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가 함께 영화를 봅니다. 멜로물을 보며 연애 시절을 떠올리고, 육아물을 보며 훗날을 걱정합니다. 공포물은 뜸했던 스킨십을 나누게 하는 좋은 핑곗거리이고, 액션물은 부부 싸움의 기술을 배울 수 있는 훌륭한 학습서입니다. 똑같은 영화를 봐도 남편과 아내는 생각하는 게 다릅니다. 좋아하는 장르도 다르기 때문에 영화 편식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편집자 주-
여자 셋만 모여도 접시가 깨지는데, 나의 고등학교 친구들은 무려 9명이다. 9명이 모이면 유리창도 깨트릴 기세의 수다가 시작된다. 대부분 결혼을 했다 보니 대화 주제는 거의 남편 아니면 아기인데, 아기는 늘 귀여우니 늘 귀엽지 않은 남편을 다루는 것이 대화 흥미도를 높이는 데 제격이다.
“우리 남편은 옷을 맨날 똑같은 거 입어”, “아휴 내 남편 옷 맨날 사는 것보단 낫지”, “얘들아 우리집 양반은 씻지를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씹어(?)댄들 해답이야 있겠는가. 헤어질 때 입 모아 하는 말은 한결같다. 그래도 어쩌겠어, 반납도 안되고 (웃음) 참고 잘 살아보자 얘들아!
미국에서는 가능하다던데..?

남편 반품이 미국에서는 가능하단다. 물론 미국 드라마의 상상력이다. 실제는 아니니 오해 마시길. 실제가 아니니 이민을 고민하지 마시길! <로어-세상을 향한 함성> 속 한 단편 드라마인 ‘남편을 반품한 여자’의 이야기다.
<로어-세상을 향한 여정>은 「P.S. 아이 러브 유」를 쓴 세실리아 아헌 작가가 2018년 발표한 단편집 「로어」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다. 여성을 주제로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시리즈로 여성의 의미에 대해 깊게 살펴보는 이야기랄까. 다양한 주인공들을 내세워 여성들이 갖고 있는 고민과 딜레마에 대해 다룬다.
‘남편을 반품한 여자’의 여자 주인공 아누도 친구들과 남편 험담을 늘여놓는다. 현실이든 영화든 아줌마들의 빠질 수 없는 대화 주제는 남편 험담이다. 아누가 “나 비크(남편) 때문에 너무 화나”라고 말을 하자마자 친구 넷은 동시에 남편의 험담을 쏟아놓기 시작한다. “매일매일이 너무 똑같아. 감옥에 갇힌 것 같아 난 60살이야. 그런데 하는 거라곤 비크 시중드는 것뿐이지”.
앞서 나온 장면 만으로 비크의 성향은 100% 예측된다. 딸의 전시회, 엄마를 향해 존경심을 표하는 딸을 통해 아누는 뿌듯함을 느낀다. ‘내가 딸 하나는 잘 키웠어!’ 하지만 구석에서 음식만 주구장창 먹고 있는 남성. 그 남성을 보고 여성은 한숨을 쉰다. “행동하는 거 보면 창피해 죽겠어”. 그렇다. 아누의 자랑은 딸, 그리고 아누의 부끄러움은 남편 비크다. 딸의 전시회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싶었지만 비크가 집에 가자 보채는 바람에 아누는 빨리 귀가하게 된다. 아누는 화가 난다. 첩첩산중. 거기에다 화를 더 돋우는 비크. “뭐가 문제야”, “밥 줘”, “포크 내놔”. 비크의 삼단 콤보에 아누는 폭발 일보 직전이다.
반품해 버릴까!
나 또한 결혼을 하고 보니 남편의 사소한 습관들이 눈에 거슬렸다. 지금에야 어느 정도 받아들인 부분도 있고, 또 남편이 고친 부분도 있지만. 초기에는 이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진짜 왜 저래?’

남편이 지나간 자리에는 남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직접 보지 않아도 남편이 동선이 눈에 보였다. 나뒹구는 과자 봉지를 보고 “쇼파에 앉아서 과자 먹었네”. 식탁 위 약봉지를 보고 “약 잘 챙겨먹고 갔네”. 뱀이 허물 벗듯 고스란히 남겨진 남편의 흔적이 귀엽다고 생각 든 적도 있다. 신혼의 콩깍지 버프를 받은 덕분일까. 하지만 남편이 속옷을 찾느라 활짝 열어둔 서랍 문에 무릎을 대차게 박고는 콩깍지가 일순간 벗겨졌다. ‘진짜 왜 저래?’
나는 곧장 시댁에 남편의 만행을 폭로했다. 따라다니면서 치우는 신세가 됐다며 하소연하는 나를 보고 시부모님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시부모님 앞에서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는 며느리가 귀여워서 짓는 미소일 거라 짐작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니 알겠다. 시부모님은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으리. “(정리 안 하는) 우리 아들 (드디어) 해치웠네. 하자 많아도 반품은 안 된다~ 며늘아~”.

현실의 나와 달리 아누는 반품 가게로 간다. 거듭 말하지만 미국은 반품이 가능하기 때문! 매장의 ‘husband’ 코너에는 남자들이 서 있다. 비크도 이곳에 전시될 예정이라는 점원의 말에 아누는 미소가 자꾸 새어 나온다. 37년을 함께한 남편과 그렇게 끝이 난다. 그렇게 아누는 홀가분해진다.
바꿔보니 어때?
하지만 문제가 생긴다. 점원이 아누의 솔로 인생 시작에 제동을 건다. 1986년 이전에 국외에서 구매한 제품에는 적용이 안 된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점원의 말. 교환만 가능한 약관이 붙었다. 다시 말해 아누는 새 남편을 선택해야 한다.
그때 아누를 바라보며 자상한 눈빛을 날리는 남자. 반품이 아닌 교환도 꽤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아누는 스윗남을 선택한다. 애정표현도 서슴지 않는 연하남. 잃어버린 연애 세포가 깨어나는 듯한 아누. 게다가 새 남편의 직업은 화가다. 아누의 예전 꿈이기도 한 직업.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아누는 생각한다. ‘그래, 이게 결혼 생활이지’.
하지만 새 남편의 한 마디에 아누는 무너진다. “아누, 널 보면 내 엄마가 떠올라”.
이번엔 비슷한 나이대의 건강 전도사 남편을 골라온다. 활력 있고 건강한 삶을 살게 되는 것 같아 꽤 만족스러운 아누. 하지만 이 남편에게도 치명적 단점이 있다. 입을 쉴 새 없이 떠드는 잔소리꾼. 입 닫고 있던 비크가 그리울 지경이다.
바꿔보니.. 영...

좋아 보이는 남의 떡도 내 떡이 되고 나니 영 시원찮다. 친구들의 남편 자랑에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왜 우리 남편은 저 남편 같지 못할까’. 요리를 잘 한다는 친구 남편. 자기 관리를 잘 한다는 친구 남편. 명품 가방을 사줬다는 친구 남편. 온갖 남편들이 나의 남편의 비교군이 됐다.
하지만 내가 아누였다면. 남편을 husband 코너에 넣고 다른 남편을 데려올 수 있었다면. 과연 행복했을까.
여담을 말하자면 요리를 잘 한다는 친구 남편은 친구의 요리에 잔소리가 많았고, 자기 관리를 잘 한다는 친구 남편은 헬스장에 사느라 귀가가 늦었다. 명품 가방을 사줬다는 친구 남편은 경제권을 꽉 쥐고 쥐꼬리만한 생활비만 내놨다.
남의 떡이 돼야 정신 차릴래?
비크도 드디어 팔렸다. 아누의 앞집 여자가 비크를 구매한 것. 앞집 여자가 사준 옷을 입은 비크는 세상 힙한 중년 남성이 됐다.
아누는 멀찍이서 두 사람의 행복한 신혼생활을 훔쳐보는 신세가 됐다. 매일 소파에 죽치고 앉아있던 비크는 어디로 간 걸까. 앞집 여자의 차 문을 열어주고, 함께 바비큐 파티를 즐기고. 청소기를 돌린다. 집에 들어와보니 남편이 파묻혀 살던 의자가 보인다. 그렇게 비크를 그리워한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찾은 매장. 세일 코너에 비크가 앉아있는 것을 발견한다. 형편없는 가격. “왜 앞집 여자를 위해선 변한 거야? 날 위해선 아무것도 안 하더니 왜 갑자기 신사가 된 거야?”
그때 비크가 이야기한다. “우리가 처음 결혼했을 때 내가 뭘 고치면 당신은 왜 그렇게 고쳤냐고 따지기만 했어. 내가 뭘 하든 트집을 잡았지. 내가 뭘 하든 당신에게는 부족해 보였어. 그래서 하는 걸 멈췄지”. 생각해보니 아누는 비트가 뭘 하든 불평불만부터 했다. 비크는 평화를 위해 되도록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법을 선택한 것.
아누는 정신이 확 깬다. “지금까지 난 우리의 문제가 당신인 줄 알았어. 그런데 혼자 살아보니 나도 그렇게 쉬운 사람이 아니더라고. 우리는 여러 면에서 서로를 당연하게 여겼어”.
함께 고난을 이겨내기도 하고 행복을 느끼며 37년이란 세월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신의 인생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다시 집에 가자!
세일 코너에 있는 비크를 아누는 카트에 담는다. 그리고 아누는 달린다. 계산도 하지 않고 비크를 태운 카트를 힘껏 민다. 비크가 묻는다. "훔치는 거야? 그럼 영수증도 없어". 아누가 답한다. "필요 없어. 다시 반품할 리는 없으니까".
오늘도 남편은 화장실 불을 켜고 출근했다. 환하게 켜진 불을 보고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비트가 항상 앉아있던 소파를 보며 남편을 그리워하는 아누. 그 생각을 하니 환하게 켜진 불이 밉지만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