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참 혹독하다. 평범한 일반인에게도 이렇게 가혹한데 세계 평화와 정의를 구현해야 하는 슈퍼히어로들에게는 오죽하겠나.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슈퍼히어로들에게는 이런 힘든 과업을 견뎌내기 위해(혹은 좀 다른 이유로…) 조수 격의 존재들이 하나씩 있는 경우가 많다.
히어로 옆에서 히어로들을 돕는 이런 캐릭터들을 ‘사이드킥’이라고 하는데, 사이드킥으로 활약하다가 독립해 히어로 활동을 하기도 하는 등 나름 슈퍼히어로 계의 등용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히어로물의 역사만큼이나 사이드킥 캐릭터도 수없이 많지만, 그중 잘 알려져 있고 유명세를 떨친 사이드킥들만 모아 봤다.
1) 배트맨과 로빈
사이드킥 이야기를 하면서 로빈을 빼놓는 것은 깍두기 없는 순댓국이나 다름없다. 전 세계에서 로빈만큼 잘 알려진 히어로 사이드킥은 없기 때문이다. 1대 딕 그레이슨을 시작으로 제이슨 토드, 팀 드레이크, 스테파니 브라운, 데미안 웨인 등 7명에 달하는 캐릭터가 역대 로빈 자리를 거쳐간 바 있으나 이 중 가장 잘 알려진 캐릭터는 1대인 딕 그레이슨이다.
배트맨의 실체인 고담시의 유력인사 브루스 웨인은 어느 날 서커스를 보던 중 곡예사 부부가 추락해 사망하는 것을 목격하고, 그들의 아이였던 딕이 고아가 된 것을 알게 되자 딕의 법적 후견인을 자처하게 된다. 자신도 딕과 비슷한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기 때문인지 안쓰럽게 여겼던 듯. 처음에는 브루스가 배트맨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 우연한 계기로 알아차린 후 배트맨을 돕게 되면서 사이드킥 캐릭터로 거듭났다.
로빈이란 이름은 딕 그레이슨의 애칭 중 하나였는데, 딕이 자신의 히어로 네임을 로빈으로 정하면서 이후 배트맨의 사이드킥 캐릭터는 모두 ‘로빈’으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배트맨과의 불화로 그를 떠났고 빈자리는 고담시의 또 다른 고아였던 제이슨 토드가 채우게 된다. 제이슨은 빈민가 출신으로 우연히 브루스 웨인의 양자가 되면서 2대 로빈 자리를 이어받기도 했지만, 조커의 계략에 넘어가 참혹한 죽음을 맞았고 이 사건으로 인해 배트맨은 엄청난 슬픔에 시달리기도. 물론 코믹스 쪽에서는 부활에 성공했지만 영화에서는 여전히 죽은 것으로 나오는 등 안타까운 행적을 보이고 있다.
이후 딕 그레이슨에게 추천받아 로빈이 된 팀 드레이크가 있었고, 생물학적으로 배트맨의 아들인 데미안 웨인도 로빈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중 데미안 웨인은 슈퍼맨의 아들인 존 켄트와도 친하게 지내고 있다는 사실.
1대 로빈인 딕 그레이슨은 ‘나이트윙’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활동하기도 했고 ‘그레이슨’이란 이름을 쓴 적도 있다. 최근에는 DC 오리지널 드라마인 <DC 타이탄>의 주역급 캐릭터로 등장하는데, 배트맨과의 결별 이후에도 계속해서 자경단 활동을 하고 있긴 하지만 정체성 문제로 고민에 빠져 있는 부분이 원작과 상당히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듯. 2대 로빈인 제이슨 토드도 부활 이후 레드 후드가 되어 활동 중인데, 드라마에서는 딕의 자리를 계승한 후임 격 캐릭터로 등장했다.
배트맨의 역대 로빈들은 배트맨의 아들격 존재라는 점(혹은 진짜 아들이거나)이 공통점인데, 부모가 없거나 배트맨과 만난 이후 비참하게 다치거나 죽는(...) 불행한 가정사를 겪는 경우가 많다. 배트맨 패밀리의 서글픈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어쨌든 역대 로빈들은 서로 큰 악감정은 없고 같이 배트맨 욕을 하기도 하는 등 나름 괜찮은 형제지간이라는 점이 재미있다.
2) 캡틴 아메리카와 버키
캡틴 아메리카와 버키 하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의 버키 반즈를 떠올리는 분들이 상당수겠지만 초대 버키는 사실 캡틴 아메리카의 팬이었다. 설정이 여러 번 변경되기는 했지만 군부대에 있던 어린아이였으며 영화에서 다른 설정을 도입한 셈.
반즈 외에도 무려 6명의 ‘버키’가 존재하지만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는 않았고, 초대 버키의 설정을 변경해 영화에 등장시켰다. 캡틴 아메리카의 첫 번째 솔로 무비인 <퍼스트 어벤저>에서는 옛 친구이자 동료였다가 전장에서 잃고 말았던 것으로 마무리되었지만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에서는 하이드라 소속의 암살자로 등장해 MCU판 캡틴 아메리카의 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은 하이드라의 세뇌 때문이었고, 결국 버키는 캡틴 아메리카에게 구출되어 어벤저스와 함께 행동하게 된다.
MCU의 캡틴 아메리카에게 있어서 작중의 버키만큼 의미 있는 인물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닌 정도인데, 이제까지의 동료(특히 아이언맨)를 등지면서까지 버키를 구해내려 했고 그의 무죄를 증명하고자 노력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엄청난 시간의 공백을 견뎌내야 하는 스티브 로저스로서는 같은 고민을 공유하는 버키의 존재가 꽤 컸을 것.
코믹스에서는 ‘캡틴 아메리카의 죽음’ 이후 잠시 동안이지만 캡틴 아메리카의 유지를 이어받아 활동한 적도 있으며 무엇보다도 블랙 위도우와 공식 커플이기도 했다. 영화에서는 이제 영영 볼 수 없겠지만…. KGB 요원이던 시절의 블랙 위도우와는 접점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어 블랙 위도우의 솔로 영화에 등장할 가능성이 점쳐지기도 한다.
자신이 세뇌 당했던 시절에 저지른(즉 윈터 솔져가 되어 강제로 했던 일들) 범죄를 속죄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과 함께 고뇌에 빠진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영화에서는 이런 부분이 디테일하게 묘사되지 않아 부정적인 의견도 많이 나온 것도 사실이다. 향후 <팔콘&윈터 솔져>라는 제목의 디즈니+ TV 시리즈로 먼저 찾아올 예정인데,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의 관계와 더불어 버키의 내면에 대한 내용이 다루어지길 바라본다.
3) 조커와 할리 퀸
이쪽은 슈퍼히어로가 아니라 명확한 빌런인 데다가 사이드킥이라기보다는 연인 관계로 봐야 하는 게 더 맞을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든 할리 퀸은 조커의 사이드킥 캐릭터로 출발했고 조커와 절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라는 것만은 명확하다.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할리 퀸의 이미지는 <수어사이드 스쿼드>에서 마고 로비가 연기한 할리 퀸일 텐데, 실제로 이 비주얼이 정착된 것은 DC코믹스의 전면 개편이라 할 수 있는 ‘리버스’ 이후였고 이전에는 빨간색과 검은색 조합의 광대 복장을 입은 여성 캐릭터였다. 세계관 리부트 이후로 가장 많이 달라진 캐릭터 중 하나.
처음에는 정식 캐릭터로 개발된 것도 아니었고 설정도 따로 없었으며 이름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그야말로 엑스트라였지만, 조커의 사이드킥으로 계속 등장하게 되면서 인기를 얻었고 이후 설정이 추가되어 캐릭터화가 진행되었다. 첫 등장이 애니메이션이었고, 오히려 코믹스에는 나중에 진출한 독특한 트리비아가 있는 캐릭터다.
할리 퀸의 배경 설정은 대체로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영화와 마찬가지로 원래는 멀쩡한 수재이자 정신과 의사였지만 조커를 만나게 되면서 사랑에 빠져 버렸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원래부터 그렇게 정의로운 타입은 아니었고 목표가 있으면 나쁜 짓도 불사하는 타입의 삐딱한 문제아였다는 설정인데 이슈마다 조금씩 다르게 등장하긴 하지만 조커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만은 동일하다.
역시나 복잡한 캐릭터이자 고담시의 빌런 중 하나였던 포이즌 아이비와 듀오 이슈가 나오기도 했는데, 코믹스 쪽에서는 조커와 이런저런 대사건(정상적인 커플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인데 조커니까 가능한 얘기다)을 거친 끝에 결국 헤어지게 된다. 최근 트레일러 영상을 추가로 공개한 <버즈 오브 프레이>의 초반부에도 이런 이야기가 등장할 것으로 보인다.
초반에는 조커의 사이드킥 캐릭터로서 엄청난 사랑을 조커에게 쏟아붓는 모습을 보였는데, 조커는 조커답게 자기 기분대로 할리 퀸을 대하며 고마워할 줄도 모르는 데다가 할리 퀸을 미끼로 써서 탈출하는 등 어지간한 똥차가 따로 없다. 하지만 마르지 않는 사랑 때문에 조커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범죄자로 살아간다는 게 반복되었다. 그러다 리부트를 거치면서 조커로부터 벗어나게 되었고 정신적으로도 독립한 후에는 자신의 팀을 만들거나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4) 앤트맨과 와스프
MCU의 모든 영화 중에서도 가장 가족적인 분위기를 진하게 풍기는 시리즈가 바로 <앤트맨>이다. 2대 앤트맨인 스콧 랭이 출소하자마자 다시 범죄에 손을 댄 이유도 딸인 캐시를 보기 위해서였고(정확히는 양육비를 내기 위해서) 아니나 다를까 위기에 봉착하자 딸부터 공격하는 적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살인기차 토마스 역시 캐시의 장난감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그 어린 캐시가 그리워지기도.
어쨌든, 이 앤트맨의 곁에는 와스프가 있었다. 1대 앤트맨 행크 핌 박사는 앤트맨 파워 수트 테크놀러지의 근간인 핌 입자를 발견한 사람으로 영화에서는 이미 고고한 노인이 되어 있는데, 코믹스판에서는 최초 등장했을 때인 1962년부터 지금까지 현역으로 뛰고 있다. 영화와 달리 옐로 재킷, 골리앗, 자이언트맨 등 다양한 모습으로 활동하기도 했고 울트론을 만든 사람도 코믹스에선 행크 핌.
이 행크 핌의 연인이었다가 아내가 된 재닛 반 다인은 행크의 요청을 받아들여 핌 입자를 받고 와스프가 되었다. 기본적으로 능력은 앤트맨과 유사하며, 말벌이란 뜻의 히어로 네임답게 블라스트를 발사할 수 있는 등의 점이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영화에서는 수많은 인명을 구하기 위해 양자 영역으로 들어가 빠져나오지 못했는데, 2대 앤트맨인 스콧이 스스로의 힘으로 양자 영역을 탈출한 데에 힌트를 얻은 행크와 딸 호프의 노력으로 <앤트맨과 와스프>에서 귀환할 수 있었다.
즉 영화에는 앤트맨과 와스프의 1, 2대가 모두 있는 셈인데, 영화 쪽은 1대는 은퇴했고 2대의 커플이 듀오로 활약하고 있는 것. 작중 활약을 잘 들여다보면 아무래도 개미를 조종하는 능력이나 잠재력 면에서는 2대 와스프인 자넷 반 다인 쪽이 훨씬 월등해 보이기도 하는데...(대체 누가 누구의 사이드킥인가) 실제로 2대 앤트맨 후보로 낙점된 후 스콧 랭은 자넷에게 격투술을 배웠고 매일같이 강펀치를 맞아야 했으며 수트 사용법이나 기술적인 부분도 배우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재밌는 건 코믹스의 스콧 랭은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스타크 인더스트리에 취직하면서 아이언맨과 자주 엮이게 되는데, 영화에서는 하워드 스타크에게 크나큰 악감정이 있는 행크 핌에게 사사받은 관계로 별사건 없이 아이언맨과는 멀어졌다는 점이다.
이외에도 기막힌 케미를 자랑하는 히어로와 사이드킥들은 많다. 쉴 새 없이 공격하고 갖은 방법으로 히어로들을 압박하며 평화를 노리는 빌런들에게 맞서기 위해서는 혼자 힘으론 부족해질 때가 많기 때문일지도. 하지만 이렇게 조수 역할을 하던 사이드킥 캐릭터들도 자신만의 고유한 힘을 발휘하기도 하고 때로는 히어로를 능가하는 힘이나 지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들 중 강력한 파워를 보여준 사이드킥들은 앞서 이야기한 로빈과 할리 퀸처럼 별도의 히어로로 다시 각성하기도 한다. 또한 어린 사이드킥들이 모여 팀을 구성하기도 하고, 이런 사이드킥들이 모여 미션을 수행한다는 아이디어는 실사화 시리즈인 <레전드 오브 투모로우>에서도 다루어진 바 있었다.
히어로 코믹스는 늘 그래 왔듯 멀티버스와 다양한 이슈로 상상력의 한계를 시험할 예정이고, 디즈니와 DC 역시 자체 스트리밍 플랫폼을 출범시키면서 보다 다양한 콘텐츠로 팬들을 찾아오고 있다. 기존에는 큰 비중 없이 다루어지던 이런 사이드킥 캐릭터들도 실사화로 보다 더 자주 만나볼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희재 / PNN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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