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분노’하며 살고 있는지, 혹은 ‘디아스포라’의 뜻에 대해서 한 번쯤 고민해봤다면 이 드라마가 남다르게 느껴질 것 같다. 지난 4월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성난 사람들>(원제 BEEF)은 아시아계 미국 작가진과 배우들이 모여 만든 작품으로 화제가 됐다. 최근 아카데미 시상식을 휩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성과도 있으니 아시아계 배우나 감독, 실력 좋은 스태프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 이제 특별한 일도 아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산업의 주변부에 머물러야 하는 사례가 많다. 또한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사는 이주민들의 역사, 그들 삶의 궤적을 조명하면서 디아스포라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 곧 수많은 아시아계 창작자들의 능력을 존중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이삭 감독의 <미나리>, 애플 TV+의 <파친코> 등에 이어 또 하나의 한국 이민 세대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작품의 계보를 잇는 <성난 사람들>이다. 이야기의 끝이 어디로 향할지 종잡을 수 없는 파국의 재미 안에 짚어볼 구석이 상당히 많다. 지금부터 <성난 사람들>을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하는 이유를 모아봤다.
포인트 1. 분노라는 시대정신을 표현하다
내 안의 화를 다스리는 일은 언제나 중요하다. 꼭 2023년 현재가 아니더라도 역사적인 ‘분노’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면 늘 주목할 일들이 벌어지곤 했다. 특히 분노의 주체가 민중, 백성, 대중일 때 시대가 바뀌거나 전쟁이 일어나거나 새로운 문화 현상이 벌어지는 등의 큰일들이 벌어졌다. 수많은 영화나 드라마들이 역사적인 맥락 안에서 변화하는 민심을 헤아리는 시도를 해왔다. <성난 사람들>은 별것 아닌 것 같은 일상의 우연한 사고가 엄청난 범죄, 수많은 사람들의 삶 전체를 뒤흔들어 놓는 사건으로 번지게 된다. 그러면서 주목하는 것은 미국 이민 세대들, 특히 아시아인들의 분노에 대해 주목한다.
사람이 죽고 집안이 몰락하고 온 동네가 쑥대밭이 되는 이 모든 사건의 발단은 주차장 시비에서부터 시작됐다. 이민 2세대인 주인공 대니(스티븐 연)는 모텔 숙박업을 하다가 불법 판매에 연루되어 라이선스를 몰수당한 부모를 대신해 동생 폴과 함께 돈을 벌어야 하는 가장이 됐다. 그런데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아 자살을 결심한 상태다. 차에서 연탄을 피워서 죽겠다 결심을 하고 마트에서 여러 기구들을 샀던 그는 마음의 변화가 일어 환불을 하러 갔다가 거절당하고 돌아 나오는 길이다. 무엇 하나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하얀 SUV 차량 하나가 난데없는 시비를 걸고 도주한다. 그리고 그 차량과 추격전을 벌이며 온 동네를 들쑤셔 놓는다. 이름하여 ‘로드 레이지 사건’에 연루된 대니는 자신에게 욕을 하고 떠난 차의 주인이 지역 사회에서 굉장히 성공한 부자 에이미 라우(앨리 웡)란 사실을 알게 되고 그녀의 집 주변을 스토킹한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서 분노하는 인물은 주인공 두 사람 외에도 많다. 아들 조지와 결혼한 며느리 에이미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어머니의 분노가 있을 것이고, 사사건건 트집 잡고 잔소리하는 형의 등쌀에 눌려 사는 동생 폴의 분노가 있다. 성공한 사업가 에이미를 시기 질투하는 협력업체 직원 나오미의 분노, 동생들이 자신의 뒤통수를 쳤다고 생각하는 대니와 폴의 사촌 아이작의 분노, 한인교회의 성공한 일원으로 인기를 독차지하던 에드윈이 대니에게 자리를 빼앗기고 느끼는 분노 등등 모든 인물들이 잔뜩 화가 나 있는 상태다. 이 넘쳐나는 분노를 대체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 걸까.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벌어지는 촌극이 바로 <성난 사람들>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포인트 2. 아시아 영화인들의 저력을 보여주다
<성난 사람들>은 숨 쉴 틈 없이 밀려드는 사건의 연속이 눈길을 사로잡다 못해 멱살까지 부여잡고 끌어당기는 이야기다. 황당하고 기가 막힌 사건의 전모를 더듬어보기 이전에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아시아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아시아 창작자들이 주도해서 만들었다는 점이다.
HBO <실리콘밸리>의 각본과 제작을 맡은 바 있는 이성진 감독은 <성난 사람들>의 제작을 총괄한 쇼러너(제작 총괄 및 시리즈의 전체적인 톤과 전개 방향을 결정한다)로, 앞으로 열릴 에미상 같은 큰 시상식에서 화제를 몰고 올 가능성이 크다. 현재 <성난 사람들>은 올해 열리는 에미상 시상식 리미티드 앤솔로지 시리즈 부문에 출품된 상태. 주연을 맡은 스티븐 연은 <미나리>로 아시아계 미국인 최초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바 있다. 상대 배우 앨리 웡은 이미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 큰 성공을 거둔 바 있지만 아직 에미상 후보에 오른 적은 없다. 산드라 오가 2018년 BBC 아메리카 드라마 <킬링 이브>로 첫 번째 후보가 되었고, 이후 세 번 더 후보에 올랐지만 한 번도 수상하지 못했다. 만약 앨리 웡이 <성난 사람들>로 에미상 후보에 오른다면 유력한 수상 후보일 가능성도 점쳐진다. 뿐만 아니라 대니의 남동생 폴을 연기한 영 마지노, 에이미의 남편 조지를 연기한 한국계 미국 배우 죠셉 리, 조지의 엄마이자 에이미의 시어머니 후미를 연기한 배우 패티 야스타케, 조던의 시누이 나오미 포스터 역의 애슐리 박 등 <성난 사람들>의 출연진 상당수가 한국계 배우로 채워졌고 좋은 연기를 보여줬다.
포인트 3. 아시아 이민 세대의 세태를 담아내다
제목 ‘BEEF’는 대체 무슨 뜻인지, 그리고 각 에피소드마다 시구절이나 영화 제목을 연상시키는 문장의 소제목이 어떤 뜻인지에 대해서는 아래 포스트에서 자세하게 소개한 바 있다.
이성진 감독과 제작진이 의도한 메시지라는 것은 종합해보면, 이사이 이민 세대의 마음속 깊은 곳에 쌓인 분노다. 주인공 대니와 에이미는 일견 평범한 삶을 살아온 것처럼 보이지만 두 사람 모두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분노를 제대로 삭이지 못하고 산다는 게 드러난다. 심지어 에이미는 겉으로 보기에 굉장히 화려하고 엄청난 부를 이룬 성공한 이민자처럼 보이지만, 유별난 시어머니와 성적 매력을 잃어가는 남편을 불편하게 여기는 마음이 자리하고 있다. 종종 살인 충동도 느낄 정도로 분노가 축적되어 있는 상황에서 눈앞에 나타난 대니와 묘한 연대의식을 느끼게 된다. 상식적으로 연대의 감정이란 긍정의 기운을 머금고 있으며 생산적인 활동을 함께 하거나 힘들 때 위로가 되어줄 수 있는 존재끼리 느끼는 무언가다. 그런데 대니와 에이미는 서로가 서로를 파괴하지 못해 안달이 난 상황이며, 주변 사람들까지도 전부 파국의 소용돌이 휘말리게 된다.
그렇다면 일상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주차장 시비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유추해 볼 수 있는 사실이 있다. 아시아 이민자들은 무엇에 분노하는가. 어릴 때부터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자수성가의 미덕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고 자라온 이민 2세대들은 평생을 노력해온 부모의 삶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걸 목격했다. 한국에서는 90년대에 IMF가 있었다면, 미국에서는 2008년 세계 금융 위기가 있었다. 멀쩡하게 잘 살고 있던 사람들이 터전을 빼앗기고 길거리에 나앉는 일들이 벌어졌다. 다시 정정하자면, 잘 살고 있던 이들이 아니라 집 한 채가 가진 것의 전부였던 서민들의 삶이 무너졌다. 대니의 부모가 금융 위기 때문에 모텔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지만, 어느 날 갑자기 가장이 된 이민 2세대 대니의 고통은 이러한 현실 속 사람들의 처지를 대변한다. 그렇다면 대니는 누가 위로해주나. 위로는커녕 난데없이 나타난 차량 하나가 시비를 걸고 가니까 대니의 분노가 폭발한다.
포인트 4. 파국의 엔딩이 남겨주는 위로
모름지기 예술작품을 볼 때 관객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삶의 불안 요소나 해결되지 않는 근심 같은 걸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대리만족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파국의 끝에서 <성난 사람들>의 시청자는 어떤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될까. 아직 이 드라마를 보지 못한 독자들도 있을 테니 자세한 스토리 전개를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목숨을 걸어야만 끝이 날 것 같은 심각한 파국의 엔딩을 보고 있자면, 이제서야 모든 상황이 종결됐다는 불편한 안도감이 찾아온다.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이 원점 혹은 제자리를 찾게 된 것이 결코 아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모든 요소가 소위 말해 끝장이 나버리는 결말이 찾아온다. 그 과정을 지켜본다는 것은 사실 드라마 시청자 입장에서는 너무 즐겁고 괴롭고 통쾌하다가도 갑갑하고 때로 무력감마저 느끼게 된다. 그래서 불편한 안도감이라고 표현했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분노를 토해내려면 이 정도 결과 정도는 단단히 각오하고 쏟아내야 한다는, 강한 경고의 메시지는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그걸 위로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마음이 한결 편해지는 것 같다. <성난 사람들>은 다 보고 나면, ‘현명하게 화를 다스리는 법’ 같은 걸 검색하게 되는 드라마다. 올해 에미상 시상식에서 또 한 번 아시아계 배우들이 파란을 일으키는 좋은 결과가 있기를 응원한다.
김현수 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