 버그만, 배우이자 모나코의 왕비였던 그레이스 켈리, 누벨바그의 상징 잔느 모로, 패션계에 한 획을 그었던 재클린 케네디 등이 지방시와 함께했다. 특히나 재클린 케네디의 지방시 사랑은 남달랐다고. 공식 석상에선 물론, 남편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장례식 당시 입었던 의상 또한 지방시의 손에서 탄생했다. 나탈리 포트만 주연 영화 <재키>에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영화계에서도 오래 기억될 ‘지방시’

지방시는 1995년 패션계에서 은퇴했다. 현재는 후임 디자이너들이 브랜드 지방시의 명맥을 잇는 중이다. 전통과 혁신을 고려한 디자인을 선보이는 지방시는 과거에서나 현재에서나 늘 할리우드인들에게 사랑 받는 브랜드. 올해 오스카에선 갤 가돗과 채드윅 보스만이 지방시의 의상을 입었고, <라라랜드>로 작년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던 엠마 스톤도 지방시의 금빛 드레스로 우아함을 더했다. 패션계는 물론, 영화계에서도 영원히 기억될 지방시. 아래는 브랜드 지방시의 의상을 입은 배우들이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유은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