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별일 없이 흘러가는 일상도 그 나름대로 반짝거리는구나 싶어서 말이다.
지금은 도저히 상상이 안 가는 일이지만, 20대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시끄럽고 번잡한 사람이었다. 여럿이 모인 동호회 정모 자리에서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각종 재담과 성대모사를 선보였고, 아침 첫 차를 타고 가는 대신 심야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자고 선동하는 인간이었다. 그 시절 남겼던 사진들을 보면 군데군데 일부러 괴상한 표정을 짓고 카메라를 노려보고 있는 내 얼굴이, 동호회 회원들과 부둥켜안고 장난치고 있는 낯선 어린애의 얼굴이 등장한다. 아, 대체 왜 저래. 이유는 짐작할 만하다. 어렸을 적부터 나는 주변 사람들을 웃겨서 갈등을 완화시키고 긴장을 해소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아이였다. 본디 바람 잘 날 없는 집안의 막내로 태어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재롱을 부려야 한다는 책무에 시달리게 되는 법이니까.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지극히 내성적이었던 나는, 어릴 때부터 온갖 재담과 장기자랑을 개발하는데 매진해왔다. 압도적인 침묵을 어떻게든 깨고 싶어서, 그래야 내가 좀 살 것 같아서.
30대 후반이 된 나는, 이제 가만히 앉아있는 걸 좋아한다. 20대처럼 누구를 웃길 만큼의 유머감각도 안 남아 있거니와, 그럴 체력도 안 된다는 걸 잘 안다. 그래서 가만히 앉아서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초조하지 않은 사이가 편안하다. 굳이 내가 애써 재담과 성대모사로 웃기지 않아도 날 초조하게 만들지 않는 상대와 앉아있는 게 편하다. 언젠가 일 때문에 만나게 된 모 신문사의 기자님은 딱 그런 사람이었는데, 그와 마주 앉았을 때 나는 바로 직감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이 지금 저전력 모드인 건 피곤해서 그런 것도, 우울하거나 마음이 복잡해서 그런 것도, 몸이 안 좋아서 그런 것도 아니라고. 원래 그렇게 고요하고 차분한 사람이고, 그래서 이 드문드문 이어지는 대화의 느릿한 리듬과 그 사이를 채우는 긴 침묵이 어색하지 않은 거라고. 내가 재담을 늘어놓을 필요도, 애써 활력과 긍정을 가장하지 않아도 그냥 그대로 평화롭게 앉아있을 수 있는 상대를 만났다는 기쁨에 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말했다. 기자님, 너무 좋네요. 이렇게 저전력 모드로 앉아 있을 수 있다니 너무 좋네요. 상대도 희미하지만 선명하게 웃었다. 그러게요.
애써 상대를 설득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대단히 흥미로운 이야기나 화려한 꾸밈이 없어도, 조용히 평화로울 수 있는 마음이란. 그런 상대 앞에 앉아있으면, 그리고 나도 상대에게 그럴 수 있으면, 그 순간의 고요한 평화라는 건 참 귀하다. 특히나 사방팔방에서 너나 할 것 없이 제 이야기를 하느라 시끄러운 요즘 같은 시절엔 더더욱 그렇다. 아마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산장 벽난로 타는 영상’ 같은 걸 찾아서 하염없이 틀어 두는 것도 그런 게 아닐까. 대단한 사건사고나 자극적인 요소 없이 자연스레 흘러가는 무언가를 보면서 내면을 쉬게 해주고 싶은 그런 마음.
내게는 72초TV가 선보였던 숏폼 드라마 <오구실> 시리즈가 딱 그런 작품이었다. 이채은이 연기하는 주인공 오구실은 혼자 살며 소소한 일상을 살아가는 직장인이다. 지금 만나는 사람은 없고, 그래서 예전엔 질색했던 소개팅도 나가보지만 딱히 쓸 만한 상대는 보이지 않고, 옆자리에서 일하는 후배는 속이 뻔히 보이는 거짓말로 야근을 피해가려 수작을 부리고, 자꾸 눈에 밟히는 남자 후배와 뭔가 이뤄지나 싶지만 그렇다고 딱히 특별한 일은 생기지 않는. <오구실>은 비슷한 연배의 도시 생활자들이라면 한 번쯤 경험해봤을 만한 일상적인 외로움과 평범한 고단함을 과장 없이 그려내는 드라마였다. 그래서 나는 마치 모닥불이 아래에서 위로 타오르는 걸 보며 ‘불멍’을 하듯, 물이 위에서 아래로 졸졸 흐르는 걸 보며 ‘물멍’을 하듯, 평범한 30대의 삶을 과장 없이 자연스레 담백하게 그려낸 <오구실>을 보곤 했다. 로맨틱 코미디에서 일어날 법한 독특하고 대단한 사건 같은 건 하나도 생기지 않지만, 저기 나처럼 적당히 지치고 적당히 외로운 사람이 오늘도 하루를 보냈구나 하는 저전력의 공감을 나눌 수 있어서. 그렇게 별일 없이 흘러가는 일상도 그 나름대로 반짝거리는구나 싶어서 말이다.
회당 2분 남짓, 7~8편짜리 한 시즌을 다 보는데 기껏해야 20분 안팎인 <오구실>은, 앉은 자리에서 3개 시즌을 다 보아도 한 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난 그걸 단숨에 몰아보는 대신, 품 속 깊이 넣어두었다가 찰나의 고요가 필요할 때마다 한 편씩 꺼내 보곤 한다. 하루 종일 유달리 번잡스럽고 피곤한 일이 많아서 잠시 쉬어 가는 순간이 간절한 어느 저녁이면, 나는 조용히 스마트폰을 꺼내 <오구실>을 찾는다. 그러면, 거기에는 별 일 없는 날들을 보내면서 크고 작은 외로움과 소소한 즐거움들 속을 유영하는 일상의 여행자 오구실이 있다. 언제나처럼 그 자리에, 저전력 모드로도 충분한 평화와 함께.
이승한 TV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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