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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되살아나는 목소리〉 박수남·박마의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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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나는 목소리〉 언론배급 시사회에서 박수남·박마의 감독
〈되살아나는 목소리〉 언론배급 시사회에서 박수남·박마의 감독


재일동포 다큐멘터리 감독 박수남은 1986년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들의 증언을 기록한 <또 하나의 히로시마 - 아리랑의 노래>(이하 <또 하나의 히로시마>)를 발표한 이후 <아리랑의 노래 - 오키나와의 증언>(1991, 이하 <아리랑의 노래>), 〈누치가후 - 옥쇄장으로부터의 증언〉(2012, <이하 <누치가후>), <침묵>(2016) 등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를 둘러싼 역사를 통과한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다큐멘터리를 발표해왔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처음 공개된 <되살아나는 목소리>는 <또 하나의 히로시마>와 <아리랑의 노래>를 만들기 위해 촬영한 16mm 필름을 복원한 영상과 그동안 박수남 감독이 지나온 발자취를 되짚어보는 작품이다. 박수남 감독의 딸 박마의 감독이 어머니와 함께 연출을 맡았다. 일본 제국주의가 안긴 폭력의 기억을 품고 사는 사람들의 증언과 이를 성심껏 조명해온 연출자의 태도, 그리고 영화라는 매체의 힘을 되새기는 귀중한 기록이다. 개봉을 맞아 한국을 찾은 박수남 · 박마의 감독을 만났다.


일제시대에 발표된 노래 ‘마의태자’를 따서 박마의 감독님의 이름을 지으셨죠. 아이 이름에 붙이기엔 너무 서글픈 노래인데요.

박마의 아까도 어머니가 ‘마의태자’를 부르고 계셨어요. 

박수남 저는 일본 학교를 나왔습니다. 우리나라 공부를 하지 않으면 일본 사람이 된다고, 중학교 1학년부터는 우리 아버님이 저를 조선 학교로 옮겼어요. 우리 학교에서 처음 배운 노래가 ‘마의태자’였습니다. 음악 선생님이 자주 ‘마의태자’를 가르쳐주셨어요. 처음엔 그 노래가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지 몰랐지만, 선생님이 ‘마의태자’에 품어 있는 뜻을 설명해주시고 그걸 알게 돼 많이 감동했습니다.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한 저항의 노래였으니까, 특히 우리들은 일본 학교에서 일본 천황 만세 하는 교육만 받아왔으니까요.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우리들 가슴에 품어 있는 독립 정신이 불타올랐어요. 그래서 우리 학생들은 모두 이 일본인 음악 선생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마의태자’를 좋아했어요. 일본 침략에 항거하는 노래라고 받들었습니다. 우리나라를 사랑하기 위해서 끝내 일어나서 침략자와 싸우시는 마의태자의 애국심에 대해서 우리는 많이 감동했습니다. 우리에게 “자 너희들도 일어나라”고 호소하는 노래같이 받들었어요. 일본 학교에서 조선 학교로 옮겨온 학생들은 모두 다 이 노래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애를 낳으면 남자라도 여자라도 마의태자의 이름을 그대로 짓자고 결심했어요. 중학교 1학년 때. 태어나보니 여자였지만 그래도 마의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되살아나는 목소리〉
〈되살아나는 목소리〉

박마의 감독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항거의 운명을 타고나신 거네요!

박마의 그러게요. 중학교 때부터 결심했다는 건 지금 처음 들었어요.

박수남 노인들은 마의의 이름을 듣고 마의가 너무 불쌍하니 바꾸라고 많이 타일러왔어요. 저는 절대로 거절했습니다. 이 이름같이 높은 이름이 어디 있을까요? ‘마의태자’의 마의는 항거의 뜻을 품은 이름입니다. 항거를 하는 저의 큰 사업을 돕게 되는 것이 마의의 팔자지요. 마의에겐 큰 부담이겠지만요. (웃음)

오키나와 전투에 강제 연행된 조선인 ‘군속’과 ‘위안부’의 실상을 좇는 두 번째 영화 제목을 ‘아리랑의 노래’라 붙이신 것이나, 만드신 작품들 중에서도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여럿 담겨 있습니다. 

박수남 저는 수많은 우리 동포들의 한을 기록하는 영화를 만들어왔습니다. 한을 남에게 알리려면 어떤 방법이 제일 적당한가를 언제나 생각했어요. 제 영화 속에서 징용군과 위안부 피해자분들이 부르는 노래는 단순한 아리랑이 아닙니다. 모진 탄압과 억압으로 죽을 지경에 있었던 우리 동포들이 노래를 불러왔어요. 사람의 혼에 있는 분노와 한을 전하는 건 너무 어렵습니다. 말이 안 나와서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었어요. 노래가 말이고, 말이 한입니다. 노래 자체가 항거입니다. 

박마의 <되살아나는 목소리>에선 쓸 수 없었지만 복원된 필름 중에 노래 부르는 모습이 더 많았습니다. 어머니는 언어로 이야기할 수 없는 분들이 저절로 노래 부르는 걸 기록하셨어요.

〈되살아나는 목소리〉
〈되살아나는 목소리〉

 

초반에 두 분이서 다투는 대목은 <되살아나는 목소리>를 위해서 찍어놓은 건가요?

박마의 10년 전 상황이에요. 세 번째 작품 <누치가후>의 2부와 네 번째 작품 <침묵>을 편집하느라 정신없던 때였어요. 위안부 피해자 다큐멘터리 <침묵>을 어떻게 구성할지 어머니와 인터뷰하고 있었어요. 위안부 피해자분들께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를 들었는데, 너무 중요하지만 역사의식이 없는 사람한테는 복잡하고 깊은 내용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젊은 사람들은 갑자기 이 말을 들어도 이해할 수 없다”고 했고, 어머니는 화를 내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일주일 후에 쓰러지셨죠.

<되살아나는 목소리>는 공동연출로 이름을 올린 작품입니다. 역할 분담은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박마의 어머니의 시선으로 촬영했던 필름 속 내용을 제가 알아가는 구성입니다. 저는 촬영본에 대해서 하나도 몰랐어요. 복원된 영상을 봐도 저 사람이 누군지도, 거기가 어디인지도 몰라요. 여기가 어디고 언제 어떻게 가서 그 사람을 인터뷰하셨는지 처음부터 일일이 어머니한테 이야기 들었어요. 이 분과 저 사람의 관련성이나 증언하는 것 중에 무엇이 핵심인지 짚어주셨어요. 어머니 대신 필름을 복원하면서 증언자분들의 목소리를 되살려내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두 여성 원폭 피해자분들이 화장품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대목이나 김분순 님이 증언 중에 말을 잇지 못하자 “영화가 그런 말 없는 사람의 말을 영상으로 표현하니까 제가 영화를 만드는 거예요”라고 감독님이 말씀하시는 대목이 안기는 감동을 잊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또 하나의 히로시마>와 <아리랑의 노래>에 이 장면들이 쓰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박수남 한 작품에는 일정한 시간이 있습니다. 긴 작품은 사람들이 보지 않죠. 그런 제약 속에서 모든 테마를 넣는 것은 너무 복잡합니다. 기술적인 문제도 있습니다. 

박마의 <아리랑의 노래>는 오키나와 전쟁 테마였기 때문에 아무래도 중요한 건 오키나와에 끌려간 징용군과 위안부 피해자와 관련된 증언이었어요. 한국의 원폭 피해자분들을 8명 촬영했는데 어머니도 어쩔 수 없이 <아리랑의 노래>에는 못 썼죠. 

〈되살아나는 목소리〉
〈되살아나는 목소리〉
〈되살아나는 목소리〉
〈되살아나는 목소리〉

 

사이판에서 스파이로 몰린 한국 청년들이 ‘천황 폐하 만세’를 삼창하고 총살 당하는 걸 목격한 일본인 아리메 마사오 님의 증언은 전작에 이어 <되살아나는 목소리>에도 포함된 유일한 대목입니다. 

박수남 아리메 씨는 오키나와 사람입니다. 저는 뛰어난 일본인인 그를 존경하고 있어요. 그분 말씀이 본질 그대로입니다. 일본은 민족으로서 말과 이름뿐만 아니라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빼앗아서 우리를 일본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어요. 일본에서 태어난 우리들은 어릴 적부터 일본 천황을 위해 죽는 것을 최고의 명예라고 교육받아왔습니다. 아리메 씨 증언 속 청년들은 우리는 간첩이 아니라 훌륭한 일본 사람이라고 항거를 했는데도 결국 총살 당했습니다. 일본 천황 만세를 삼창하겠다고 하니 그건 또 좋다며 가만히 두고 끝나자마자 죽였습니다. 이 왜놈들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넘쳤어요. 저는 우리말 중에 제일 심한 욕설이 ‘망할 놈’이라고 생각합니다. 망할 놈들은 일본 제국주의자 아니겠습니까. 이 망할 놈들의 짓을 들으니 너무 분했어요. 그래서 아리메 씨의 증언을 <되살아나는 목소리>에도 담았어요. 이 작품은 일본 침략에 대한 고발이고요, 일본 천황에 대한 고발입니다. 제국주의 책임은 일본 천황에 있습니다. 천황을 절대적인 전제라고 우리들을 키운 황민화교육은 일본 제국주의의 본질입니다. 영화에도 나오듯 지금도 일본 젊은이들이 거리에 나와 조선놈들 몽땅 죽이라고 고함을 지르고 있어요. 일본 사회에서 태어난 재일동포들은 이런 목소리를 들으며 자랐어요. 우리 아까운 청년들이 전쟁에서 얼마나 많이 희생 당했습니까. 그런데 이 도둑놈들은 우리를 도둑놈이라고 부르고 총살했으니 너무나 억울한 일이 아니겠어요?

박마의 복원해야 되는 16mm 촬영본은 <또 하나의 히로시마>와 <아리랑의 노래>를 만들기 위해 찍은 겁니다. <또 하나의 히로시마>는 단순히 원폭 피해에 대한 증언이 아닙니다. 일본에 있는 다큐멘터리는 원폭이 8월 6일에 떨어졌으니까 그날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부터 시작합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이전 식민지 시대에 한국인들이 어떻게 일본 히로시마에 왔는지부터, 한 사람 한 사람의 증언을 모으고 있었습니다.

박수남 징용군은 잡혀가서 노예 노동을 죽을 지경에 하고 마지막엔 너희들은 일본 국민이 아니라며 총살 당했어요. 이 도둑놈들은 뻔뻔하게 징용군과 위안부 피해자의 배상 문제를 한국 대통령에게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고, 작년 우리 대통령은 일본에 대답을 가져왔습니다. 일본은 이 대답을 듣고 배상 문제를 전부 해결했다며, 한일 관계가 좋아진다며 만세 소리를 불렀어요. 그러고 일본 정부는 한국 대통령에게 오므라이스를 대접했어요. 비빔밥이라면 이해를 할 수 있는데, 오므라이스를 대접했다니까 너무 분했어요. 우리 대한민국을 얼마나 깔보고 있습니까? 우리나라 대통령은 그 오므라이스를 맛있게 얻어먹고 돌아갔어요. 그에 대해 한국 국민은 한 마디도 분한 소리를 안 했습니다. 그건 일본 나라의 대접을 우리가 받들었다는 뜻 아닙니까? 우리의 독립 정신은 다 사라졌습니까? 그런 문제가 하나도 해결되지 않고 모두 남아 있어요. 열사들은 다 세상을 떠났어요. 그 유족들은 얼마나 한을 품고 오늘날을 맞이하고 있겠습니까? 당신들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어요? 우리는 오래오래 일본 침략자 땅에서 종살이를 해왔어요. 우리 재일동포들은 그런 억압 속에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분해서 견딜 수 없어요.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동포들에게 이걸 보고 어떻게 가만히 있느냐고 그것을 묻고 싶어요. 그래서 그것을 저는 영화로 가져왔습니다. 저희 영화를 보시고, 죽을 지경을 살아나온 분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 영화를 보고 들어주세요. 

 

박수남 감독의 과거 다큐멘터리 촬영 현장
박수남 감독의 과거 다큐멘터리 촬영 현장

 

<아리랑의 노래>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증언이 나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초점을 맞춘 작품 <침묵>은 이후 25년이 지난 후에야 공개됐습니다.

박수남 제 목적은 영화 하나를 만드는 게 아닙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모르고 있는 역사의 진실을 알게 해주는 것이 제 영화입니다. 일본에서 제일 가난한 우리 모녀는 영화를 만들고 있지만, 30년이 지나도 아직 완성되지 못한 게 아직 우리 창고에 많이 있어요. 돈이 없어서 완성 못하는 게, 이 귀한 역사의 진실을 우리 동포들에게 알리지 못하는 게 너무 아쉽고 분합니다. 제가 도둑질을 해서라도 다음 작품들을 완성하고 싶습니다. 돈이 필요합니다.

박마의 <아리랑의 노래>가 완성된 1991년 8월 김학선 할머니가 위안부 피해 사실을 고백하고, 20명이 넘는 위안부 피해자분들이 어머니를 찾아오셔서 5년 이상을 일본 정부에게 항의하는 걸 지원하셨어요. 그 속에서 틈틈이 촬영했기 때문에 <침묵>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직업에 국한되지 않고 굉장히 다양하고 큰일들을 하셨고, 영화 작업도 같이 이어오셨어요.

감독님은 ‘혁명가’시니까요. (“제가 평생 만들어 온 기록 영화를 저는 혁명 영화라고 생각해요.” - <리버스> 인터뷰 중에서) 많은 분들의 가슴속에 있는 증언을 들으시려면 한 분 한 분 관계를 좁히는 게 중요한 문제일 텐데 그 비결이 있을까요?

박마의 함부로 증언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오키나와에 이주하셨어요. 많은 오키나와 분들이 어머니께 위안부 피해자분들 친척이냐고 물으세요. 친척도 아닌데 어떻게 도쿄에서 오키나와까지 그들을 찾아왔느냐고요. 그럼 어머니는 친척은 아니지만 나의 언니 오빠 같은 분들이라고 말씀하세요. 결국 조선인이니까. 어머니는 질문하기 전에 어떻게 일본에서 태어났는지부터 자기 이야기를 우선 하세요. 촬영은 항상 마지막에 하셨어요. 신뢰 관계를 쌓고 카메라를 가져가기까지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길게는 몇 년도요. 증언자분들이 말을 해주지 않더라도 어머니는 계속 가고, 계속 가셨어요. 그것이 증언을 이끌어내는 태도입니다.

박수남 오키나와는 우리나라보다 10년 전에 식민지가 됐습니다. 지금도 오키나와 사람들은 일본 국민으로서 대접을 못 받고 있죠. 오키나와엔 일본 사람들이 먹고 남은 늙은 쌀밖에 오지 않습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일본 식민지가 돼 이중의 식민지였던 오키나와는 차마 볼 수가 없을 정도로 가난하게 살고 있었어요. 아무것도 만들어낼 수 없는 데서 살고 있습니다. 바다 위에 뜨고 있는 섬이라 흙이 없으니 보리도 나물도 나지 않아요. 김치를 담그려고 한번 생각해봤는데 배추도 무도 없어요. 오키나와에 처음 갔을 때 거기 끌려간 위안부 아가씨들을 찾았어요. 그 아가씨들 보셨냐고 물으니 같이 살고 있었다고 하셨어요. 70명쯤 되는 아가씨들이 왔는데, 오키나와 사람들과 달리 섬에 온 조선 아가씨들은 하느님 같이 모두 곱고 얼굴도 다리도 하얘서 놀랐다고요. 오키나와에서 돈이 가장 많은 사람의 집을 일본군이 박탈해서 그 처자들이 갇힌 집으로 만들어 거기 일본군들이 줄을 서고 저녁에 오면 아침까지 떠나지 않았고, 낮에 그 집을 살펴보면 아가씨들이 모두 울고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 청년들도 군속으로 많이 끌려와서 아침저녁 종살이 노동을 했어요. 일본 군인들은 힘이 없어서 쌀 한 말도 등에 질 수 없는 약한 어린이 같은 몸체였는데, 우리나라 청년들의 몸은 든든하고 씩씩해서, 칼을 차고 매질을 하면서 일하라고 위협하는 걸 보고 오키나와 사람들은 우리 처지와 똑같다며 너무 분했다고 합니다. 굶어 죽는 청년들도 많아서 오키나와 사람들은 고구마를 쪄서 일본군 몰래 군속들 살고 있는 집에 주고 왔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고요. 고향에 돌아온 우리 군속들은 자기가 이렇게 살아남게 된 건 오키나와 사람들이 자기 형제처럼 대접해줬기 때문이고, 그분들의 은혜를 잊을 수 없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여러분들도 찾아가서 그 말을 들어주세요.

〈되살아나는 목소리〉
〈되살아나는 목소리〉

그동안 한국으로 이주하실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박수남 스무살 때 일본 동경에서 4월 혁명(4.19)을 TV로 봤습니다. 그때 저는 바로 서울에 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유학을 하려고 했는데, 입국 조건이 박정희 정권에 충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걸 거부하니 한국 정부에서는 신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박마의 처음 한국 국적을 딴 게 1987년이에요. 4.19 혁명 당시에 올 수 있었다면 어머니의 평생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1990년 <아리랑의 노래> 촬영 때문에 온 게 첫 한국 방문입니다.

이옥선 님과의 순간들이 짧지만 여럿이 붙어 있어요. 호텔방에서 세 분이서 사진을 찍는 게 마지막이에요.

박마의 그렇습니다. 그게 마지막이 되었어요. 코로나 팬데믹 때 쓰러지셨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그때 나눔의 집에 계셨거든요. 저희는 할머니한텐 가족이라고, 나눔의 집에 아무리 요청을 해도 코로나 때문에 안 된다며 차단했어요. 

〈침묵〉 박수남 감독(왼), 이옥선
〈침묵〉 박수남 감독(왼), 이옥선

<침묵>도 이옥선 님의 비중이 특히 큰데요. 추억이나 정이랄 게 굉장히 많을 것 같은데. 특히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나요?

박수남 보통 아줌마이자 보통 어머니예요. 기억 전체가 아직 제 마음에 생생합니다. 옥선 씨도 저도 너무 만나고 싶었는데, 전대협은 마지막에도 우리를 만나게 해주지 않았습니다. 

박마의 위안부 피해자분들과 일본에 오셔도 옥선 할머니는 매일 가장 먼저 일어나셔서 밥을 챙겨주세요. 김치나 김을 자기가 챙겨오시고, 늘 남이 배가 고픈지 살피는 어머니 같은 분이셨죠. 그분이 계시면 웃음이 나오고 분위기가 밝아졌어요.

박수남 감독님은 증언하신 분들 목소리만 들어도 그들이 누군지 기억해내시고, “영상은 보이지 않더라도 현장의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저는 발군의 기억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안심하세요”라고 말씀하십니다. 감독님의 삶에서 가장 오래된 기억은 무엇인가요?

박수남 어릴 때 어머니가 일하러 밖에 나가면 나를 두고 간다고, 데리고 가라고, 울면서 따라가고 종일 울었다고 합니다. 내 목소리가 이렇게 큰 건 그때 어머니 어머니 소리쳤기 때문이라고 주변 사람들이 놀렸어요.

<되살아나는 목소리>는 박수남 감독님 박마의 감독님 두 모녀에 관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박수남 감독님의 어머니에 대한 말씀을 들으니 지금 이곳에 3대에 걸친 모녀가 함께 계신 것만 같습니다. 박수남 감독님의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나요?

박수남 저는 그 시대에 결혼도 안 하고 우리 마의를 낳았어요. 미혼모입니다. 당시 불량학생들은 미용실에 가서 머리도 하고 멋진 치장을 하고 다녔어요. 동네에 어느 불량학생이 오사카의 부잣집에 시집가게 됐는데 조건이 진짜 처녀여야 한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돈을 빌려 미용실에서 처녀막을 만들어 가면서까지 시집을 갔습니다. 어머니 친구들이  (결혼 안 하고 아이를 낳은) 저에 대해 이야기하며 욕설을 하면, 어머니는 그 애랑 우리 수남이하고 비교해보라고, 우리 딸은 자기 힘으로 아이를 낳고 키우고 자기 일도 하고 있으니 우리 수남이가 자랑스럽다고 하셨대요. 그게 우리 어머니예요. 저는 그런 어머니에게서 자랐습니다. 제가 이렇게 태어나서 지금 이 일도 하는 것은 다 어머니 덕분입니다.  

<되살아나는 목소리> 이후에 복원한 촬영분에서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박마의 머릿속에 떠다니는 것들이 좀 있습니다. 더 선보이고 싶은 건 역시 오키나와 촬영본입니다. 어머니의 모습들도 있고요. 당시 찍은 오키나와 사람들은 거의 세상을 떠나셨어요. 오키나와 사람들이 경험한 것들, 저마다 갖고 있는 추억 등이 거기 많이 있습니다. 조선 위안부에 관한 이야기는 피해자분들이 직접 하는 게 아니라, 그때 오키나와에 사시는 분들의 증언입니다. 얼른 복원해서 어머니한테 이건 어떤 상황이에요? 물어보고 싶어요. 일본 군인들의 증언도 많이 찍어놓았는데, 피해자와 가해자 두 진영의 증언을 모두 찍었다는 게 굉장히 대단합니다. 어머니는 그들에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먼저 이야기하셨다고 해요. 자기 오빠도 일제 시대에 당신처럼 군대에 가고 싶어 했다고. 

90여 년간 치열하게 살아온 어른께 묻듯이, 마지막 질문드리겠습니다. 세상은 더 좋아졌다고 생각하시나요?

박수남 아니. 어떤 면에선 더 나빠졌죠. (잠시 침묵) 이 정도로도 대답이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