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화와 상실을 정직하게 응시한 「파과」에 장르의 색을 입힌 〈파과〉

구병모의 소설 「파과」(왼), 민규동의 영화 〈파과〉
구병모의 소설 「파과」(왼), 민규동의 영화 〈파과〉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 <내 아내의 모든 것>의 민규동 감독이 냉혹한 하드보일드 액션 영화 <파과>로 돌아왔다. <파과>는 구병모 작가의 동명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구병모의 「파과」는 ‘60대 여성 킬러’라는 이례적인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한국 소설에서 새로운 여성 서사를 탄생시키며 호평을 받았다. 전 세계 13개국에 수출됐으며, 뉴욕타임스 선정 ‘주목할 만한 책 100선’에 선정되면서 기염을 토한 작품이다. 구병모의 서정성 짙은 문체는 노화와 상실, 인간 존재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묵직하게 전한다. 민규동의 영화 <파과>는 원작의 주제를 이어받으면서도 하드보일드 액션 장르의 색을 선명히 드러낸다. 영화는 40여 년간 활동한 레전드 킬러 조각과 투우의 갈등과 대립, 둘의 액션을 더욱 부각한다. 영화에서도 드러나는 원작의 주제, 원작과 비교해 달라진 점 등을 살펴보았다.


〈파과〉의 조각(이혜영)
〈파과〉의 조각(이혜영)

 

영화와 원작의 제목인 ‘파과’는 부서진 과일, 흠집 난 과실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파과는 원작과 영화에서 “최고의 시절에 누군가의 입속을 가득 채웠어야 할, 그러지 못한, 지금은 시큼한 시취를 풍기는 덩어리”(「파과」, 구병모, 위즈덤하우스, 225쪽)로 형상화된다. 파과는 두 작품 속에서 노화와 쇠잔을 겪으며 살아가는 60대 여성 킬러 조각과 노화를 나타내는 상징물로 존재한다. 두 작품은 편견 가득한 사회에서 섞고 부패한 과일처럼 취급되는 여성 노인 조각의 서사로 노화의 숨은 의미를 붙잡는다. 상실과 소멸을 동반하는 노화는 하루하루 죽음으로 이행하는 삶 자체이기도 하다는 것을.


“너무나도 절박한 인물들의 이야기”

〈파과〉의 조각과 투우(김성철)
〈파과〉의 조각과 투우(김성철)

 

민규동의 <파과>는 원작에 없던 장면으로 오리지널리티를 더한다. 조각은 일을 마치고 돌아온 집에서 흑백 영화를 가만히 응시한다. 자기 삶에 조금의 애틋함도 없는 그녀가 영화를 보는 취미를 갖고 있는 것은 다소 의아한 설정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영화가 찰리 채플린 감독의 무성 영화 <키드>인 것은 다분히 감독의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파과>에 삽입된 <키드>의 장면은 채플린의 부랑자가 길에서 데려와서 키운 아이의 끼니를 챙겨 주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장면은 영화의 중후반부에서 조각이 투우를 집에 데려와 식사를 함께하는 장면과 연결된다. 두 장면은 전통적인 개념의 혈연 가족이 아닌 유사가족의 모습을 보여주며, 사랑의 범위를 확장한다. 또 <키드>의 장면은 두 인물의 삶을 고스란히 투영한다. 어린 시절 목격한 아버지의 죽음 이후 혼자 남겨진 투우는 버려진 아이, 노화에 의해 얼굴 곳곳에 저승꽃이 피어 사람들로부터 꺼려지는 조각은 가난의 흔적이 역력해 어디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하는 채플린의 부랑자 캐릭터와 같다. 조각과 채플린의 부랑자 캐릭터는 각각 늙음과 가난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갖는다.

 

〈파과〉
〈파과〉

투우는 끝내 자신의 아버지를 죽게 한 방역(극중 청부살인을 이르는 말)의 세계로 흘러 들어온다. 그는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을 파멸의 길에 이르게 한, 동시에 따뜻한 돌봄으로 가족보다 더 가족같이 대했으며, 학대의 가해자에게서 벗어나게 해준 조각을 한평생 찾아 헤맨다. 그에게 조각은 증오와 애정이 교차하는 대상이었고, 무한한 사랑을 주는 어머니를 대체하는 대상이었다. 오랜 시간 찾았던 조각과 다시 만나 함께 밥을 먹는 것은 그가 그토록 바라왔던 것일 테다. 투우는 조각과 함께 밥을 먹는 장면에서 그녀를 향한 애정을 숨기지 못하며 눈시울을 붉힌다. 이 장면에 대해 민규동 감독은 “영화 속에서 밥 먹는 건 중요한 모티브다. 이 영화에서 이성애, 모성애 같은 전통적인 개념의 애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들이 밥을 같이 먹는다는 것은 유사 가족이 된다는 의미를 전달하며, 이 영화가 너무나도 절박한 인물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전했다.


각자의 결말이 택한 것

〈파과〉 무용
〈파과〉 무용
〈파과〉 강 선생(연우진)
〈파과〉 강 선생(연우진)

 

구병모의 「파과」와 민규동의 <파과>는 결말에서 가장 극명하게 갈라진다. 두 작품은 조각과 투우의 목숨을 건 혈투 이후의 결말을 다르게 그려낸다. 우선 구병모의 「파과」는 네일숍에서 네일아트를 받는 조각의 평온한 일상으로 끝이 난다. 그녀의 일상에는 여전히 사람들의 편견이 뒤따른다. 네일숍의 원장은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조각의 늙은 목소리에서 쑥스러움을 감지하고, 그녀를 뜨내기손님으로 간주한다. 원장은 노년의 여성과는 다른 의미로 편견의 대상으로 삼는 숍의 막내에게 그녀를 맡게 한다. 원장의 선택은 뜻하지 않게 자신의 편견에 한 방을 먹이는 사건을 불러일으킨다. 이 일은 원장이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벌어진다. 당연히 두 손을 갖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손님의 손은 하나뿐이었고, 막내는 합리적으로 다섯 손가락의 값만 받은 것이다. 원장은 사회생활의 경험은 없지만 타인의 불행에 공감할 줄 아는 막내의 선택을 하릴없이 이해해 줄 수밖에 없었다. 유유히 네일숍을 나선 조각은 “빛나는 다섯 개의 손톱”을 하늘에 들어 올리며 바라본다. 그녀는 이제 사람들의 편견에 짓눌리지 않는다. 오히려 “진짜가 아니며 짧은 시간 빛나다 사라질 것이기에”(같은 글, 342쪽) 더욱 자신의 손톱을 마음에 들어 한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구병모는 노화와 쇠잔을, 상실을 이렇게 표현한다. “사라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 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같은 글, 342쪽). 그에게 상실은 삶의 모든 순간이 아니었을까.

 

〈파과〉
〈파과〉

민규동의 영화 <파과>에서 조각은 평온한 일상과는 거리가 먼 결말을 마주한다. 그녀는 여전히 방역업자로 활약하며, 사이비 종교의 교주를 처단한다.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인간을 처단하는 그녀의 모습은 노화에 몸과 마음을 내어주는 평범한 인간이 아닌 여성 영웅의 모습에 가깝다. 결말에 이르러 영화는 노화와 상실로 삶 그 자체를 그리려 했던 원작의 주제를 퇴색하고, 장르 영화가 취할 수 있는 안전한 선택을 내린다. <파과>는 끝내 조각을 여성 영웅으로 만들어 냈지만, 그래야만 했던 이유를 설득시켜주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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