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큐슈의 북쪽 근방에 카라츠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얼마 전 우연히 일본 평일 인/아웃 표가 왕복 10만원대 초반으로 나온 걸 발견하고 충동적으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무작정 떠나다 보니 여행도 두서가 없었다. 비행기 타는 날 아침 당일에 호텔을 예약한 걸로도 모자라 그날 그날 호텔 방에서 지도를 펼쳐놓고 다음날 행선지를 정하는 식으로 일주일 이상을 마음내키는 대로 돌아다니다 들른 곳이다.
  
당연히 그곳에 뭐가 유명한지, 뭘 먹고 뭘 해야 하는지 사전 정보가 하나도 없이 여행 팸플릿 한 장만 읽고 바닷가 방풍림 옆을 걷던 중 빈집 한 채가 눈에 띄었다. 그 집을 보는 순간 뜬금없이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조제가, 그리고 조제가 살던 그 집이 떠올랐다.

카라츠의 빈 집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원래 다나베 세이코의 단편 소설이 원작이고 이 소설에 이누도 잇신 감독이 살을 붙여 만든 영화다. 대강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대학생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가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퇴근하던 길에서 유모차에 있던 조제(이케와키 치즈루)와 마주친다. 다리가 불편하지만 음식 솜씨가 좋은 조제와 친구가 된 츠네오는 서로 호감을 느끼고 가까워진다. 그러다 조제가 츠네오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게 된 후 의식적으로 츠네오를 멀리하게 된다.
 
츠네오 역시 조제에게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내다가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 자리에서 과 후배로 들어온 신입생이 조제가 읽던 교과서와 포르노잡지의 주인이었던 걸 알게 된다. 츠네오는 “애써 잊었는데 다시 생각나잖아!” 하고 고함을 지르며 후배를 밀치고 때린다. 그 후 조제의 할머니가 죽었다는 걸 알게 된 츠네오가 조제의 집을 찾아가고 그렇게 둘은 연인이 된다.

그렇지만 20대의 사랑이 대개 그렇듯, 시간이 흐르면서 츠네오의 사랑은 식고 짜증은 쌓여가며 관계에도 균열이 생긴다. 츠네오와 조제는 마지막 여행을 하고 얼마 뒤 결국 헤어진다. 츠네오는 길을 걷다 갑자기 길에 주저앉아 오열한다. 츠네오와 헤어졌지만 더 씩씩하게 혼자의 삶을 이어가는 조제의 모습과 함께 영화는 끝난다.
 
츠네오가 조제를 다시 떠올리게 된 계기가 되는 장면이, 조제가 읽던 책의 원래 주인이었던 대학 후배를 만나는 술자리다. 일본은 우리보다는 술 문화가 여러 가지 면에서 더 선진적인 편인데 택시 요금이 워낙에 비싸서 그렇기도 하지만 술 모임을 늦게까지 하지도 않고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억지로 술을 먹이지도 않고, 잔을 돌리지도 않으며, 각자 취향에 따라 술을 골라 마실 수 있다.

이 장면에서는 츠네오가 삿포로 맥주와 '真登'라고 써있는 술을 마신다. 찾아 봤지만 정확히 어떤 술인지 찾을 수 없었는데 술의 색이나 롱 드링크 형태로 마시는 걸 보면 아마 소주(소츄) 계열의 술로 짐작된다.
 
일본에서 유통되는 소주들은 크게 증류식 소주와 희석식 소주로 나뉘는데, 증류식 소주는 을류소주(乙類燒酎; 오츠루이쇼츄, 요새는 본격소주라는 표현이 더 많이 쓰인다), 우리나라식의 희석식 소주는 갑류소주(甲類燒酎; 고루이쇼츄)라고 부른다.
 
증류식 소주는 우리나라의 안동소주 같은 전통 소주처럼 곡식을 발효시킨 후 한두번 증류해서 만들고 희석식 소주는 고구마나 기타 곡식류를 원료로 연속증류기를 사용해 아주 도수가 높은 형태의 주정을 만든 후 이 주정을 물로 희석해서 만든다. 원칙적으로 우리나라처럼 아스파탐 등의 감미료를 첨가하지는 않는데 참고로 일본에서 우리나라의 경월소주가 꽤 인기있는 편이다.
 
일본의 증류식 소주는 보통 쌀, 보리, 고구마, 흑설탕 등으로 만들고 그냥 마시기보다는 얼음을 넣어 마시거나 영화에서처럼 찬물을 섞거나(미즈와리) 혹은 따뜻한 물을 섞어(오유와리) 마시곤 한다. 일본 청주처럼 지역마다 유명한 양조장들이 많아서 지역 특산의 증류식 소주들이 술집과 가정에서 소비되고 있는데 그중 가장 많이 팔리는 제품 중 하나가 아마 이 술일 것이다.

쿠로키리시마

'쿠로키리시마'라는 이름의 이 술은 고구마를 사용해서 만든다. 개인적으론 온 더 록으로 마시는 걸 좋아하는데 입안에 머금으면 증류주 특유의 향이 강하게 치고 들어온 후 곡식의 단맛이 뒤에 따라온다.
 
고급스러운 맛과 향이라기보다는 버번으로 치면 와일드터키 101처럼 묘하게 '싸구려틱'한 맛이 나는데 그 맛이 정말 매력적이다. 증류식 소주도 워낙에 종류가 많아서 어지간한 위스키보다 비싼 소주도 있고 그런 것들이 당연히 맛있지만, 어떤 소주를 마셔도 가끔은 이 '싸구려틱'한 맛이 생각난다.
 
참고로 같은 회사에서 '아카키리시마'라는 이름의 더 고급 제품도 나오지만, 뭐랄까, 사견으론 어설프게 맛이 고급스러워져서 이도 저도 아닌 맛이다. 이 정도의 술을 사려면 차라리 더 비싼 걸 고르는 게 좋을 듯 싶고 혹시 아카키리시마를 마실 기회가 생긴다면 온 더 록보다는 스트레이트나 오유와리를 추천한다.
 
사람마다 영화에 공감하는 포인트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나 같은 경우는 츠네오가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릴 때 예전 생각이 많이 났다.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하게 헤어지고 난 뒤 선약이 있던 장소에 가서 친구 둘과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소주를 마시며 필사적으로 낄낄거리다 고기 굽던 드럼통 옆 간이 의자에서 갑자기 고개를 숙이고 울음을 터트렸던 기억.
 
그런 기억은 시간이 오래 지나도 마치 소주를 입안에 털어놓은 뒤 목 뒤에서 느껴지는 쓴맛처럼 아릿하게 남는다. 지금도 그때 마셨던 소주의 맛이 기억나는데, 내가 만약 일본인이었다면 아마도 지금 쿠로키리시마의 맛이 기억날 것 같다. 그런 맛이다.
 
사랑하다가 헤어지는 많은 커플들, 그런 모습들은 모두 특별하지만 또 다들 비슷할 것이고, 그런 추억을, 작고 작은 감정선이 흘렀던 자욱들을 영화 속에서 다시 확인하면서 나만의 추억과 영화 속 장면들이 겹쳐지는 걸 느낀다. 그렇게 영화에 대한 애정이 생긴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인생 영화로 꼽는 많은 사람들은 그래서 이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을까 싶다.
 
카라츠에서 난 운이 좋았는지, 나빴는지, 혼자서 방풍림 옆 해변가를 걸었고, 혼자서 오징어 회를 먹었고, 혼자서 카라츠 성에 올라가 마침 운동회가 열리던 근처 초등학교 운동장을 보았다. 지금이야 아들의 손을 꼭 잡고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지만, 영화를 보는 동안은 오래전 연인이 떠올랐다.
 
연애를 하다 보면 피치 못하게 어떨 때는 츠네오(?)가 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조제가 되기도 하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생각났던 그 시절 나는 츠네오였다. (아 물론 외모는 아니...)
 
내가 조제의 집을 생각나게 하는 집을 보았을 때 그 집은 이미 버려진 상태였는데, 그 집에 살던 사람은, 내가 예전에 사랑했던 사람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바라건대 파트너와 행복하게, 아니면 설사 영화 마지막의 조제처럼 혼자이더라도 씩씩하게 잘 살고 있기를.


데렉 / 술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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