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사에서 대체 불가한 배우 문소리가 영화 <배심원들>로 돌아왔다. 18년간 형사부를 전담한 판사로, 사건 기록을 통째로 외워버리고야 마는 독한 집념과 직업 소명을 지닌 김준겸 역을 맡았다. 대한민국 첫 국민참여재판의 재판을 맡은 재판장으로서, 또 여성 판사로서 카리스마 있는 연기를 보여준 문소리. 그의 필모그래피를 되짚어보면 여간 범상치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뇌성마비 장애인부터 고등학생과 바람난 유부녀, 국가대표 핸드볼 선수 등 대표 캐릭터로 돌아본 배우 문소리의 초상들을 소개한다.


<오아시스>(2002) 한공주 역

많고 많은 문소리의 작품들 중 대표작을 고르기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이창동 감독과 함께한 두 작품, 데뷔작 <박하사탕>(2000)과 <오아시스>(2002)는 더욱 그렇다.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두 작품 중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무엇을 고르겠는가. 순수하고도 아련한 첫사랑을 연기했던 <박하사탕>의 ‘윤순임’ 역시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지만, 기자의 머릿속에 더 오랫동안 남은 캐릭터는 <오아시스>의 ‘한공주’였다. 중증뇌성마비장애를 앓고 있는 한공주 역을 맡은 문소리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를 오가는 연기로 관객들에게 ‘배우 문소리’를 각인시키는데 성공했다. 문소리는 한공주 역으로 2002년 제23회 청룡영화상 신인여우상을 수상했을 뿐만 아니라 제59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신인배우상을 수상하기까지 했다.


<바람난 가족>(2003) 은호정 역

<오아시스> 한공주에 이어 문소리는 차기작으로 <바람난 가족>을 택하면서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도발적인 제목 그대로 <바람난 가족>은 가족 전부가 바람난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문소리는 남편 주영작(황정민)과 소원해진 관계에 고등학생인 신지운(봉태규)과 바람을 피우는 은호정을 연기했다.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할 문소리의 모습은 단순히 노출 혹은 적나라한 베드신이 아니다. 절정에서 터져 나온 아들 잃은 엄마의 절규와도 같았던 울음, 그리고 자신의 욕망에 주체적인 여성의 모습이다. <바람난 가족>의 은호정 역 덕분에 2003, 2004년 국내 영화제들의 여우주연상은 문소리의 것이었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8) 미숙 역

문소리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대다수의 작품들에서 맨얼굴에 가까운 내추럴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맨얼굴이 도드라졌던 작품이자, 대중들 가까이에 갈 수 있게 해주었던 작품은 바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다. 올림픽 핸드볼 2연패의 주역이었으나 실직과 남편의 빚으로 인해 마트에서 “양파가 2kg에 990원!”을 외치는 신세가 되어버린 미숙 역을 맡았다. 후반부로 갈수록 땀범벅이 된 얼굴로 경기장을 누비는 문소리는 배우가 아닌 핸드볼 선수 그 자체였다. 이에 대해 문소리는 한 인터뷰에서 "내가 아직도 <우생순> 메이킹을 못 본다. 어쩜 그렇게 아무 신경을 안 쓰고 운동만 했나. 얼굴 거지처럼 하고 운동하더라" 고 우스갯소리를 한 바 있다. 배역에 열중한 결과,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관객수 400만을 동원하며 문소리에게 ‘흥행배우’ 타이틀을 안겨주었다.


<하하하>(2010)왕성옥 역

홍상수의 <하하하> 속 문소리가 연기한 왕성옥은 앞서 소개한 작품들의 캐릭터들처럼 강렬하게 뇌리에 박히는 그런 캐릭터는 아니다. 다만 인물들과 말로 능청스럽게 흘러가는 영화 속에서 무엇보다 선명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며 잔상처럼 남는 유형의 캐릭터다. 통영 사투리와 표준말을 섞은 말투로 통영 지역의 문화재를 설명하는 문화해설가인 왕성옥은 새침하면서도 엉뚱한 언행으로 극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가령,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와 모텔에서 나올 때도 한 대 후려치며 “헤어져!”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지막으로 함 업어줄게요. 한 번만 업어주고 조용히 갈게요”라며 싫다는 남자를 억지로 업으려 하는 것처럼 말이다. 왕성옥은 문소리의 또 다른 면모를 보게 해준 숨은 진주와도 같은 캐릭터로 남았다.


<아가씨>(2016)이모 역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를 보고 영화관을 나오며 가장 먼저 떠올린 인물은 히데코(김민희)도 숙희(김태리)도 아니었다. 흩날리던 벚꽃 사이, 만개한 벚꽃나무에 목을 매단 가련한 히데코의 이모였다. 코우즈키(조진웅)의 사별한 아내로, 코우즈키에 의해 남성들에게 음란서책을 낭독하는 정신적 학대를 당한 인물이다. 어린 히데코에게 일본어를 가르치다 웃음이 터진 벌로 코우즈키에게 모욕을 당한 뒤, 두 눈을 부릅뜨며 모욕감을 애써 억누르는 장면은 <아가씨>의 명장면으로 손꼽힌다. 공허한 시선과 불안한 표정, 얼이 반쯤 빠진 얼굴로 극에 긴장감을 더한 문소리는 약 10분 분량의 특별출연으로 관객과 평단으로부터 엄청난 호평을 받았다.


<여배우는 오늘도>(2017) 문소리 역

할리우드에 메릴 스트립이 있다면 한국엔 문소리가 있다! 문소리가 문소리를 연기한 <여배우는 오늘도>는 <박하사탕>으로 데뷔해 18년 째 연기를 해왔지만 점차 자신을 찾는 감독들이 줄어들면서 바닥치는 자존감을 붙잡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문소리의 일상을 담아냈다. 현실과 영화의 경계를 허물며 리드미컬하게 진행되는 이야기와 적절히 섞여 들어간 하이퍼리얼리즘적인 코미디 요소가 상당히 매력적인 작품. 문소리는 이 영화에서 여배우, 엄마, 딸로서의 고충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문소리가 직접 감독, 각본, 주연까지 소화한 단편 연출 3부작 <여배우>, <여배우는 오늘도>, <최고의 감독>을 모아 장편으로 제작한 문소리의 첫 장편 연출 데뷔작이다.


씨네플레이 문선우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