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의 가을이란 말이 있다. 판타지 소설 드래곤 라자에 나오는 용어다.

어떠한 한 사람이 자신의 인생 중 어느 가을, 그 가을엔 첫눈이 올 때까지 온갖 희귀한 별의별 일들이 벌어진다. 대부분은 당시에는 인식하지 못하다 훗날에 아 그때가 마법의 가을이었지 하고 되돌아보게 된다. 그러나 만일 자신이 마법의 가을에 들어섰다는 것을 깨달으면 놀라운 일을 할 수 있다.”
 
소설을 접해보지 못한 사람도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되돌아봐야 알게 되는 자기 인생의 전성기를 이르는 말이다. 자기 힘으로 주변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고, 변화를 이끄는 그 시기. ‘첫눈을 그 만가로 삼아 떠나가는섬광처럼 짧은 그 계절은 그래서 더 시리고 푸르게 느껴진다.
 
그리고 대부분의 이야기에서 그 마법의 가을이 아닌 대부분의 시간들은 마치 무협지 주인공의 초반 훈련 기간처럼 축약되거나, 혹은 아예 생략되어 버린다.
 
수년 전 <치코와 리타>를 보다가 들었던 생각이다.

치코와 리타

감독 하비에르 마리스칼, 페르난도 트루에바, 토노 에란도

출연 마리오 구에라, 리마라 메니시스, 에만 소르 오냐

개봉 2010 스페인,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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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치코와 리타>는 하비에르 마리스칼, 페르난도 트루에바, 토노 에란도 세 명의 감독이 연출한 2010년도 작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121월에 개봉되었다.
 
영화는 초로의 노인이 구두를 닦으며 생계를 이어가다가 집으로 돌아와 라디오를 켜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음악가였던 그가 오래전 만들었던 노래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때 영화는 1948년으로 무대를 옮겨간다. 무대는 쿠바의 아바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치코는 그의 친구인 라몬과 함께 클럽에서 놀다가 클럽에서 노래를 하는 리타와 마주친다. 리타의 노래에 마음을 빼앗긴 치코, 그리고 치코의 음악에 매료된 리타, 그 둘은 곧 사랑에 빠지지만 세상의 많은 연인들이 그렇듯이 사소한 오해와 주변 상황 때문에 이별하게 된다. 뉴욕에서 스타가 된 리타를 따라 미국으로 온 치코, 그 둘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다 결국 긴 이별을 하게 된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재회한다.
 
흔히 접하는 일본식 작화가 아닌 개성 있는 그림에 영화 내내 흘러나오는 재즈 음악까지, 흔하게 보기 어려운 형태의 애니메이션이다. 디지 길레스피 같이 유명한 뮤지션과 재즈 역사에 남을 클럽인 빌리지 뱅가드 같은 곳의 모습을 애니메이션 속에서 확인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뭣보다 실존 인물인 베보 발데스를 모델로 해 만들었다는 것이 영화의 매력을 더한다.
 
베보 발데스는 바탕가’ 리듬의 창시자로 유명한 쿠바의 피아니스트다.

영화의 모델이 그라고는 하지만 영화와 그의 삶이 아주 같지는 않다. 그러나 쿠바에서 사보르 데 쿠바라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1940~50년대 전성기를 구가했다는 점, 1960년 스웨덴 공연 중 어느 여성과 사랑에 빠지며 음악계에서 30여 년 동안 사라져 있었다는 것, 1994년 새 앨범을 발표하며 재기했다는 것, 이것들을 보면 치코와 리타가 그를 모델로 만든 애니메이션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다.

하비에르 마리스칼이 디자인한 calle54의 포스터이자 OST 앨범 자켓. 출처 : amazon.com

참고로 <치코와 리타>의 감독이기도 한 페르난도 트루에바가 쿠바 재즈의 전성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칼레 54>를 만들었는데 그 이후 <칼레 54>의 포스터 작업에 참여했던 하비에르 마리스칼 등의 다른 감독들이 의기투합해 <치코와 리타>를 만들었다고 한다.

영화 초입부, 치코와 리타가 아직 만나기 전, 치코와 친구 라몬이 미국 여자들과 춤을 추며 술을 마시는 장면이 나온다. 버번을 시키려는 여자들을 말리며 라몬이 모히토를 주문한다. "진짜 술을 마셔야지"라는 멘트도 빼놓지 않는다.

모히토는 원래 쿠바의 전통 음료다. 몰디브 음료 아니다. 

물론 이분이 만든 것도 아니다 ;)

다이키리와 더불어 헤밍웨이의 말("My mojito in La Bodeguita, my daiquiri in El Floridita.") 때문에 유명해진 칵테일 중 하나다. 우리나라에서도 바 문화가 처음 정착되던 즈음 풍성한 민트의 화려함과 마시기 쉬운 청량감 때문에 큰 인기를 끌었다.

모히토. 바 로빈스스퀘어

만드는 법은 간단하다. 롱타입 글라스에 설탕과 민트 잎을 넣고 나무절구공이 같은 물건으로 찧은 후 화이트 럼을 넣고 잘 저어준 뒤 크래쉬드 아이스를 가득 채우고 탄산수를 넣는다.
 
만들 때 팁이라면, 민트는 세게 짓이긴다는 느낌보다 조금 넉넉하게 넣은 뒤 살살 찧어 유분을 내는 느낌으로 접근하면 좋고 설탕 대신 시럽을 미리 만들어 사용하면 훨씬 편하다. 사용하는 설탕의 종류에 따라 맛이 많이 바뀌는 편이니 잘 골라서 쓰면 좋다.

영화 전반부 뜨거운 그들의 열정에, 그리고 쿠바에 잘 어울리는 그런 칵테일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영화의 배경과는 달리, 그리고 결말과도 달리 몸이 추워졌다. 사실 이 계절에 모히토라는 칵테일이 딱히 어울리지도 않고. 추운 몸을 끌고 집으로 돌아오고 나니 평소에는 쳐다보지도 않던 뜨거운 칵테일이 생각났다. 딱히 마땅한 재료도 없어 그냥 간단한 위스키 핫 토디를 만들었다. 뜨거운 물에 꿀과 레몬즙을 넣고 시나몬 가루를 넣어 저은 뒤 걸러내고 위스키를 조금 넣으면 되는 간단한 음료다. 평범한 블렌디드 위스키를 넣으려다 왠지 달달한 위스키가 어울릴 것 같아 갖고 있는 CS 위스키 중 제일 달콤한 걸 골라 넣었다. 그리고 맛을 봤다.
 
위스키의 개성이 많이 죽는 느낌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저렴한 블렌디드 위스키를 넣어도 괜찮을 걸 그랬다.
 
하긴 이런 때도 있는 법이다.
 
영화도 그랬고 인생도 그렇지만 뭐든 생각대로 안 되는 때가 있고, 뭐든 해결이 되지 않아 쌓이기만 하는 때도 있다. 삶은 어쩌면 순간순간의 환희를 제외하면 그냥 견디는 것일지도 모른다. 치코의 빛나는 시절보다 어두운 시절이 훨씬 더 길었듯. 그렇게 하루를 견디고 견디다 어느새 끝이 다가왔을 때 나는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치코와 리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들의 젊음에 모히토가 어울리듯, 그들의 길고 길었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을 기다림엔 좀 더 따뜻한 음료가 어울릴 것 같다. 내가 나이를 더 먹은 뒤 내 인생을 돌이켜본다면, 그때 만약 치코와 리타를 만나게 된다면, 따뜻하고 새콤달콤하지만 알코올의 킥도 확실하게 들어있는 그런 위스키 핫 토디를 권해주고 싶다. 몸을 덥혀주는 알코올과 시나몬이 마음까지 따뜻하게 해주길 바라며. 

위스키 핫 토디. 바 로빈스스퀘어

핫 토디까지 다 마시고 나니 꽤나 몸이 더워진다. 추운 초겨울 밤에 잘 어울리는 음료다. 그래도 모히토가 어울리는 계절이 내년이면 다시 돌아올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 매년 가을이, 모든 계절이 마법의 가을처럼 다가오기를.


데렉 / 술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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