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에 가서 평소처럼 아무 생각 없이 백바(바 뒤편 술들이 진열되어 있는 공간)를 둘러보다 못 보던 술이 눈에 띄었다. 뭔가 싶어 자세히 봤더니 디사론노(Disaronno Originale)였다. 아마레또(Amaretto)라는 술의 한 종류다. 살구씨나 아몬드, 혹은 다른 약초를 사용해 향을 입힌 리큐르로, 칵테일의 재료로 쓰이거나 혹은 제과 제빵용으로도 많이 쓰인다. 원래 디사론노의 디자인은 저 스타일이 아닌데 특별판으로 나온 것 같았다. 같은 사람이라도 옷을 달리 입으면 다르게 보이듯 디사론노라는 익숙한 술도 디자인이 바뀌니 다르게 보였다.
아마레또 계통의 술이 여러 종류가 있지만 이 디사론노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맛도 괜찮은 편이다. 맛도 맛이지만 관련된 이야기로도 유명한데 무려 레오나르도 다빈치(엄밀히 말하자면 그의 제자)와 관련 있는 이야기이다.
이탈리아 밀라노 옆에 사론노(Saronno)라는 작은 도시가 있는데 이곳에 있는 교회에서 당시 유명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 그림을 그려달라고 의뢰했다고 한다. 당시 다빈치의 제자였던 루이니라는 화가가 그림을 그리던 중 성모 마리아의 모델이 필요해 찾다가 그가 머물던 여관의 여주인을 모델로 낙점하고 그림을 그렸는데 결국 그 여주인과 루이니는 연인 관계로 발전하면서 여주인이 술에 살구씨를 담고 다른 재료들을 섞어 달콤하게 만들어서 루이니에게 선물로 줬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가 유명해지면서 디사론노가, 그리고 아마레또 계통의 모든 술들이 사랑의 리큐르라고 불리게 되었다.
마침 눈에 띈 김에 디사론노를 한잔 하기로 결정했지만 사랑의 리큐르라는 별명답게 그냥 마시기엔 너무 달아서 어떻게 마실까 잠시 고민하다가 디사론노를 사용해 만드는 칵테일 중 가장 유명한 칵테일인 '갓파더'를 바텐더에게 부탁했다.
갓파더라는 이름만 들어도 아시겠지만 <대부>라는 영화에서 유래된 칵테일인데 영화 <대부>에서 비토 꼴리오네(말론 브란도)가 마셨기 때문에 이름이 붙었다고도 하고 <대부>라는 영화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어서 어느 쪽이 정답인지는 잘 모르겠다.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스카치 위스키와 아마레또를 3:1로 섞으면 끝이다. 참고로 위스키를 꼬냑으로 바꾸면 '프렌치 커넥션'이란 칵테일이, 보드카로 바꾸면 '갓마더'라는 칵테일이 된다. 반대로 위스키에 아마레또 대신 드람뷔라는 리큐르를 넣으면 '러스티 네일'이란 칵테일이 된다.
아마레또라는 술 자체가 많이 달아서 전체적인 느낌은 위스키보다는 아마레또가 지배하는 편인데 과도한 쏠림을 막기 위해 바텐더에 따라서는 평범한 블렌디드 스카치 위스키 대신에 피티한 느낌이 강한 싱글 몰트나 블렌디드라도 더블 블랙같은 위스키를 쓰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올드 파 보틀을 보는 순간 오래간만에 저거다 싶어 올드 파를 써달라고 부탁을 했다. 참고로 올드 파도 가격이 크게 비싸지 않은 술이라 가능한 부탁이니 자칫 비싼 위스키로 해달라고 부탁했다가 곤란해하는 바텐더의 얼굴을 마주하는 비극은 피하시길. ^^
잘 만든 갓파더를 한 모금 입에 머금으면 위스키의 바디감에 이어 단 맛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몬드 향 같기도 하고 살구씨 향 같기도 한 향이 시차를 두고 뒤따라온다. 간단한 빌드타입 칵테일이지만 좋은 얼음을 써서 정성들여 만들면 입안에서 맛이 변화하면서 휘돌아 섞이는 걸 느낄 수 있는데 바에서 갓파더를 한 모금 머금는 순간 나는 말론 브란도가 아니라 마이클을 연기한 알 파치노가 떠올랐다.
남자의 눈으로 보기엔 멋있기야 말론 브란도가 처음부터 끝까지 멋있지만 나는 영화 내내 알 파치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영화 초반 꼴리오네 가문의 막내딸 코니의 결혼식에 여자친구를 데리고 온 마이클은 그때만 해도 조직(패밀리)의 일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조직보다는 그 자신의 앞날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차 있던 밝은 눈빛, 그리고 그 눈빛에 걸맞게 아직은 조금 유치하고 어린 티가 나는 얼굴과 표정까지, 결혼식 때의 마이클은 그냥 우리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20대 초반의 대학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아버지 비토가 적대 조직의 피격을 받아 중태에 빠지자 직접 복수에 나서고 그 후 이런 저런 조직 간의 암투와 복수극을 겪어가며 바로 몇 년 전의 순진했던 대학생은 간데 없고 이성과 냉정함, 잔인함으로 무장한 차가운 눈빛을 가진 조직의 보스만 남았다. 나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한 인간의 연기가 이렇게까지 대단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영화 처음의 마이클과 영화 마지막 장면 문 너머에서 조직원들의 충성 맹세를 받는 마이클을 어찌 같은 사람이라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마치 잘 만든 갓파더를 처음 입에 머금었을 때 세 가지의 맛이 시간차를 두고 입 안에서 휘도는 느낌? 그래서 나는 이 갓파더라는 칵테일이 비토보다는 마이클에게, 말론 브란도라는 이미 완성된 보스가 아닌 보스가 되어간 알 파치노에게 더 어울리는 칵테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따지고 보자면 마이클의 변화가 그를 위해, 혹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바람직한 것이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적어도 영화 초반의 그 자신은 그런 변화를 원하진 않았을 것이고, 그런 변화를 강제했던 여러 사건들이 그에겐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영화의 가장 유명한 명대사인 “I’m going to make him an offer he can’t refuse; 난 그에게 절대 거절 못할 제안을 할 거야”처럼 마이클의 변화는 그에겐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인생에 있어 어차피 자기 마음대로 되는 일들이 열 가지 중 두세 가지가 채 안되고(운칠기삼?), 그리고 그렇게 흘러가는 일들이 결과적으로 꼭 또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걸 이제는 나도 알고 있으니, 그렇게 보스가 된 마이클이 새삼 멋져 보이고 부러워 보이기도 했다.
누구든 살면서 여러 변화를 겪는다. 아쉽지만 원해서 변하는 경우보다 원치 않지만 변해야만 해서 변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래도 위에 말했듯, 그 결과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운칠기삼이니 새옹지마니 하는 말들이 괜히 생긴 게 아니라는 걸 이젠 알 것 같다. 마치 칵테일 갓파더의 맛이 그렇듯, 누구의 삶이든 단맛과 쓴맛과 향기가 한 공간 안에 공존한다.
사실 갓파더의 베이스를 올드 파로 부탁했던 이유도 이거였다. 어느 만화에서 본 구절인데 베이스로 쓰인 위스키인 올드파는 일본 정치가들에게 특히 큰 사랑을 받았고 그 이유는 사진과 같은 자세가 가능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위태롭지만 넘어지지 않는 저 모습. 정치가도 사람인지라 마지막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받았을 땐 저런 것에라도 의지하고 싶어진다는 것이다. 그게 사람이다. 그래서 굳이 맛으로만 따지자면 더 나을 수도 있었을 조니워커 더블블랙을 쓰지 않고 올드파를 사용해 달라고 부탁했었다.
어디선가 본 글귀처럼 1년 전 나를 힘들게 했던 모든 일들 중 지금도 기억나는 일은 의외로 많지가 않고, 어차피 인생에서 겪는 대부분의 일들은 저 대사처럼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다. 그런 제안을 받았다면 대부의 다른 명대사처럼 '입은 다물고 눈은 크게 뜨고' 조금만 버텨보자. 존버정신으로.
데렉 / 술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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