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하지 않는 한, 아직 완전히 실패한 건 아닐 것이다.
세상 모두가 날 향해 미소 짓다가 갑자기 등을 돌리는 건 어떤 기분일까. 한때 잠깐 ‘제니’라는 이름으로 코코아라는 걸그룹의 비주얼 센터를 담당했던 나라(정채연)는 7년째 그런 삶을 살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엔 모두가 나라를 사랑했다. 그늘 없이 털털한 성격과 알전구처럼 빛을 발하는 화사한 외모를 접하고 나면, 누구라도 나라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러브콜을 보낸 수많은 연예기획사 중 한 곳과 계약을 하고 난 뒤, 나라의 삶은 갑자기 뭔가 꼬이기 시작했다. 코코아의 첫 데뷔무대는 강원도에 있는 지역 행사였는데, 하필이면 비가 오는 바람에 근처에 있는 작은 강당으로 급하게 장소를 옮겨야 했다. 관객은, 한 50명은 됐으려나. 유일하게 나가 본 방송 프로그램은 음악 프로그램도 아닌 요리 프로그램이었다.
재능이 없었던 것도, 얼굴이 안 예뻤던 것도, 노력을 안 했던 것도 아닌데, 코코아는 데뷔와 동시에 망한 그룹이 되었다. 나라의 솔로 앨범을 내주겠다던 기획사 사장(조관우)은 계속해서 회사 사정을 이야기했다. 사정상 더 잘나가는 후배들을 먼저 챙겨서 성공시켜야 한다고 했다. 조금 더 연습하고 기다리라고 했다. 그렇게 7년이 지났다. 연습생 시절부터 조심스레 만나왔던 남자친구는 잘나가는 나라의 기획사 후배(임소은)와 열애설이 터졌다. 남자친구를 빼앗아 간 후배는 나라의 솔로 데뷔도 빼앗아 갔다. 사장이 시켜서 싱어송라이터 컨셉으로 솔로 데뷔를 하려고 기타도 배웠는데, 기타를 가르쳐주던 고등학교 동창에게 좋은 곡도 받았는데, 어느 날 보니 나라가 선물 받은 그 곡을 후배가 녹음하고 있었다. 계약 만료를 앞둔 7년 차, 세상 모두가 나라에게 등을 돌리는 것만 같다.
사랑을 받았다가 빼앗기는 게 더 아플까, 아니면 애초에 아무도 사랑해주지 않았던 게 더 아플까. 나라에게 노래를 선물해 준 나라의 고등학교 동창 정민(김성철)은, 친한 친구들과 동생(최유리) 앞이 아니면 그 누구 앞에서도 노래를 하지 못하는 무대 공포증에 시달린다. 사실 이게 다 나라 때문이다. 고등학교 시절 나라를 짝사랑하던 그 수많은 남자아이들 중엔 정민도 있었다. 용기를 내어 고등학교 축제 장기자랑에서 자작곡을 연주하며 노래로 고백하려 했던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너무 크게 긴장한 탓에 삑사리가 났고, 그걸로 끝이었다. 강당을 가득 메운 아이들의 박장대소 속에서 정민은 얼어붙었고, 하필 함께 웃고 있던 나라가 정민의 시야에 걸렸다. 기껏 낸 용기가 모두의 비웃음으로 돌아온 탓에. 정민은 더는 누구 앞에서도 노래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안다. 사실 이건 나라 때문이 아니다. 그냥 안 좋은 타이밍에 안 좋은 삑사리를 내고는 겁에 질린 정민 자신의 문제인 거지.
기타와 피아노를 사랑하고, 혼자 자작곡을 만들어 부르는 걸 좋아하고, 누구보다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재능이 빛나는 청년인데, 정민은 세상에 나가서 노래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노래하지 못한 채 외삼촌(양익준)이 운영하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하루하루 살아가던 중, 편의점으로 거짓말처럼 나라가 걸어 들어왔다. 있는 용기, 없는 용기를 다 끌어모아 더듬더듬 “사실은 제가 고등학교 동창입니다”라고 말을 걸고, “사실은 제가 기타를 좀 칩니다”라고 말을 걸고, 그렇게 나라의 기타 선생이 되는 것까지만 해도 모든 게 좋았다. 하지만 어쩐지 나라에게 한발 다가갔다 싶으면 또 한 발 멀어지는 것만 같다. 기타를 가르쳐주며 좀 친해졌다 싶으면 나라에게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게 되고, 남자친구에게 차인 나라에게 자작곡을 선물해주고 두 사람 사이가 더 없이 가까워졌다고 생각될 때면, 솔로 데뷔가 좌절된 나라가 깊은 우울 때문에 숨어버린다. 애초에 나에게 허락된 게 아니었던 걸까. 세상 누구도 자기를 제대로 사랑해주지 않는 것만 같으니, 세상 누구 앞에도 제대로 나서기가 어렵다.
KBS가 2018년 방영한 2부작 뮤직드라마 <투 제니>는 나라와 정민이 실패한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다룬다. 여기에서 ‘실패한 자리에서 다시’라는 건 중요하다. 실패하고 좌절한 청춘들을 위로할 때, 어떤 이들은 ‘현실적인 조언’이라는 이유로 “이거 안 되면 다른 거 해봐도 되지 않냐. 다른 분야를 알아보자.”라는 말을 건네곤 한다. 사실 가까운 사람, 아끼는 사람일수록 그러기 더 쉽다. 시험 준비한다고 10년을 허비하고, 사업 준비한다고 15년을 허비하고, 그렇게 아까운 시간들을 날린 탓에 평범하고 안온한 삶의 최소한을 준비할 기회마저 놓치는 이들을 너무 많이 보니까. 내가 아끼는 사람이 넘어진 자리에서 반복해서 고꾸라지며 세월을 보내는 걸 보느니, 일으켜 세워서 툭툭 털어주고는 다른 걸 알아보라고 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귀한 마음이겠지. 하지만 내가 정말 미련 없이 최선을 다해 본 건지 아닌지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내가 스스로 포기하기 전까지는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 있지 않던가.
두 사람은 성공한 걸까? <투 제니>는 그걸 개운하게 말해주며 끝나는 그런 드라마는 아니다. 그저 두 사람이 조금은 두 발로 일어설 수 있게 된 것 같다고, 그렇다면 일어나서 걷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않겠냐고 추측해 볼 뿐. 가수의 꿈이 몇 번이고 꺾이며 혼자 남겨졌다고 생각한 나라는, 끝끝내 그곳이 어디든 자신의 노래를 부르려는 노력을 그만두지 않는다. 나라에게 마음을 고백하는 일이나 세상 사람들 앞에 서는 일 모두 실패했다고 생각했던 정민도, 끝끝내 나라에게 다가가고 사람들을 마주하는 걸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한, 아직 완전히 실패한 건 아닐 것이다. 서로의 곁에 앉아 함께 화음을 쌓으며 한 노래를 부르는 나라와 정민을 보면 알 수 있다. 자신을 향해 미소 지어 주는 단 한 사람,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알아주는 단 한 사람만 곁에 있다면, 우리는 언제라도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승한 TV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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