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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상상, 세상과 시네마를 넘나드는 거대한 〈그랜드 투어〉

씨네플레이
2025 아카데미 시상식
2025 아카데미 시상식

2025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 하나. 진행자 코난 오브라이언이 'CinemaStreams'라는 플랫폼을 홍보하는 페이크 광고에 등장해 말한다. 집에서 영화를 스트리밍해 보는 게 질렸는가? 그럼 이곳 CinemaStreams로 오시라. 800개의 아이폰을 붙여 놓은 것과 같은 압도적 스크린이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당신은 재생 버튼을 누를 필요도 없다. 그저 편하게 앉아 당신을 위해 준비된 것들을 즐기시길. 그러자 광고 속 관객 한 명이 소리친다. “그게 영화관 아닌가요?”. 스트리밍 서비스의 성장으로 더 이상 영화관을 찾지 않는 세태를 그린 이 기막힌 풍자쇼는 같은 시상식에서 <아노라>(2024)로 감독상을 받은 션 베이커의 수상소감으로 마침내 완성된다. “우리는 어디에서 영화와 사랑에 빠졌을까요? 바로 영화관에서입니다”라는 자문자답으로 시작된 그의 소감은 영화관에서 타인과 함께 영화를 감상하는 경험이 점점 사라지는 현실을 호소하며 후배 영화감독들에게 “큰 영화관에서 상영될 수 있는 영화를 계속 만들어달라”는 당부로 이어져 관객의 환호를 받았다.

한국 영화의 흥행 부진과 잇따른 극장 폐쇄로 영화 산업이 위기에 처했다는 인식은 이제 익숙하다. 팬데믹 기간 동안 미국에서도 1000개 이상의 영화관이 문을 닫았고,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 당연한 시대는 저물어가고 있다. 영화 매체가 직면한 위기는 전 세계적 흐름이다. 한때 영화관의 어둠은 거의 종교적이라 할 만큼 경이로웠다. 현실만큼 생생하고, 실제 삶보다 훨씬 극적인 무언가를 공유했던 특별한 장소였건만, 이제 영화관의 쓸모는 정말 다한 것일까. 최근 미겔 고메스 감독의 <그랜드 투어>가 개봉했다. 영화관의 대형 스크린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영화의 '본질'을 지켜달라 숨 가쁘게 소감을 읽어 내려가던 션 베이커의 떨리는 목소리가 맴돈다. <그랜드 투어>를 본 후 그가 강조한 영화의 본질, 그리고 영화관의 쓸모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쫓기는 남자, 쫓는 여자

〈그랜드 투어〉
〈그랜드 투어〉

1918년, 미얀마의 여객선 터미널에서 에드워드(곤살루 와딩톤)는 7년 만에 만나는 약혼녀 몰리(크리스타 알파이아테)를 기다리고 있다. 정장을 차려입고 꽃다발을 품에 안은 채 약혼자를 맞을 준비를 하지만, 저 멀리 다가오는 배를 바라보며 그의 마음은 착잡하다. 혼인의 굴레를 목전에 두고 문득 자신의 미래가 두려워진 에드워드는 충동적으로 도피를 결심한다. 손에 쥔 꽃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변명의 편지를 쓴 후, 그는 싱가포르행 배에 오른다. 이후 태국, 베트남, 필리핀, 일본, 중국 등지를 거치며 몰리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여행을 계속한다. 우유부단한 약혼자를 뒤쫓는 건 당찬 여자 몰리다. 포기를 모르는 몰리는 에드워드와 결혼하기 위해 치열하게 그의 뒤를 쫓는다. 추격전은 외국인이라곤 찾기 힘든 양쯔강 상류 오지, 티베트의 접경까지 이어지고, 그 끝에서 관객은 뜻밖의 빛과 조우하게 된다.  

 

제3의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영화

〈그랜드 투어〉
〈그랜드 투어〉

17세기 중반부터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 상류층 귀족 자제들이 당시 프랑스나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선진 문물을 익히던 유행을 지칭하는 '그랜드 투어'는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의 니즈에 맞게 신비한 동양의 풍광을 쫓아 여러 대륙을 횡단하는 규모로 확장된다. 포르투갈의 영화 거장 미겔 고메스 감독은 재구성된 제국주의적 '그랜드 투어' 관행 위에 스크루볼 코미디의 경쾌한 에너지와 풍경영화의 소박한 공백을 삽입해 독특한 영화를 완성한다.  

〈그랜드 투어〉
〈그랜드 투어〉

흑백과 코로나19 당시의 컬러풀한 세계를 오가는 <그랜드 투어>는 미겔 고메스 감독이 16mm 필름에 담아낸 현대 아시아의 매혹적인 아카이브 이미지와 함께, 아이리스(피사체를 둥근 원에 가두면서 화면이 암전되는 기법), 수퍼 임포즈(두 개 이상의 영상을 겹쳐서 하나의 장면으로 보여주는 기법) 같은 초기 영화 기법을 사용해 1900년대 초의 무성영화 감성을 전달하며 영화 예술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과거와 현재가 겹치고, 다큐멘터리와 극영화가 교차하며, 같은 장소를 여행하는 서로 다른 남녀의 사정이 나열되고, 현실과 꿈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랜드 투어>는 혼란스러운 영화다. 미겔 고메스 감독은 이것에 대해 “픽션의 맥락에서 화면이 태국의 어선에서 스튜디오(에서 재현된) 캐릭터, 베트남의 오토바이 타는 사람으로 전환될 때 캐릭터의 내면이 이 이미지와 연결되어 어떤 울림을 가진다. 우리는 이러한 시대착오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연속성은 유지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관객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1918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픽션이라는 약속을 받아들이면 무엇이든 받아들이게 돼 있다”라고 설명했다.

〈그랜드 투어〉
〈그랜드 투어〉

<그랜드 투어>는 시간과 공간,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독창적인 미학적 시도를 통해 관객에게 몽환적인 체험을 선사한다. 두 사람의 여정은 꿈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주며, 이 과정에서 관객은 시간과 공간의 좌표계를 자유롭게 횡단하는 초월적 경험에 빠져든다. 영화의 내레이터는 인물들이 국경을 넘을 때마다 언어를 바꾸어 등장하는데, 이는 내레이션과 화면의 풍경 간의 불일치를 만들어 관객에게 혼란을 주기도 한다. 일부 장면은 다큐멘터리적 재현으로 사실감이 극대화되지만, 동시에 특정 국가의 전통과 자연경관은 환상적으로 연출되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더욱 모호하게 만든다. “서로 반대되는 요소를 화면에 배치함으로써 관객의 머릿속에서 충돌을 일으키고, 이를 통해 강한 긴장감과 함께 제3의 무언가를 창출”하길 바랐던 감독의 의도는 이뤄진 듯하다. 전통 인형극, 노래방 기계에서 울러퍼지는 팝송, 오토바이 행렬 등 현대 아시아의 모습을 담은 이미지가 안개가 자욱한 강을 건너가며 매혹적인 밤의 숲을 가로지르는 모험 소설 속 상상의 아시아와 충돌하며 관객의 마음에는 저마다의 심상이 너울댄다.

 

영화의 목적지는

〈그랜드 투어〉
〈그랜드 투어〉

미겔 고메스 감독의 <그랜드 투어>는 단순한 여정의 기록을 넘어, 영화의 시대와 예술의 영속성을 탐구하는 철학적 서사로 다가온다. 이 작품은 여행이라는 틀 안에서 삶과 죽음, 사랑과 상실, 그리고 예술의 지속 가능성을 교차시키며 영화가 죽어가는 시대를 심폐 소생하듯 한 줄기 빛을 내린다. “국가, 성별, 시대, 현실과 상상, 세상과 시네마 등 분리된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거대한 투어”에 관객을 초대하고자 했던 미겔 고메스 감독의 야심이 티베트 근처에서 마무리된다는 것 또한 의미심장하다. 이는 단순한 공간적 종착점이 아니라, 영화가 존재하는 이유를 되새기게 하는 상징적 결말로 다가온다. 영화의 자리를 애도하긴 아직 이르다. 그러니 분리된 모든 것을 가로지르는 이 장대한 여정을 어서 극장에서 만나보자. 제77회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