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감독' 문소리다. 문소리가 연출한 옴니버스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가 유수의 영화제를 돌아 정식 개봉했다. 결과물은 기대 이상이다. 연기 잘하는 배우가 내놓은 '소품'이라 칭하기엔 그 안에 담겨 있는 재능의 빛이 상당하다. "배우치고는 잘 찍은 영화, 배우 문소리가 찍은 작품이라서 놀라운 영화가 아니다. 그냥 전문적으로 숙련된 신인 연출가의 놀라운 데뷔작이다"(박우성 영화평론가)라는 평이 과찬이 아니다. 영화를 이끈 수장으로서 쉴틈 없이 영화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는 문소리를 만나 연출작 <여배우는 오늘도>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늘 영화를 모른다고 생각했다." 인생이 마음먹은 것처럼 돌아갔다면, 문소리는 연극 무대에서 더 오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연극이 좋아 학부를 졸업하고 곧장 연극과에 입학하려던 그녀는,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1999)에 출연하게 되면서 지금 우리가 아는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배우' 문소리가 됐다. 영화가 전공이 아니란 생각에 남들보다 더 열심히 매달려왔고, "세월이 지나 나이에 '4'자 더하면서 영화를 제대로 공부해야겠다"는 뜻이 섰다.

<여배우는 오늘도>는 문소리가 대학원 영화연출전공 과정의 일환으로 만든 단편들로 구성된 작품이다. 배우 문소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여성 배우에게 던져지는 한국 남자들의 못난 시선을 꼬집는 <여배우>, 엄마-딸-며느리 등 갖가지 역할까지 도맡아야 하는 배우의 고된 삶을 따라가는 <여배우는 오늘도>, 장례식장을 배경으로 예술가에 대한 갑론을박이 한바탕 쏟아지는 <최고의 감독>이 1, 2, 3막으로 묶였다.

각 단편을 가로지르는 테마가 뚜렷해 보이지만, 영화는 '이미지'로부터 시작했다. 1막 <여배우>의 경우, 한국 남자들의 그릇된 시각보다 산을 오르는 자신의 뒷모습이 먼저 떠올랐다고 한다. "큰 산을 넘어야 하는 기분이다, 매번 다른 산이라 산행이 좀체 쉬워지지 않는다, 는 표현을 자주 한다. 그래서 산을 걷는 뒷모습이 배우인 나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할 때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3막 <최고의 감독> 역시 예술적인 영화가 무엇이냐는 설왕설래보다 "사람이 드문 장례식장에 앉은 두어 사람을 영정사진이 바라보고 있"는 공간이 우선이었다.

1막 <여배우>

이미지로부터 비롯된 이야기들은 쉽고 명쾌하다. '경험담'이 아닌, 전적으로 문소리가 스스로 만든 '픽션'이지만, 한국을 사는 배우의 일상이 고스란히 만져지는 것 같다. "실제 관객들이 진짜라고 생각할 만한 상황들"을 가져오되 "스스로가 거기에 푹 빠져버리거나 그 상황을 너무 꾸미는" 방향은 배제하려고 끊임없이 자문했기에 얻을 수 있었던 자연스러움이다. 1막을 처음 떠올리게 했던 이미지인 산을 걸어가는 모습도 촬영까지 마쳤음에도 "그 그림 하나에 의미를 지나치게 많이 부여한 것 같다"는 느낌 때문에 결국 영화에서 들어낼 수밖에 없었다. 한 배우를 둘러싼 여러 단면들이 켜켜이 모인 <여배우는 오늘도>는 즉각적으로 한국 사회를 사는 여성의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럼에도 더부룩한 감상을 남기지 않는 건 "의미는 잘 숨겨줄수록 빛나는 법"이라는 감독 문소리의 소신 때문일 것이다.

2막 <여배우는 오늘도>

<여배우는 오늘도>는 웃기다. 녹록잖은 현실을 다뤄도 감정에 호소하지 않는 균형 감각도 좋지만, 일상의 폐부를 가격하는 지독한 유머 감각이 발군이다. 지극히 한국적인 상황과 캐릭터로 채워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외 영화제에서 객석을 빵빵 터트렸다. 문소리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보며 평소 많이 웃는다며, 일찌감치 예쁘다고 호평이 자자했던 포스터 촬영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굉장히 넓은 운동장에서 새빨간 드레스를 입고 뛰어야 했다. 개미 한 마리 없는 삼복더위에 사진, 드레스, 헤어 하는 친구들이랑 옹기종기 뛰어다니는 걸 저 위에서 풀샷으로 찍어봤는데 너무 웃기더라. 이거 돈 받고 하는 것도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고, 다 내가 저지른 일이다 했더니, 다같이 엄청 웃었다. 몸은 힘들어도 그런 아이러니한 순간이 진짜 재미있다." <여배우는 오늘도>에서 웃음이 터지는 순간 역시 사람들이 제딴엔 아등바등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볼 때다.

문소리는 연출작을 내놓은 우리나라 배우들 가운데 현장 경험이 가장 두터운 신인감독일 것이다. 대작부터 거장들의 소품들까지, 역할의 비중을 가리지 않은 채 다양한 필모그래피를 구축해왔고, 단편 <이사>(2014)에선 조감독으로 활약한 적도 있다. <이사>의 주연이었고 박찬경 감독의 <만신>에도 함께 출연했던 배우 류현경은 "지금까지 만난 조감독 중에 현장 장악력이 제일 뛰어나다" 평했다고. 아무래도 배우인지라 그들에 대한 배려도 남달랐을 터. "배우를 오래 했으니까 그 입장에서 더 많이 생각하고, 대화하고, 편안하게 해주는 게 있을 거라고는 생각한다. 근데 뭐 이건 내 입장이겠지. 상대방은 문소리가 감독이고 주연까지 하는데, 그 앞에서 연기해야 하니까 더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 배려와 긴장 때문일까, 문소리를 둘러싼 주변 배우들의 적절한 퍼포먼스는 <여배우는 오늘도> 속 일상의 생생한 공기를 보여주는 주요한 동력이 됐다.

촬영현장의 문소리

'여성'은 영화계에서도 뜨거운 화두다. 영화 속 여혐적 요소에 대한 지적이 연이어 쏟아지고 있고, 내로라하는 여성배우들도 일이 없다는 볼멘소리가 이제는 꽤나 익숙해진 상태이기도 하다. 한국 최고의 배우라 추앙받는 문소리가 여성 배우의 현실을 그렸다는 점만으로도 <여배우는 오늘도>에 대한 세간의 관심도 남다르다. 개봉을 맞아 전도연, 공효진, 천우희, 김태리 등이 문소리와 함께 GV를 진행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영화계에도 '여성' 혹은 '페미니즘'이 담론화되길 기대하고 있다. "사실 GV라도 많이 열면 극장에서 좋은 시간에 많이 걸어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크다. 여배우들끼리 뭉쳐보자, 더 큰 담론을 형성해보자, 이런 의도가 있진 않다. 긍정적으로 영향을 끼쳤으면 좋겠다 싶지만, 그런 기대를 내가 짊어져야겠다는 건 아니다. 다만 반응이 점점 커진다면 그때 가서 어떤 일을 도모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여배우는 오늘도> 언론시사회 기자간담회에서

<박하사탕>으로 데뷔한 문소리는 올해로 배우 생활 18년째에 접어들었다. 인터뷰를 마치며 1999년과 2017년의 문소리는 어떻게 다른가 물었다. "그때는 지금보다 영화를 몰랐다. 덜 사랑하기도 했고. 지금은 좀 더 그때보다는 더 알아가고 있고, 관계도 훨씬 깊어진 것 같다." 지금껏 수많은 영화들에서 보여준 선명한 연기를 생각해보면, 앞으로 더 대단한 걸 보여줄지 기대가 한껏 부풀 수밖에 없는 대답이다. 이제 막 대중에게 공개된 <여배우는 오늘도>는 영화에 대한 더 큰 사랑을 안은 문소리가 오늘도, 내일도 달릴 거라는 걸 증명한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문동명

재밌으셨나요? 아래 배너를 눌러 네이버 영화를 설정하면 영화 이야기, 시사회 이벤트 등이 가득한 손바닥 영화 매거진을 구독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