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이치가 그렇듯 사람도 같아서 우리 곁에 있을 때는 소중함을 모르고 그냥 그 사람이 영원히 그 자리에 있겠거니 하며 안심하고 있다가 그 존재가 없어지고 난 뒤에야 빈자리를 깨닫고 오열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배우 김주혁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황망해 순간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문득 들었던 생각이다.

"일 없는 동네 아줌마나 탐낼 만 한 직업, 동네 반장을 하고 있는 남자. 훤칠한 키에, 수려한 용모, 모르는 일도 없고 못하는 일도 없는 30살의 남자 홍두식, 그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특히 그의 군 제대 후 3년의 공백은 그를 더욱 미스터리하게 만든다. 그가 한미 정상회담에서 동시 통역관이었다는 사람도 있고 유명 가수의 보디가드였다, 단신으로 수영해서 대서양을 건넜다는(!)소리도 있다. 귀신도 울고 간다는 이 남자에게 일생일대의 태클이 들어왔다!!"

반장이란 단어만 들어도 아시리라 생각한다. 영화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의 네이버 영화 소개 중 일부를 가져왔다.

<홍반장>

다른 사람들도 비슷했겠지만 나 역시 <홍반장>을 통해 김주혁이라는 배우를 처음 접했다.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 걸맞게 뭔가 잘생겼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한군데 비어 있는 것 같은 사람, 우리 주위의 흔한 형들처럼 올곧고 고집도 있지만 마음 약하고 착한 사람,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웃으며 넘기는 여유를 갖고 있는 우리 동네 형 같은 사람, 그런 이미지를 대표하는 사람이 김주혁이었던 것 같다.

그런 이미지가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해 준건 바로 <1박 2일>의 구탱이형. 로맨틱 코미디에 주로 많이 나왔었지만 정극 연기도 많이 했고, 아주 톱스타까지는 아니었지만 훌륭한 필모그래피를 갖춘, 뭣보다 배우로서의 아우라를 갖고 있는 김주혁이라는 사람이 예능에 고정 출연한다고 했을 때, 그것도 그냥 예능이 아니라 야생을 표방하는 <1박 2일>에 출연한다고 했을 때 고개를 갸웃거렸었다.

하지만, 그는 구탱이형으로서 너무나 훌륭하게 그 자리를 빛냈다. 찬연히 빛나는 배우의 아우라는 잠시 뒤에 숨기고 이빨에 김을 끼우고 주근깨를 그려 분장한 구탱이형의 존재를 처음 봤을 때 나는 정말 놀랐다. 고 이주일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나는 웃길 줄 아는 사람이지 웃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 바로 김주혁이라고 난 생각했었다. 저 멋진 사람이 저렇게까지 망가져가면서 사람들을 웃기는 모습을 보며 인간의 넓이에 감동했었다.

그렇게 매주 <1박 2일>을 챙겨보다가 그가 더 이상 출연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유를 듣는 순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배우인 이상 이미지가 고정되는 것은 모험이었을 것이고 향후 그가 하고자 하는 일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은 그에게도 많은 고민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예능을 떠났다.

<공조>

그리고 그는 다시 대중 앞에 변신해 화려하게 복귀했다. 바로 <공조>의 차기성. <1박 2일>의 구탱이형으로만 익숙한 일반 대중들에게 그는 그야말로 한방을 보여줬다. 명배우는 눈으로 연기를 한다고들 한다. 극장에서 그의 눈을 보았을 때 그야말로 소름이 끼쳤다. <1박 2일>에서 동생들에게 골탕을 먹고 투덜거리던 선한 눈은 간데없고 악기와 독기로 똘똘 뭉친 냉혈한의 차가운 눈이 거기 있었다. 유해진과 현빈의 연기도 좋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차기성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렇게 그는 배우로서 자기 자신의 깊이를 대중에게 다시금 보여줬다.

그 뒤로도 드라마 <아르곤>에서 호평을 받고 2018년 개봉 예정인 영화 <흥부>, <독전> 등에 출연하며 필모그래피를 확장해가던 그는 바로 얼마 전, 황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홍반장>

1998년 SBS 드라마 <흐린 날에 쓴 편지>로 데뷔한 그는 이후 영화 <세이예스>, <싱글즈> 등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했는데, 사견임을 전제로 나는 홍반장의 홍두식이 실제 김주혁에 가장 가까운 캐릭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1박 2일>에서 느꼈던 따뜻함, 인간에 대한 살가운 시선, 뭣보다 그다지 독하지 못할 것 같은, 살짝 손해 보고 살 것 같은, 그래도 그걸 그다지 힘들어 하지 않는 그의 여유로움과 따사로움이 그 안에서 가장 많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필자도 김주혁의 또래다. 이 나이쯤 되면 선배든 후배든 주위에서 나보다 먼저 세상을 뜨는 일을 제법 겪게 된다. 그렇지만 일면식도 없는 그냥 연예인의 죽음이 이렇게 아쉽게 느껴진 건 정말 처음이다. 연기력도 연기력이지만 아무 근거도 없이 어렴풋하게 느꼈던 그의 사람됨이 너무나 아쉬워서, 그런 사람이 내 옆에 정말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은 안타까움이 감정이입을 하게 만드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리큐르(알코올에 향료, 당류, 약초 등 다른 첨가물을 섞어 만드는 술)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약초 계열의 리큐르는 가끔 마시는 편이다. 페르넷 브랑카에 소다를 타서 마시기도 하고 b&b를 만들어 마시기도 하지만 이렇게 추모할 일이 생기면 대개 압생트를 써서 칵테일을 만든다. 영화에 나오는 술은 아니지만 이 글을 쓰는 내내 이 칵테일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래서 그에 대한 추모의 마음으로 이 칵테일을 만들었다.

'Death in the afternoon'(오후의 죽음)이라는 칵테일이다.

Death in the afternoon. (출처 : liquor.com)

Death in the afternoon1932년 발행된 책 이름이자 칵테일 이름이다. 책과 마찬가지로 헤밍웨이가 처음 만들었다고 알려졌으며 한때 유럽에서 악마의 술로 유명했던 압생트와 축하할 일이 생길 때 따곤 하는 샴페인을 섞어 만든다. 헤밍웨이가 말한 레시피는 다음과 같다.

"샴페인 글래스에 압생트 1 jigger(칵테일을 계량할 때 흔히 쓰는 도구. 1 jigger라 하면 보편적으로 1온스, 30ml)를 넣고 압생트의 유정분이 하얗게 보일 때까지 잘 냉각시킨 샴페인을 조금씩 넣는다. 세 번에서 다섯 번에 걸쳐 천천히 마신다."

레시피에 따라서는 샴페인을 먼저 넣고 그 위에 압생트를 띄우기도 하고, 압생트 대신 페르노나 리카르를 쓰기도 한다. 사실 어떻게 만들든 별 상관은 없다. 어떻게 만들어도 샴페인의 맛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압생트의 맛만 기괴하게 남아 입 안에서 복잡한 맛과 향을 남긴다. 돗수가 높아서 많이 마시기도 힘들다.

추모라기보다는 한탄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안타까운 죽음 같은 칵테일이다.

인터넷 어디선가 읽은 추모의 글에선 고 김주혁 배우를 가랑비 같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싱글즈>, <홍반장>, <프라하의 연인>, <광식이 동생 광태>를 거쳐 <뷰티 인사이드>를 지나가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천천히 적셔오더니 어느새 흠뻑 젖어버렸다고. 그 글을 본 순간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로맨틱 코미디를 거쳐 <1박 2일>을 지나 갑자기 등장한 북한군 장교에 드라마 <아르곤>까지.

우리는 너무 아까운 배우를 잃었다.

당신을 잊지 않고 기억할 것입니다. 부디 우리의 기억 속에서, 좋은 곳에서 편안하게 쉬시길. Rest in Peace. 우리의 홍반장. 구탱이형.

우리들의 영원한 구탱이형, 김주혁을 기억하며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

감독 강석범

출연 김주혁, 엄정화, 김가연

개봉 2004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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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렉 / 술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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