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성인들도 즐기는 매체로 자리잡았지만, 슈퍼히어로 만화는 태생적으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어린이들에게 꿈, 희망, 용기를 심어주기 위해 만들어진 슈퍼히어로 만화. 그런데 그것을 만든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자신이 만든 캐릭터들에 상상 이상의 애정을 쏟아붙고 그로 인해 몇 번이나 실직의 위기에 처했던 사람이 있다.
20세기 소련의 독재자와 이름이 유사한 작가 짐 스탈린은 만화계에서 독보적인 사람이다. 지금은 그 이름 자체가 그만의 스타일을 지칭하는 대명사가 될 정도로 유명세와 인정을 얻었지만, 그가 자신만의 스타일을 키워가던 시절, 그는 만화계에서 이단아와 같은 사람이었다.
1960년대, 스티브 딧코와 잭 커비가 그린 만화들을 보고 자란 그는 열성 만화 팬이었다. 각종 동인지를 그리며 메이저 회사와 계약한 만화가의 꿈을 키워가던 그는 친구 리치 벅클러(나중에 데스록을 창작한 만화가)의 권유로 마블 코믹스의 문을 두드렸다. 다른 사람들이 탐탁치 않게 생각하던 그의 스타일을 맘에 들어했던 것은 당시 편집장 로이 토마스.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던 로이 토마스는 그에게 당시 안 팔리던 책 중 하나이던 <아이언 맨>의 스토리와 그림을 맡겨보았다. 그렇게 그가 처음 자신의 이름을 걸고 집필한 책이 <아이언 맨> 55호. 그 책에서 짐 스탈린은 아이언 맨의 활동무대를 갑자기 우주로 옮겨, 현재 가디언즈 오브 더 갤럭시의 멤버로 활동하고 있는 ‘드랙스 더 디스트로이어’와 아마도 그의 가장 유명한 창작물일 초강력 빌런 ‘타노스’를 처음 등장시켰다. 여기서 등장한 드랙스는 지금 모두에게 익숙한 코믹한 캐릭터가 아니라, 타노스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는 외계인이었다.
메이저 회사에서 출판물을 낸다는 소원을 풀었지만, 총편집장 스탠 리는 그의 스타일을 맘에 들어하지 않았다. 결국 짐 스탈린은 <아이언 맨> 56호를 마지막으로 작가/밑그림 자리에서 잘리고 만다. 도전자의 너무 짧고 허무한 결말이었다.
이후 프리랜서로 활동하면서 마블 코믹스와 기타 중소 규모 출판사들이 의뢰한 업무를 하던 그에게 1973년 다시 기회가 찾아온다. 로이 토마스가 그에게 연락을 해서 "<캡틴 마블>이라는 당장 폐간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안 팔리는 타이틀이 있는데, 그걸 한번 맡아보지 않겠냐"고 제안한 것이었다. 1960년대 만들어진 캡틴 마블은 독자들에게 크게 인상을 못 남긴 캐릭터로, 당시 편집국에서는 그를 흑인 여성으로 바꿔 볼 생각도 하고 있었다.
어차피 안 팔리는 타이틀이었기에 짐 스탈린은 부담 없이 캡틴 마블에게 자신이 원하던 히어로의 모습을 부여한다. 전투적인 크리 제국의 후예인 그는 당시 마블 코믹스에서 찾아보기 힘든 3차원적이고 복잡한 캐릭터였다. 아슬아슬하게 폐간되지 않고 출간되던 <캡틴 마블>을 그려가면서, 짐 스탈린은 캡틴 마블을 호전적이고 에고로 가득찬 캐릭터에서 인간미 넘치고 생명을 사랑하는 캐릭터로 성장시켜나갔다.
그 당시 그에게 주어진 또 다른 과제는 아담 월록. 아담 월록 역시 한참 전인 <판타스틱 포> 66호로 처음 데뷔했지만 별다른 특성도 없고 그냥 잊혀질 만한 캐릭터였다. 짐 스탈린은 아담 월록을 캡틴 마블보다 더 다채롭고 3차원적인 캐릭터로 변모시킨다. 심지어 아담 월록에게는 메이거스라는 숙적이 있었는데, 이는 미래에서 온 자신의 사악한 면모라는 대담한 설정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편집부의 반응은 어땠을까? 수 년 전 스탠 리의 반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블 편집국이 계속 편집장이 바뀌는 등 혼란스러운 시기였기에 당장 잘리지는 않았으나, 편집장들은 짐 스탈린의 각본과 그림에 자꾸 손을 대고 수정하기 시작했다. 마블이 추구하는 히어로의 모습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이번에는 짐 스탈린이 사표를 내고, 마블과의 인연은 다시금 끝이 나는 듯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아치 굿윈이 마블 편집장이 된다. 로이 토마스 못지 않게 오픈 마인드의 소유자였던 그는, 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짐 스탈린에게 "개인적으로 당신의 스타일이 맘에 든다"며 "아담 월록과 캡틴 마블의 스토리를 마무리지어보지 않겠냐"고 제안한다.
그렇게 해서 짐 스탈린은 아담 월록과 타노스의 최종 결투를 다시 집필하게 되고, 최종 전투에서 둘 다 사망한다. 캡틴 마블에게도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몇 년 전 암으로 부친을 여읜 그는 캡틴 마블에게도 암으로 죽는다는 어두운 결말을 선사한다. 하지만 사후 세계로 가는 문에서 이미 죽어 있던 숙적 타노스와 만나서 화해하는 결말은 다소 희망적이기도 하다. <캡틴 마블의 죽음>은 마블 코믹스가 발간한 첫 그래픽 노블이 되었다.
짐 스탈린은 이후 마블 코믹스에 정착하게 되어 그만의 세계를 계속 확장해나가고, 그가 애정을 갖고 만든 캐릭터들과 세계관은 1991년 우주급 크로스오버 미니시리즈 <인피니티 건틀렛>에서 절정에 이른다.
원래 팬들과 소통하지 않기로 유명했던 짐 스탈린은 몇 년 전부터는 여러 메이저급 컨벤션에 자주 모습을 보이는 등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시대의 흐름과 유행에 편승하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추구한 짐 스탈린이 없었으면 지금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없었을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치 굿윈은 그에 대해서 “짐 스탈린을 따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미 이룰 수 있는 것을 다 이루었기 때문에”라는 최고의 찬사를 남겼다.
최원서 / 그래픽노블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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