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인해 모든 것이 변칙적이었던 작년과 달리, 확산세가 다시 퍼지고는 있지만 조금 익숙해진 탓인지 예년처럼 한해를 정리하고 되돌아보는 12월 말의 분위기를 되찾았다. 할리우드에선 각 도시별 비평가협회들의 시상식 시즌이 펼쳐지고 있으며, 연초의 빅3 - 골든글로브와 영국 아카데미, 오스카로 그 대미를 장식할 예정이다. 여기에 맞춰 완성도 높은 영화들이 개봉해 반응을 살피고, 여론을 조성하며 시상식에 대비한다. 이에 따라 주객이 전도된 것처럼 한 해 결산의 느낌보단 오히려 시상식에 더 초점이 맞춰진 면도 없지 않다. 그래서 아예 한해를 정리하는 의미의 ‘베스트 목록’보단(사실 이런 의미를 무시 못 하지만) 연말과 연초 시상식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그리고 오르내릴) ‘2021 할리우드 사운드트랙 리스트 5’를 소개해본다.
먼저 안타깝게도 이 명단에선 제외했지만 올해 나온 인상적이고 주목할 만한 사운드트랙들을 간략하게나마 언급하고 본문으로 넘어가고자 한다. 아무래도 사운드트랙이 활성화된 할리우드 작품들을 위주로 다루게 된 건 아쉽게 생각한다. 가장 강력한 시상식 후보작으로 손꼽힐 한스 짐머의 <듄>과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의 <프렌치 디스패치>는 앞서 따로 다룬 바 있기에 이번 리스트에선 제외한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위용을 선사한 제임스 뉴턴 하워드의 <정글 크루즈>나 니콜라스 브리텔의 <크루엘라>, 한스 짐머의 첫 <007> 도전기 <노 타임 투 다이>, 라민 자와디의 <이터널스>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빠졌다고 해서 시상식 후보로 오르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따로 다뤘던 만큼 시상식 후보에 오를 가능성이 더 높다는 말인지 모른다. 리스트는 한국 사운드트랙과 마찬가지로 무순이다.
흥행에서 죽을 쓰고 있지만 극찬을 받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첫 뮤지컬 도전기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얘길 안 할 수 없다. 데이비드 뉴먼이 편곡을 맡고, 존 윌리엄스가 음악 컨설턴트로, 지닌 테소리가 보컬 코치를, 구스타보 두다멜이 지휘를 맡은 2021년판 사운드트랙은 환상적인 조합이다! 프랑스에선 밴드 ‘스파크’와 함께 뮤지컬에 도전한 레오 까락스의 <아네트>를 빼놓을 수 없다. 과거 성스루(Sung-Through)에서 진가를 발휘한 미셸 르그랑만큼 파격적인 사운드였다. 이에 뒤질 새라 ‘더 내셔널’을 앞세워 고전 시라노를 색다르게 해석한 조 라이트의 <시라노>도 있다. 브라이스 데스너는 조니 그린우드와 함께 팝계에서 가장 주목해야할 현대음악가이자 영화음악가다. 이외에도 뮤지컬의 기수 린 마누엘 미란다가 참여한 <인 더 하이츠>와 <틱,틱...붐!>, 파섹 앤 폴의 <디어 에반 핸슨>까지. 1984년 이후 오스카 음악 편곡(Adaptation)상이 시상되고 있지 않지만, 이쯤 되면 올해는 되살려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2018년 <그린 북>으로 인상적인 모습을 보인 크리스 보워스는 올 한해 <리스펙트>와 <빌리 홀리데이>라는 걸출한 음악영화를 내놓았고, <킹 리처드>로 방점을 찍었다. 피아노와 타악, 현악이 만들어내는 테니스와 부성애의 조합은 감동적이다. 데이빗 로워리와 인상적인 호흡을 이어가는 다니엘 하트의 <그린 나이트>도 멋진 성취다. 영화가 가진 압도적인 에너지와 기묘한 혼란은 하트의 실험적이며 전위적인 선율에게도 공을 돌려야 마땅하다. 올 한해에만 리들리 스콧의 상반된 걸작 <라스트 듀얼>과 <하우스 오브 구찌>에 참여한 해리 글렉슨 윌리엄스의 행보도 주목할 만하다. 이처럼 180도 다른 결을 선보인 그를 더 이상 한스 짐머 사단으로 재단할 수 없을 것 같다. 여성 최초로 디즈니 장편 애니를 거머쥔 저메인 프랑코의 <엔칸토>와 1960년대와 현재를 오가며 기묘한 악몽을 선사한 <라스트 나잇 오브 소호>의 스티븐 프라이스 그리고 아론 소킨의 동반자가 된 다니엘 펨버튼의 <리카르도 되기>도 결코 잊어선 안 된다.
파워 오브 도그
By 조니 그린우드
12년 만에 돌아온 제인 캠피온의 신작은 뜻밖에 서부극이다. 당연히 전통적인 장르와는 전혀 다른 영역을 탐구하는데, 토머스 새비지의 자전적 소설을 바탕으로 서늘한 심리적 스릴과 억압받는 여성 서사, 묵직한 여운을 남기는 작품을 완성해 베니스영화제 은사자상을 수상했다. 아울러 기존의 웨스턴 사운드와는 전혀 다른 조니 그린우드의 탁월한 불협화음도 빼놓을 수 없다. <데어 윌 비 블러드>의 연장선장에 놓인 듯한 <파워 오브 도그>는 특유의 날카롭고 전위적인 현악의 위력을 맘껏 발휘해낸다.
거칠고 위압적인 필(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카리스마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신경쇠약 직전의 로즈(커스틴 던스트), 유약하지만 악랄한 피터(코디 스밋 맥피), 그리고 부드러운 조지(제시 플레먼스)까지 등장인물들을 현악이 가진 특징들로 묘사해가는 조니 그린우드의 다양한 질감의 사운드는 결코 듣기 편안하지 않지만, 미국 전통의 목가적인 민속 음악을 비틀어 색다른 긴장과 폭력, 비밀의 의미를 부여한다. 벤조처럼 연주되는 첼로와 디 튠된 홍키통크 피아노, 1960년대 TV시리즈 <스타트렉> 음악들에서 영감을 얻은 금관부 등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음악적 모험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이 독특한 조합들이 어우러져 만드는 복합적인 감정들은 영화를 더욱 풍부하게 해석하게 만든다.
스펜서
By 조니 그린우드
2016년 발표된 <네루다>와 <재키>에 이어 칠레 출신의 영화감독 파블로 라라린은 세 번째 실존 인물을 다룬 영화 <스펜서>를 발표했다. 제목에서 눈치 챌 수 있듯 다이애나 프랜시스 스펜서, 즉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다룬 작품으로, 그녀가 1991년 왕실 가족들과 3일간 크리스마스 파티를 치루며 찰스 왕세자와 이혼을 결심하는 순간을 스케치한다. 이미 <재키>에서 비슷한 지점을 포착해 미카 레비 음악이 오스카 음악상 후보에 올랐던 것처럼 <스펜서>에선 조니 그린우드가 맡은 음악 역시 국가의 시스템과 혼란한 인물들의 내면, 갈등과 번뇌 그리고 결심을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바로크 양식과 프리 재즈를 믹스시켜 표현해냈다.
앞서 소개한 <파워 오브 도그>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1960~70년대 엔니오 모리꼬네의 파격적인 실험성을 떠올리게도 하는데, 영국 왕실의 경직성을 상징하는 클래식컬함과 다이애나의 자유를 암시하는 프리 재즈가 부딪치며 만들어내는 우아한 혼돈과 격정적인 비극은 그저 경탄스러울 따름이다. 작년 <소울>과 <맹크>로 음악상을 하드 캐리했던 트렌트 레즈너와 아티커스 로스마냥 올해의 음악상 주역은 단연 조니 그린우드라 할 수 있다. 여기에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신작 <리커리시 피자>마저 첨가하면 그냥 끝.
나이트메어 앨리
By 네이단 존슨
윌리엄 린지 그레셤이 쓴 원작을 바탕으로 기예르모 델 토로가 연출한 <나이트메어 앨리>는 그가 최초로 괴물과 귀신들의 세계를 떠나 탐욕과 배신, 음모가 판을 치는 서커스단의 누아르로 들어선 작품이다. 1947년 한차례 영화화됐던 이 어둠의 배경음악을 위해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으로 호흡을 맞춘 알렉상드르 데스플라가 낙점됐지만, 스케줄 충돌로 인해 하차하고 후임으로 간택된 건 라이언 존슨의 사촌이자 그의 작품들에서 음악을 맡던 네이단 존슨이다.
이미 네오 누아르라 할 <브릭>과 추리극 <나이브즈 아웃> 음악을 맡아 미스터리하면서 고전적인 색채의 사운드를 선사한 바 있는 그는 후반에 4주밖에 주어지지 않은 대타로 들어왔음에도 고색창연한 핏빛 누아르를 위해 슬픈 피아노를 메인으로 두고, 풀 관현악을 동원해 지독히도 암울하고 묵직한 비전을 들려둔다. 서정적이면서 언뜻 드러나는 불협화음은 고혹적이고 탐미적인 아돌프 도이치나 미클로스 로자, 빅터 영 등 정공법적인 할리우드 황금기 누아르와 확실하게 선을 긋고 있으며, 델 토로만의 다크한 서정에 맞는 범죄와 타락의 진혼가 같다. 드라마틱하며 장중한 스코어는 그가 더 큰 영화들에서 충분히 중용될 수 있음을 입증한다.
돈 룩 업
By 니콜라스 브리텔
<돈 룩 업>은 아담 맥케이가 이보다 더 화려할 수 없을 것 같은 출연진을 데리고 만든 SF 재난 블랙코미디로, 그와 <빅쇼트>와 <바이스>로 호흡을 맞췄던 니콜라스 브리텔이 음악을 담당했다. 혜성이 지구와 충돌한다는 걸 깨닫고 백방으로 경고하려는 과학자들의 필사적인 투쟁이라는 태그라인으로 상상하면 그려질 법한 대규모 심포닉 스코어와는 전혀 다른, 밝고 가벼우면서 짧고 임팩트 있는 컨템포러리 계열의 사운드가 주류를 이룬다. 이미 <빅쇼트>와 <바이스>를 통해 복잡하고 민감한 경제와 정치 생태계를 명료하게 음악적으로 정리한 바 있는 깔끔한 솜씨답게 이번 영화에서도 니콜라스 브리텔은 멸망을 앞둔 경박한 사회적 혼란과 진실에 대한부조리함, 무사안일주의 세태를 풍자하는 세련된 스코어를 들려준다.
특히나 빅밴드 사운드의 활력은 군상극인 영화의 유머와 이완, 서스펜스를 조율하며 아담 맥케이식 코미디에 적절히 녹아들게 만든다. 물론 스케일을 위한 관현악 큐도 존재하지만, 두텁게 쌓이는 보이스와 토이 피아노, 벤조와 만돌린, 일렉 터치가 맞물리는 다양한 스타일은 할리우드식 전형적인 감동 사운드와는 확실히 다른 결을 지닌다. 이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면모야말로 이 스코어의 매력.
페러렐 마더스
By 알베르토 이글레시아스
스페인의 악동에서 거장으로 올라선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신작 <페러럴 마더스>는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이나 <귀향>, <줄리에타>를 잇는 알모도바르의 영원한 테마, 여성과 모성에 대해 다룬 작품이다. 그 곁엔 지난 사반세기 동안 든든한 음악적 지원군이 된 알베르토 이글레시아스의 음악도 여전하다. 스페인에서 가장 많은 고야상을 수상한 영화인이자 오스카에서도 이미 세 차례나 음악상 후보에 지명된 바 있는 그는 이제 할리우드 영화들 말고 자신의 진정한 포지션이라 할 알모도바르의 영화음악으로 인정받을 때가 됐다.
이번이 벌써 13번째 협업인 <페러렐 마더스>는 그 역할을 하기에 전혀 손색없다. 사실 많은 늦은 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벨과 드뷔시 그리고 스페인 전통의 마누엘 데 파야의 음악적 영향력 아래 더욱 깊어지고 원숙해진 현악과 피아노 선율로 기묘한 인연과 숨겨진 진실, 연대와 사랑에 대해 스케치해가는 이글레시아스의 스코어는 애수어리고 관능적이다. 일면 버나드 허먼에 빚을 진 세심한 터치의 긴장과 미묘한 감정들의 산란이 담긴 농익은 현악이 스타일리쉬하고 강렬한 알모도바르의 영상과 매혹적인 주제의식과 만나 빛을 발한다. 믿고 듣는 알모도바르 영화의 명품 사운드트랙.
사운드트랙스 영화음악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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