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자에게 상상의 재능은 필요조건이다. 현실에서 가능한 이야기든, 불가능한 이야기든 예외는 없다. 세상의 모든 영화들이 상상력의 소산이겠으나, 그 가운데서도 독보적인 이야깃거리로 관객을 매혹하는 영화들을 5편만 추렸다. 때론 말도 안 되는 엉뚱한 상상이 현실 세계의 정곡을 날카롭게 찌르는 법이다.


배틀로얄

バトル ロワイアル, 2000

감독 후카사쿠 킨지

출연 기타노 다케시, 후지와라 타츠야, 마에다 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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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영화부터 파격의 끝판왕 되시겠다. 청불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금지된 비디오를 몰래 보듯 중·고교 학급에 나돌던 <배틀로얄> 전성시대를 기억한다. 그땐 그저 오락영화의 개념 정도로 받아들였지만 어른이 되고 다시 본 <배틀로얄>은 훨씬 끔찍했다. 고작 중학교 3학년 된 아이들이 벌이는 살육 게임이라니. 이 말도 안 되는 설정을 천연덕스럽게 전하는 선생 키타노(기타노 다케시)는 물론,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점차 받아들이고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다가 마침내 아무렇지 않게 살인에 혈안이 된 학생들의 표정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다시 본 <배틀로얄>이 대단하게 느껴진 이유도 바로 이 천연덕스러운 잔혹성에 있었다. 이 비윤리적인 게임에 중독될 것이냐, 말 것이냐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관객들조차 피할 수 없으리라.


이디오크러시

Idiocracy , 2006

감독 마이크 저지

출연 루크 윌슨, 마야 루돌프, 댁스 셰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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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개봉조차 안됐던 B급 영화. <이디오크러시>가 그린 바보들만 남은 미래 사회의 탄생 비화는 다소 우스꽝스럽다. IQ가 높은 부부들은 바쁘게 일하며 미래를 계산하는 동안 자손을 낳지 못한 채 죽었고, 반대로 IQ가 낮은 부부들은 피임을 경시하고 의도치 않은 임신과 외도를 반복하다 자손이 번성했다. 따라서 똑똑한 자들이 멸망해버린 지구에 바보들의 세상이 도래했다는 설정. 그냥 웃어넘기고 말았던 코미디 물로 기억하던 이 영화, 요즘 들어 이상하게 자꾸 떠오르는 건 왤까. 영화의 설정에 공감한다기보다도 갈수록 편리하고 가벼운 것, 간단하고 1차원적인 것을 취하는 현대인의 추세 대로라면 언젠가 '<이디오크러시>가 현실이 돼버리는 건 아닐까'라는 공포에 덜컥 두려워지는 까닭이다. 영화 속 냉동인간이 500년 만에 눈을 떠 목격한 것은 저급한 쾌락에 취한, 무논리와 비이성으로 굴러가는 충격적인 사회다. 얼간이(idiot)와 민주주의(democracy)의 합성어가 제목이 된 <이디오크러시>는 '역사는 균질하게 발전하지 않는다'는 경구를 재확인시키는 영화임에 틀림없다.


존 말코비치 되기

Being John Malkovich , 1999

감독 스파이크 존즈

출연 존 쿠삭, 카메론 디아즈, 캐서린 키너, 오슨 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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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 참신함의 기운이 넘친다. 존 말코비치는 영화배우의 이름인데, 도대체 존 말코비치가 되는 건 뭐란 말인가. 스파이크 존즈의 영화는 언제나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스토리로 관객들을 놀래켰다. <존 말코비치 되기>는 말 그대로 배우 '존 말코비치'의 머릿속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발견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인형술사 크레이그(존 쿠삭)는 일거리가 없어 절망하다가 빠른 손놀림의 문서 정리 직원을 구하는 신문 광고를 본다. 도착한 회사의 모습은 굉장히 기이하다. 그가 일하는 곳은 7과 1/2층. 이건 뭐 해리 포터의 9와 3/4 승강장도 아니고! 어쨌든 층과 층 사이에 있는지라 모든 것이 절반 높이다. 허리를 숙여 서류를 정리하던 그는 어느 날 캐비닛 뒤의 숨겨진 문을 발견하는데. 그 안은 바로 배우 존 말코비치의 뇌 속으로 들어가는 통로였다. 크레이그는 마치 영화관이라도 차린 듯 통로를 이용해 돈을 벌게 된다. 타인의 머릿속에 들어가 시선과 생각을 관음하는 기발한 상상. 안 해본 사람 없다지만 이렇게 영화로 탄생할 줄이야.


인 더 하우스

Dans la maison, 2012

감독 프랑소와 오종

출연 파브리스 루치니,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 어니스트 움하우어, 엠마누엘 자이그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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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칙한 상상'은 프랑스 감독 프랑소와 오종을 줄곧 따라다닌 수식어다. 그중에서도 2013년 개봉한 <인 더 하우스>의 상상력은 실로 발칙함 그 자체였다. 한때 작가를 꿈꾸던 문학 교사 제르망(파브리스 루치니)은 작문 수업에서 놀라운 재능을 가진 제자 한 명을 발견하게 된다. 학생의 이름은 클로드(어니스트 움하우어), 그의 작문 과제는 친구 라파의 가족을 소설의 주인공으로 데려와 마음껏 펼친 상상이다. 그런데 본래 소설이라는 것이 허구성을 담보로 하고 있다지만, 이 허구의 이야기는 갈수록 위험해져간다. 클로드는 라파의 집에 놀러 가 가족들과 만났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라파, 라파의 어머니, 아버지가 글의 재료가 되면서 점차 이야기가 사실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 힘들어진다. 마침내 라파의 어머니에게 욕구를 느끼는 클로드의 심리가 서술되면서, 교사 제르망은 관음의 욕구(글을 읽는 행위)와 죄의식 사이에서 혼란을 느낀다. 오종의 오랜 화두 '훔쳐보기'의 기술이 마침내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허무는, 발칙한 이야기꾼 다운 매력적인 영화다.


트루먼 쇼

The Truman Show, 1998

감독 피터 위어

출연 짐 캐리, 에드 해리스, 로라 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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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스트에서 <트루먼 쇼>가 빠지면 섭섭해할 독자들이 눈에 선하다.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는 영화라 해도 <트루먼 쇼>의 기발한 상상력 만큼은 독보적이란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아직도 <트루먼 쇼>를 보지 않은 독자가 있다면 이쯤에서 스킵 해도 괜찮다. 알고 보면 맥빠지는 대왕 스포일러 파트가 될 테니. <트루먼 쇼>의 주인공 트루먼(짐 캐리)는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30대 회사원이다. 그런데 어느 날 트루먼에게 이상한 일들이 일어난다. 죽은 아버지를 눈앞에서 목격하고, 라디오에선 자신의 이동경로가 중계되고 있다! 충격적 사실. 트루먼은 태어난 순간부터 쭉- 거대한 리얼리티 쇼의 주인공이었던 것. 희로애락이 담긴 그의 인생사, 아니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며 시청자들은 울고 웃었다. 그런데, 과연 이래도 될까? 껍데기에 불과한 이름 '트루먼(trueman)'이 무색하게 그의 인생은 동의 없이 도난당했다. 거대 미디어의 횡포와 사생활 유출. 픽션이기에 망정이지, 끔찍하고도 놀라운 상상이다.


씨네플레이 심미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