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스토리> 1992년부터 1998년까지 진행된 관부 재판을 소재로 삼은 영화다. 관부재판은 강제로 끌려가 일본군 성 노예 피해자가 된 위안부 원고 3, 여자정신근로령에 의해 일본 공장에 동원된 근로정신대 원고 7명이 부산과 일본 시모노세키를 오가며 일본 정부에 맞선 재판이다. 일본 위안부 피해자 관련 재판 사상 처음으로 보상 판결을 받은,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한 재판이었지만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역사 속에 묻혀있던 재판이기도 했다.

<허스토리>는 역사적으로도 유의미한 작품이지만, 충무로를 대표하는 여성 배우들이 한 데 모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주목해볼 만한 작품이다. 실제 피해자들의 진심을 담아내기 위해 촬영 현장에서 매번 고민을 멈추지 않았던 배우들의 열연이 빛나는 작품. 베테랑다운 실력으로 <허스토리>를 더 뜨거운 영화로 만들었던 충무로 대표 여성 배우들을 소개한다.

허스토리

감독 민규동

출연 김희애, 김해숙

개봉 2017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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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숙
배정길 할머니 역

김해숙이 연기한 배정길 할머니는 <허스토리>의 중심에 선 인물이다. 과거의 상처를 숨긴 채 살아온 정길은 6년간 계속된 재판 과정을 통해 더 이상 자신이 ‘홀몸이 아님’을 깨닫고, 감춰왔던 진실을 알릴 용기를 얻게 된다. 민규동 감독은 <허스토리> 시나리오를 쓰면서 정길 역을 맡을 배우로 바로 김해숙을 떠올렸다고 밝힌 바 있다.  <허스토리>의 뼈대가 되는 정길은 그녀가 아닌 다른 배우가 연기하는 걸 상상하기 어려운 캐릭터다. 지난 수년간 다양한 얼굴을 선보인 김해숙의 또 다른 독보적 캐릭터가 탄생한 작품.


잊을 수 없는 캐릭터
<박쥐>의 라 여사, <도둑들>의 씹던껌

(왼쪽부터) <박쥐>, <도둑들>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김해숙은 ‘국민 엄마’란 칭호를 얻으며 다양한 배우의 어머니로 활약해왔다. 자식 때문에 속 썩이는 어머니인 줄로만 알았던 그녀의 색다른 캐릭터를 만나볼 수 있었던 영화는 <박쥐>와 <도둑들>. <박쥐>에선 태주(김옥빈)을 핍박하고, 후에 전신마비 환자가 되는 라 여사를 연기했다. 의사소통을 위해 눈을 깜빡이는 장면만으로도 관객들을 엄청난 긴장에 몰아넣던 그녀의 압도적인 연기가 빛나는 작품. <도둑들>에선 한때 이름을 날렸던 도둑 씹던껌을 연기했다. 후배 도둑들 사이에서 능청을 떨다가도, 대사 하나 표정 하나로 분위기를 쥐어잡던 인물. <도둑들>은 김해숙의 로맨스 연기를 만나볼 수 있던 작품이기도 했다.

박쥐

감독 박찬욱

출연 송강호, 김옥빈

개봉 2009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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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들

감독 최동훈

출연 김윤석, 김혜수, 이정재, 전지현, 임달화, 김해숙, 오달수, 김수현, 이신제, 증국상

개봉 2012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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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정
박순녀 할머니 역

<허스토리>의 주요 캐릭터 중 가장 걸걸한 입담을 지닌 인물. 박순녀 할머니는 최근 스크린 속에서 만날 수 있었던 예수정의 ‘헌신적인 어머니’ 캐릭터들과 동떨어진 캐릭터다. 틈만 나면 담배에 불을 붙이고, 욕을 즐겨 하는 순녀는 거친 만큼 씩씩할 것 같지만 때때로 무너지는 속내를 감추지 못한다. 그간 견뎠을 힘든 시간을 내색하지 않아 더 마음에 남는 인물. 영화, 드라마 속에서 누군가의 어머니, 혹은 짧은 분량의 조연으로 임팩트 있는 연기를 선보였던 예수정, 연극계에선 ‘대모’라 불리는 그녀의 내공을 느낄 수 있는 캐릭터다.


잊을 수 없는 캐릭터
<신과 함께-죄와 벌>의 자홍 모

젊은이들을 살리는 대신 좀비들에게 목숨을 잃은 <부산행>의 인길, 무너진 터널 공사를 하다 죽은 자신의 아들을 살려내라며 정수(하정우)의 아내 세현(배두나)에게 달걀을 던지던 <터널> 속 노모… 그녀의 얼굴이 빛난 작품이 수두룩하지만, 단 한 작품만 꼽으라면 역시 <신과 함께-죄와 벌>이다. 예수정은 자홍(차태현)과 수홍(김동욱), 두 아들을 연달아 잃은 주인공들의 어머니로 등장했다. 평생 모든 걸 마음속에 묻고 살았던 엄마의 모습에 눈물을 흘리지 않은 관객이 몇이나 될까. 그녀의 연기가 <신과 함께-죄와 벌> 신드롬을 이끈 주요 요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과함께-죄와 벌

감독 김용화

출연 하정우, 차태현, 주지훈, 김향기, 김동욱, 마동석

개봉 2017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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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숙
서귀순 할머니 역

<허스토리>는 40여 년 만에 극 중 주요 캐릭터를 연기한 문숙의 모습을 만날 수 있는 작품이다. 문숙이 연기한 서귀순 할머니는 원고단 중 가장 여린 속내를 지녔다. 지난날의 상처를 부정하는 모습을 보이고, 자주 ‘무섭다’고 칭얼거린다. 진실을 밝히는 자리에 선뜻 나서길 꺼리기도 하지만, 막상 재판 현장에 서면 뒤로 물러나지 않는 단단함을 지닌 캐릭터. 문숙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꼿꼿함이 녹아든 캐릭터다.


잊을 수 없는 캐릭터
<뷰티 인사이드>의 우진 모

문숙은 데뷔작 <태양 닮은 소녀>(1974)를 촬영하며 연출을 맡았던 이만희 감독과 사랑에 빠졌다. 그들의 사랑은 당대 최고의 이슈가 됐다. 불행은 갑작스레 찾아왔다. 두 사람이 함께한 세 번째 작품 <삼포가는 길>(1975) 후반 작업 중 이만희 감독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고, 문숙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 영화계를 떠났다. <뷰티 인사이드>는 그로부터 38년 후, 문숙의 스크린 복귀를 담은 작품이다. 자고 일어나면 얼굴이 바뀌는 우진, 그 혼란스러움을 쭉 곁에서 지켜본 그의 어머니를 연기했다. 우진 역을 맡았던 수많은 배우들을 압도하는 강렬한 존재감. 별다른 대사 없이도 캐릭터의 색을 고대로 전하던 문숙의 녹슬지 않은 연기력을 만나볼 수 있던 작품이었다.

뷰티 인사이드

감독 백종열

출연 한효주, 김대명, 도지한, 배성우, 박신혜, 이범수, 박서준, 김상호, 천우희, 우에노 주리, 이재준, 김민재, 이현우, 조달환, 이진욱, 홍다미, 서강준, 김희원, 이동욱, 고아성, 김주혁, 유연석

개봉 2015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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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녀
이옥주 할머니 역

<허스토리> 속 이용녀는 과거의 상처로 인해 마음에 병을 품은 이옥주 할머니를 연기했다. 마냥 아이 같은 모습으로 극에 활기를 불어넣다가도, 과거의 기억에 시달리면서 제 자신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관객들의 마음을 흔드는 캐릭터. 연기하는 데 있어 완급조절이 가장 어려워 보였을 역할이기도 하다. 서늘하거나 광기 어리거나, 주로 강렬한 캐릭터를 연기하며 신스틸러로 주목받아왔던 이용녀. 오랜 시간 배우로 활동해온 그녀의 필모그래피에서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던 캐릭터를 연기했다는 점이 가장 반갑다.


잊을 수 없는 캐릭터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영군 엄마

1978년부터 연극 무대 위에서 경력을 쌓아왔던 이용녀는 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카메라 앞에 서기 시작했다. 다수의 작품에 단역으로 출연하던 그녀가 평단의 눈에 든 건 박찬욱 감독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 출연하고서부터. 이용녀는 자신이 싸이보그라고 생각하는 영군(임수정)의 엄마를 연기했다. 정신병을 지닌 엄마와 딸을 돌보느라 본인의 정신 건강마저 잃게 생긴 인물로, 등장할 때마다 스크린을 가득 메우는 위태로움이 인상 깊었던 캐릭터. 박찬욱 감독은 후에 인터뷰를 통해 “(이용녀의 얼굴엔) 무시무시함과 소녀스러움이 공존한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를 만들 때는 이용녀 선생님을 생각하면서 각본을 썼다”고 밝히기도 했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감독 박찬욱

출연 비, 임수정

개봉 2006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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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자
집장촌 홍여사 역

<허스토리>에 특별출연으로 함께한 박정자는 집장촌 홍여사를 연기했다. 문정숙(김희애)이 위안부 피해자들을 찾아다닌 장면에서 등장한 인물. 법정에 설 생각이 없다며 정숙을 단번에 내치는 매몰참을 보이지만, 알고 보면 위안소 관리인이었다는 자신의 과거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며 매일을 보내는 인물이기도 하다. 젊은 관객이라면 낯설 수도 있는 얼굴. 박정자는 한국 연극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가장 먼저 손꼽히는 배우다. 1962년 연극 <페드라>로 데뷔한 후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꾸준히 무대 위에 올랐다.


잊을 수 없는 캐릭터
연극 <해롤드 앤 모드>의 모드

연극 <해롤드 앤 모드> 포스터

박정자는 그간 1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육체의 약속>(1975), <자녀목>(1984)으론 대종상 영화제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최근엔 <마스터>에서 사채업계의 큰 손, 신 선생을 연기해 화제가 되기도. 그래도 역시나 그녀의 인생 캐릭터는 연극 무대 위에 있다. 연극 <해롤드 앤 모드>는 콜린 히긴스의 소설 <해롤드 앤 모드>를 원작으로 삼은 작품이다. 죽음을 동경하는 19세 소년 해롤드와 천진난만한 80세 할머니 모드의 우정과 사랑을 담은 작품. 박정자는 2003년부터 2015년까지 <해롤드 앤 모드> 속 모드 역할을 전담해왔다. 총 다섯 번의 공연을 거쳤지만 모드에 대한 사랑은 여전하다고. 80세가 되어서도 다시 한번 모드를 연기하고 싶다는 그녀, 연기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는 거장의 차기작을 기대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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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은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