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정리하고 되돌아보는 12월 말, 이 시기 할리우드에선 각종 시상식들이 한창 펼쳐진다. 각 도시별 비평가협회들은 한 해 영화들을 복기하고, 연초의 빅 3 - 골든글로브와 영국 아카데미, 오스카로 그 대미를 장식한다. 여기에 맞춰 완성도 높은 영화들이 개봉해 반응을 살피고, 여론을 조성하며 시상식에 대비한다. 따라 주객이 전도된 것처럼 한 해 결산의 느낌보단 오히려 시상식에 더 초점이 맞춰진 면도 없지 않다. 그래서 아예 한 해를 정리하는 의미의 ‘베스트 목록’보단(사실 이런 의미도 있긴 하지만) 연말과 연초 시상식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그리고 오르내릴) ‘2019 할리우드 사운드트랙 리스트 5’를 소개해본다.
먼저 안타깝게도 이 명단에선 제외했지만 올해 나온 인상적이고 주목할 만한 사운드트랙들을 간략하게나마 언급하고 본문으로 넘어가고자 한다. 아무래도 사운드트랙이 활성화된 할리우드 영화들을 위주로 얘기하게 된 건 아쉽게 생각한다. 마이클 아벨스의 <어스>와 힐더 구드나도티르의 <조커>, 알란 실베스트리의 <어벤져스: 엔드게임>, 존 파웰의 <드래곤 길들이기 3> 그리고 넷플릭스 영화들은 이미 앞서 자세히 다룬 바 있기에 이번 리스트에선 제외한다. <스타워즈: 라이즈 오브 스카워커> 역시 추후 따로 다룰 예정이라 빠졌다. 여기에 거론하지 않았다고 해서 시상식 후보로 오르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따로 다뤘던 만큼 시상식 후보에 오를 가능성이 더 높다는 말인지 모른다. 리스트는 한국 사운드트랙과 마찬가지로 무순이다.
까다로운 오스카 규정 탓에 쇼트리스트에선 탈락했지만 테렌스 맬릭의 신작 <어 히든 라이프> 음악을 빼놓을 수 없다. 음악적 심미안이 높은 맬릭이 엔니오 모리꼬네와 한스 짐머, 제임스 호너, 알렉산드르 데스플라에 이어 손을 잡은 건 제임스 뉴턴 하워드였다. 그는 바이올린 솔로와 피아노로 숭고한 휴머니즘을 강렬히 뽐냈다. 프랑소와 지라르가 연출한 <이름들로 만든 노래>도 잊을 수 없는 바이올린이 등장한다. 거장 하워드 쇼어의 솜씨다. 우주판 ‘암흑의 핵심’같았던 제임스 그레이의 <애드 아스트라>는 막스 리히터와 론 발피라는 전혀 안 어울리는 조합을 아슬아슬 묶어두었다. 불길한 징조처럼 울려 퍼지던 마크 코벤의 전위적인 사운드가 인상적인 <더 라이트하우스>도 추가한다. 로버트 에거스 영화의 반은 음악의 몫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밀의 꽃> 이후 언제나 페드로 알모도바르 곁에서 든든한 음악적 조력자가 되어준 알베르토 이글레시아스의 <페인 앤 글로리>도 압도적이다. 삶과 예술을 복기하는 거장의 회고에 더할 나위 없이 멋진 낭만을 선사한다. 클래식한 탐정물을 떠올리게 한 <나이브스 아웃>도 눈여겨볼만하다. 라이언 존슨의 사촌이자 단골 영화음악가인 나단 존슨이 매만진 앤틱 사운드는 마술과도 같았다. 코미디에서 두각을 나타낸 테오도르 샤피로가 매만진 <밤쉘>은 여성 보이스와 일렉트릭 비트, 엘프만스러운 오케스트레이션을 엮어 기묘한 블랙코미디 스코어를 완성했고, 독특한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내 몸이 사라졌다>의 댄 레비와 명품 다큐 <아폴로 11>에서 맷 모튼이 들려주는 일렉트릭 사운드는 이 리스트에 올리지 못한 게 아쉬울 만큼 환상적이었다.
작은 아씨들
by 알렉산드르 데스플라
<레이디 버드>로 성공적인 (솔로) 감독 데뷔를 치른 그레타 거윅이 차기작으로 발표한 건 너무나도 유명해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루이자 메이 올컷의 고전 <작은 아씨들>이다. 캐서린 햅번과 엘리자베스 테일러, 위노더 라이더 등 당대 쟁쟁한 여배우들이라면 한 번쯤 거쳐 가며 여러 차례 리메이크된 바 있는 이 클래식에 거윅은 재기 발랄한 입담과 새로운 시각으로 통통 튀는 매력을 선사할 것으로 보인다. 음악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과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으로 두 차례 오스카 음악상을 거머쥔 바 있고, 2000년 이후 가장 자주 시상식들의 단골 후보로 등극한 알렉산드르 데스플라가 맡았다. 유려하며 발랄한 피아노와 감미로운 목관부, 정갈한 스트링이 만나 네 자매의 소소한 에피소드들을 풀어내는 따스하고 격조 높은 사운드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나 <탄생>, <페인티드 베일>, <색, 계>, <셰리>,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등을 통해 익히 예상해봄직한 전형적인 스타일이지만, 그래서 더 좋아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아름다운 음악이기도 하다. 이미 보스톤과 시카고 비평가협회에서 상을 받았고, 이런 고전 멜로드라마에 취향 저격인 오스카에서도 환대 받을, 데스플라의 주특기가 발휘된 올해의 사운드트랙.
1917
by 토머스 뉴먼
샘 멘데스 감독이 <007>에서 물러난 뒤 4년 만에 내놓은 신작으로 제목 <1917>에서도 알 수 있듯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삼은 작품이다. 공개되자마자 로저 디킨스의 압도적인 촬영과 소름 돋는 토머스 뉴먼의 음악에 극찬이 쏟아졌다. 체험형 영화이고, <버드맨>에서 시도된 바 있는 원신 원컷이란 실험적인 요소 때문에 뉴먼은 영화 내에서 인위적으로 들릴 수 있는 멜로디 라인을 절제한 채, 시종일관 반복적인 리듬과 우중충한 음향에 가까운 사운드를 구사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보단 <덩케르크>에 가까운데, 짐머라면 익숙한 스타일이겠지만 작곡가가 뉴먼이란 점에서 여러모로 생소하게 다가온다. 미니멀한 색채와 적극적으로 신스 사운드를 활용하던 그이지만, <1917>에서 들려주는 황폐한 전장의 임장감은 극히 암울하고 막막히 이를 데 없다. 투명하고 파리한 피아노는 두 전령의 위태로운 목숨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후반부터 서서히 고조되며 존재감을 드러내는 오케스트럴 사운드의 위력은 감동적이고 묵직하게 휘몰아친다. 댈러스와 세인트루이스 비평가협회에서 상을 받았고 15번째 오스카 지명이 확실해 보이는 가운데, 이번에야말로 무관의 제왕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포드 v 페라리
by 마르코 벨트라미 & 벅 샌더스
어떤 장르건 기본 이상의 완성도를 보장하는 장인 제임스 맨골드의 솜씨가 드러나는 <포드 V 페라리>는 그와 벌써 4번째 만나는 마르코 벨트라미가 벅 샌더스와 함께 음악을 맡았다. 자동차 회사의 이름과 자존심을 건 르망24의 역사적인 대결을 극화한 만큼 그들은 60년대를 주름잡았던 ‘더 벤쳐스’를 떠올릴 법한 레트로한 기타 사운드를 메인으로 뒀는데, 그 시절 향수를 불러오는 것뿐만 아니라 대결의 묘미가 담긴 스릴과 흥분도 함께 전달한다. 영화 초반 포드와 페라리 간의 악연을 말해줄 땐 퀸시 존스나 랄로 쉬프린의 익숙한 케이퍼 무비 음악들을 연상케 하고, 후반 레이싱에 무게감을 옮겨가면서부터 미셸 르그랑의 <르망>을 비롯한 여러 레이싱 영화들 음악을 떠올리게 만든다. 낭창낭창한 기타와 감정을 고조시키는 브라스섹션, 차량 RPM을 박진감 넘치게 표현한 퍼쿠션과 일렉트릭 사운드가 어우러져 고양감을 자극하고 질주 쾌감을 선사한다. 하지만 레이싱 이면의 정서적 교감과 동료애, 스피드가 절정에 올랐을 때의 고요 등을 설명하는 건 나른한 기타와 공감각적인 엠비언트 사운드다. 가히 소리의 영화라 할 만큼 차량 엔진과 배기음이 맞물린 파워풀한 스코어와 그 시절 삽입곡들의 절묘한 조화는 찬탄을 불러온다.
조조 래빗
by 마이클 지아치노
배우이자 각본가이며 <토르: 라그나로크>로 할리우드 흥행 감독이 된 타이카 와이티티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크리스틴 뢰넨스 소설을 바탕으로 한 2차 세계대전의 풍자 코미디 <조조 래빗>을 만들었다. 상상 속 히틀러와 히틀러 유겐트 소년이 등장하는 다소 불편할 수 있는 지점을 조금이라도 완화하기 위해 마이클 지아치노라는 특급 도우미 찬스를 사용한다. 포스트 존 윌리엄스의 평가를 받아온 그는 <업!>으로 오스카 음악상을 받은 이후 다소 주춤한 행보를 보인 게 사실인데, 이번 작품을 통해 획일적이고 만성적인 상업영화 규율에서 탈피해 시니컬하면서도 동화적인 반전 사운드를 들려준다. 곡들이 1분 내외로 상당히 짧은 편이고, 독일어로 된 올드 팝들에 음악적 영향력을 나눠가는 느낌이라 아쉬운 부분도 분명 있지만, 파시즘을 상징하고 조롱하는 행진곡풍 테마와 아이의 시선을 드러내는 리코더나 천진난만한 첼레스타 그리고 기타와 피아노로 서정성을 극대화해 아이러니한 심상을 전달하는 지아치노의 색다른 시도는 충분히 인정받을 만하다. 대작과 프랜차이즈에 얽매여 초기의 신선한 감흥을 잊고 있던 그가 과감히 택한 모험은 완벽하지 않아도 새로운 전환과 계기를 충분히 마련했다.
머더리스 브루클린
by 다니엘 팸버턴
<조커>와 <1917>, <작은 아씨들>, <결혼이야기>가 워낙 시상식들 음악상 후보로 강세를 보인 편이라 남은 한자리를 놓고 치열한 접전이 펼쳐질 듯싶은데, 아카데미 전초전이라 할 수 있는 골든글로브에서 손을 들어준 건 다니엘 펨버턴의 <머더리스 브루클린>이었다. 에드워드 노튼의 감독 데뷔작이자 제작, 각본, 주연까지 1인 4역을 한 영화로, 조너선 리섬의 동명 누아르 소설이 원작이다. 흥행에선 좋은 성적을 얻진 못했지만 전편에 가득 수놓은 다니엘 펨버턴의 재즈 스코어만큼은 만장일치로 격찬 받았다. 모던 재즈의 거장이자 천재적인 트럼펫터 윈튼 마살리스의 도움을 받아 완성된 음울하고 비극적인 무게감은 1950년대라는 전후 누아르 세계와 만나며 생생하고 드라마틱하게 표현됐다. 펨버턴은 재즈를 활용하되, 재즈라는 전통성에 갇혀있지 않기 위해 찰리 밍거스나 찰리 파커가 보여준 즉흥적이며 무정부적인 접근법이나 제리 골드스미스의 혁신적인 악기 활용 등을 통해 독특한 시도들을 꾀했다. 불협화음과 공격성 그리고 대중적인 색채가 기묘하게 공존하는 스코어는 매혹적이고 역동적인 재미와 감동을 선사한다. 여기에 윈튼 마살리스가 재해석한 재즈 명곡들과 라디오 헤드의 톰 요크가 선물한 주제가 ‘데일리 배틀즈’(Daily Battles)까지, 음악에 있어선 이 영화는 완벽하다.
사운드트랙스 영화음악 애호가












댓글 (0)
댓글 작성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로그인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