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가 함께 영화를 봅니다. 멜로물을 보며 연애 시절을 떠올리고, 육아물을 보며 훗날을 걱정합니다. 공포물은 뜸했던 스킨십을 나누게 하는 좋은 핑곗거리이고, 액션물은 부부 싸움의 기술을 배울 수 있는 훌륭한 학습서입니다. 똑같은 영화를 봐도 남편과 아내는 생각하는 게 다릅니다. 좋아하는 장르도 다르기 때문에 영화 편식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편집자 주-
마트에서 장을 보고 집으로 가는 길 소낙비가 쏟아졌다. 본능적으로 냅다 뛰기 시작. 잽싸게 집으로 도착해 머리를 탁탁 털어내고 생각한다. ‘음, 이 정도면 별로 안 젖었네. 저녁에 그냥 씻어야지’. 그리고 생각은 더 깊어진다. ‘몇 달 전 만해도 비를 다 맞았는데’.
먼 기억인 것 같다. 하지만 불과 몇 달 전 나는 임산부였다. 임신을 했던 당시 남편과 함께 마트를 갔다. 그리고 집에 가는 길. 오늘처럼 소낙비가 쏟아졌다. 장 본 것들을 담은 상자가 물에 젖어 터지기 일보 직전. 뒤뚱대며 걷는 내게 조금만 빨리 걸을 수 없냐고 남편이 물어왔다. 그때 나는 소리쳤다.
나도 빨리 걷고 싶거든, 장난하나!
좋게 말해도 될 것을 버럭! 소리쳤던 그날이 떠올라 얼굴이 벌게진다. 물론 남편도 잘 한 것은 없다. 하지만 남편이 먼저 뛰어가겠다고 했었어도 나는 서운했을 것이다. “아니, 임산부를 두고 혼자 간다고? 황당하네!” 또 다른 버럭의 흑역사가 생성됐을 수도 있으리. 임신은 참 신기한 일이다. 몸이 변하니 마음도 변하는 걸까. 자칭 타칭 쿨녀 본인에게 눈물 날 일이 어찌나 많은지 말이다.
하지만 좀비가 쫓아와도 빨리 못 걷는 것이 만삭의 임산부다. 당시 이 드라마를 알았으면 남편에게 보여줬을 텐데. 이제라도 함께 본다. 2021년에 방영됐던 40분 남짓의 단편극 <산부인과로 가는 길>이다.
산모와 좀비?

<산부인과로 가는 길>은 tvN에서 방영된 ‘드라마 스테이지 2021’ 중 한 편이다. ‘드라마 스테이지 2021’은 CJ ENM의 신인 스토리텔러 지원사업 ‘오펜(O’PEN)’ 공모전 당선작 10편으로 구성된 단막극 프로그램으로 그중 <산부인과로 가는 길>은 사람보다 느린 좀비, 좀비보다 느린 만삭의 임산부가 등장해 사투를 벌이는 이야기다.
임신 37주에 접어든 화영(박하선)은 진통을 감지한다. 아기가 곧 나올 것 같은 직감. 하지만 출근한 남편은 전화를 받지 않는다. ‘회사 쪽으로 갈 테니 함께 병원으로 가자’는 메시지를 남기고 집을 나서는데, 경비 아저씨가 화영을 갑자기 공격한다. 이게 뭔지? 그런데 경비 아저씨가 조금 이상하다. 그 모습에 놀라 밖으로 나오니 사방이 경비 아저씨와 같은 모습이다. 그렇다. 좀비가 물면 좀비가 되는, 좀비 무한 생성의 한복판에 화영이 서게 됐다.

‘비상사태가 발생했으니 안전을 위해 외출을 자제하라’, 긴급 재난문자가 울리지만 화영도 긴급사항이다. 좀비도 무섭지만 이 아기가 잘못되는 것은 더 무섭다. 그리고 화영은 결심한다. 어렵게 가진 아기를 포기할 수 없다고. 좀비가 들끓더라도 나는 산부인과로 가야겠다고.
걷기가 쉽지 않아
마음은 먹었지만 가야 할 길은 구만리다. 좀비가 들끓는 거리로 어떻게 나간다는 말인가. 하지만 영화가 선택한 한 장치가 화영을 살렸다. 영화 속 좀비는 움직임이 매우 느리다. 일그러진 얼굴과 요상한 걸음걸이로 마구 뛰어오는 일반 좀비들과는 다르다. 공격성은 있지만 가동성이 없다. 사람 냄새를 맡고도 유유자적 걸어가는 좀비의 모습은 웃음을 자아낸다.

누가 좀비인지, 누가 임산부인지 모를 만큼 좀비들과 화영은 느릿한 대결을 한다. 좀비가 느릿느릿 쫓아오면 화영은 느릿느릿 도망간다. 분명 추격신이지만, 긴박함은 다소 떨어진다. 그 어떤 추격신도 이보다는 박진감 있으리.

뒤뚱대며 걷는 화영을 보니 나의 37주가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직접 겪어보니 알겠더라. 왜 지하철에 임산부 자리가 있고, 왜 주차장에 임산부 공간이 있는지. 직접 겪어본 임산부는 배려 받아야 할 존재임이 분명했다. 조금만 걸어도 헥헥 숨이 차오르고, 다리가 저린다. 초록불 땡! 바뀌자마자 걸어가도 횡단보도를 건너다보면 빨간불로 바뀌기 십상이었다. 택시에 오르내리거나 공공장소를 이용할 때도 느리게 움직일 수밖에 없는 나 자신에, 가끔은 그런 생각도 했다. 하. 나 좀 민폐 같네.
무거운 몸만큼이나 마음도 꽤 무거웠다. (물론 모든 임산부들이 이렇다는 것은 아니다) 우선 직장에서 내 몫을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마음. 외근과 다양한 사람을 만날 일이 많은 내 직업에서는 특히 그렇다. 누구를 만나도 “아이고, 무거운 몸으로.. 쉬엄쉬엄해도 돼요” 감사하고 감사한 배려지만, 임신 전과 똑같이 내 몫을 해내고 싶은 나는 항상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 좀 민폐 같네”.
저격보단 배려가 낫지. 암.. 그렇고말고
물론 저격보다는 배려가 백방 낫다. <산부인과로 가는 길>의 화영은 저격을 당한다. 진짜 저격. 그것도 한 군인에게. 화영이 고군분투하는 사이 게엄령이 선포됐고, 감염자를 모조리 사살하라는 내용이 전달된 것. 감염자를 사살하는 임무를 군인들이 수행하기 시작하며 한 군인이 화영을 좀비로 오해한다. 그도 그럴 것이 화영이 뒤뚱뒤뚱 느리게 걷는 폼이 좀비와 똑같다. 좀비가 아니라고 손사래 치지만 군인은 계속해서 화영을 저격한다.

심장 저격을 당하기도 한다. 남편 회사 건물에 도착했지만 남편을 만나지 못한다. 지하주차장에서 좀비로 변해버린 남편과 맞닥뜨렸기 때문. 남편은 더 이상 남편이 아니다. 그리고 남편 옆에 좀비로 변한 내연녀를 발견한 순간 슬픔이 사그라든다. 그렇게 화영은 몸도 마음도 저격을 당한다.
조력자는 있는 법
저격만 당하는 건 아니다. 화영을 돕는 이도 있다. 산부인과로 향하는 화영을 위해 자신의 아들을 찾는 일을 기꺼이 미뤄준 야쿠르트 아줌마. 야쿠르트 아줌마 재숙(김재화)은 임신 중인 화영을 발견하고 남편의 직장까지 데려다준다. 몇십 년 경력만큼이나 화려한 야쿠르트 차 주행 실력을 가지고 좀비들 사이로 요리조리 지나가며 화영을 목적지에 무사히 내려놓는다.


간호사 소진(배윤경)도 화영을 돕는다. 자신 빼고 병원에 있는 모든 이가 좀비로 변했지만, 병원을 지킨다. 화영이 오기로 했기 때문. 본인이 할 수 없는 영역임에도 좀비들 사이에서 화영을 기다렸고, 또 화영의 출산을 돕는다. 하지만 소진은 이미 좀비에 물린 상태. 화영의 아기를 받아주고 나서 화장실로 들어가 자살을 한다.
감사합니다.
화영을 돕는 요구르트 아줌마와, 간호사가 나올 때마다 지하철의 할머니가 생각났다. 만삭인 몸으로 지하철을 탔던 때. 그날 유난히 승객이 많았고, 민폐를 끼치기 싫어 문 쪽에 가만히 서 있었다. 물론 임산부 배려석이 비어있었다면 앉았겠지만, 젊은 청년이 앉아 있었다. 청년은 내 배를 훑어보더니 눈을 감아 버렸다.
‘뭐 그럴 수 있지’. 문에 기대 음악을 듣던 내 어깨를 누군가 툭툭 쳤다. 등이 조금 굽은 한 할머니. 자기가 앉은 자리가 비었다며 나를 그 자리로 안내했다. 자신은 다음에 내린다며 편하게 앉으라 했다. 하지만 그 할머니는 내가 내릴 때까지도 내리지 않았다. 오늘까지도, 그리고 언제까지라도 그날의 배려는 잊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