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C 코믹스의 인기 캐릭터 할리 퀸과 인기 비디오 게임 프랜차이즈 <배트맨: 아캄>의 공통점은? 둘 다 작가 폴 디니의 자식들이라는 것이다. 할리 퀸 같은 경우 2015년 이후 할리 퀸이 등장하는 모든 간행물의 첫 페이지에 '할리 퀸은 폴 디니와 브루스 팀의 창작물입니다'라는 문구가 들어가는데, 이렇듯 별도의 작가/저작권자 표기는 DC 코믹스 캐릭터 중 슈퍼맨과 배트맨 외에는 유례가 없던 관행이다. 현 시점에서 할리 퀸의 인기와 DC 코믹스 내에서의 지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는 뜻이다.

폴 디니

성공한 덕후
할리 퀸을 만든 폴 디니는 누구일까? 대표적인 '성공한 덕후' 중 한 명이다. 이탈리아계 미국인인 부친이 꽤 규모 있는 광고회사를 경영한 덕에 폴 디니는 유복하게 자랐다. 어렸을 때부터 애니메이션과 만화책에 관심이 많았는데 의대나 법대에 진학하기를 바랐던 부친의 소망과는 달리 미대에 진학하였다. 매일 집에서 나가지도 않고 배트맨 만화를 따라 그리던 어린 폴 디니가 걱정되었던 부모는 그를 주기적으로 정신과 상담까지 받게 했다고 한다. 미대를 졸업한 그는 당시 소규모 회사였던 워너브러더스 애니메이션 사업부에 입사하게 된다. 

워너브러더스 애니메이션은 1930년대 전설의 '루니툰즈'를 제작한 영광의 시절을 뒤로 하고 워너브러더스 스튜디오의 한 부서쯤으로 전락한 상태였다. 그가 처음 맡은 프로젝트는 1990년대 초 우리나라에서도 인기리에 방영된 <타이니 툰 어드벤쳐스>(국내 제목은 <말괄량이 뱁스>) <배트맨: 애니메이티드 시리즈>였는데 후자의 경우 시청률도 높았지만 뛰어난 완성도와 스타일, 그리고 아동용 만화라는 한계를 뛰어넘는 깊이로 방영 당시에도 높은 평가를 받았고 (설정이 변경된) 미스터 프리즈와 할리 퀸 같은 인기 캐릭터들도 다수 탄생시켰다. <배트맨: 애니메이티드 시리즈>의 작가로 시작했던 폴 디니는 점차 능력을 인정받아 방영 후반부에는 시리즈의 총 책임자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며, 1993년 에미상을 5개나 수상하면서 명실공히 성공한 만화/애니메이션 작가로 인정받는다.

2016년 출간된 그래픽 노블 <다크 나이트: 실화 배트맨 이야기>(Dark night: A True Batman Story)는 그의 당시 상황을 자전적으로 솔직하게 풀어낸 작품이기도 하다. 업계에서 인정받고 경제적으로도 풍족해진 30대의 성공한 덕후, 폴 디니는 모든 덕후들이 꿈꾸는 생활을 시작한다. 비디오 게임들이 넘쳐나고 책상과 진열대에는 비싼 액션피규어들이 즐비하며 벽에는 고가의 애니메이션 셀 원화들이 주렁주렁 걸려있는 집에서의 싱글 라이프. 하지만 1993년 어느 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두 명의 불량배한테 얼굴이 심하게 골절될 정도의 폭행을 당하면서 그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계기를 갖게 된다.

폴 디니의 체험이 묻어난 <다크 나이트: 실화 배트맨 이야기>

외상후스트레스장애와 우울증의 산물
두 차례의 수술 이후 찾아온 외상후스트레스장애와 우울증을 겪으면서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중요한 사람들이 누구인지에 대해 고찰하게 된다. 두려움으로 직장에도 나가지 않고 은둔 생활을 하며 알코올 의존도만 높여가던 그의 회복을 도운 것은 다름 아닌 그가 작업하던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이다. 배트맨, 조커, 할리 퀸, 펭귄, 투 페이스 등의 캐릭터들은 그의 상상 속에 계속 등장하여 성찰적인 질문을 던진다. 특히 배트맨이 자주 등장한다. 배트맨이 슈퍼 닌텐도 컨트롤러를 뺏어들고 "이런 쓰레기들로 시간을 낭비해서는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어"라고 하자 "하지만 너무 힘들어"라고 말하는 폴 디니에게 "운동을 하고 몸을 가꾸다 보면 자존감과 자신감을 회복할 거야"라고 답하는 대목은 매우 인상적이다.

실제로 그러했는지 극적인 과장인지는 본인만이 알겠지만, 트라우마를 극복한 폴 디니는 이후 '워너브러더스/DC에서 만든 애니메이션의 금자탑'이라는 평가를 받은 <배트맨 애니메이티드 시리즈 극장판: 환영의 가면>을 제작하게 되고, 이후에도 마블/DC 코믹스의 각종 만화/애니메이션/영화 스크립트에 참여하고 있다. 너무나도 덕후다운 사람의 덕후다운 트라우마 극복기. <다크 나이트: 실화 배트맨 이야기>는 스트레스를 피하려 상상의 세계로 도피해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다.


최원서 그래픽 노블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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