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 윌 헌팅>

최근에 데이트를 했던 여자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던 윌(맷 데이먼)은, 그렇게 마음에 들면 먼저 연락하라는 정신과 의사 숀(로빈 윌리엄스)의 말에 그럴 생각이 없다고 대꾸한다. “왜요, 그랬다가 그렇게 똑똑하지도 않고 겁나 지루한 여자라는 거나 눈치채게요? 지금 이대로가 완전 완벽하다고요. 뭐하러 그걸 망쳐요?” 숀은 윌에게 “네 완벽한 이미지를 망치기 싫은 게 아니고?”라고 반문하며 말한다. 그런 식으로 살면 아무도 진실되게 사귈 수 없다고. 그리고는 세상을 떠난 자신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내 아내는 긴장하면 방귀를 뀌곤 했거든. 여러 가지 멋진 버릇이 있었지만서도. 어떨 땐 자면서도 방귀를 뀌곤 했다니까? 내가 별 얘기를 다 하네. 한번은 너무 크게 뀌어서 개까지 깨웠거든. 아내가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당신이 뀐 거야?’ 그러길래 차마 용기가 안 나서 내가 그랬다고 했다고.”

크고 작은 불완전함이야말로 두 사람의 관계를 완전하게 만들어 주는 열쇠라고, 나만이 알고 있는 상대의 작은 단점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알아야 한다고 꺼낸 이 일화는, 온전히 로빈 윌리엄스가 현장에서 <굿 윌 헌팅>(1997)의 현장에서 즉석으로 만들어낸 애드리브였다. 숀이 아내의 방귀 이야기를 꺼내는 대목을 다시 한번 자세히 보면, 대본에 없던 애드리브에 살짝 당황한 맷 데이먼이 잠시 시선을 돌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대로 계속 찍어도 괜찮겠냐고 감독인 거스 반 산트와 눈빛을 나눈 것이다. 그럴 법도 했다. 작고 사소한 애드리브면 또 모르겠는데, 이건 아예 없던 장면을 새로 만드는 수준의 애드리브였으니까. 벤 애플렉과 함께 직접 각본을 쓴 초짜 각본가 맷 데이먼 입장에선 대선배의 갑작스러운 방향전환이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전설적인 코미디언 로빈 윌리엄스의 애브리브란 얼마나 위대한가. 장면 속에서 윌이 온 상체를 들썩여가며 키득키득 웃는 건 연기가 아니다. 맷 데이먼은 로빈 윌리엄스의 애드리브를 듣고 진짜로 얼굴이 빨개질 때까지 웃었다. 심지어, 자세히 보면 카메라도 미묘하게 들썩이고 있다. 카메라맨조차 로빈 윌리엄스의 애드리브에 웃음을 참지 못했기 때문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

그 어떤 끔찍한 상황에서도 기어코 웃을 거리를 찾아내던 남자. 그래서였는지, 로빈 윌리엄스는 유달리 사람들의 아픔을 치유하는 역할을 자주 하곤 했다. <굿모닝 베트남>(1987)에서 그는 명분 없는 전쟁에 끌려 온 미군 병사들을 위로하는 라디오 DJ였고, <죽은 시인의 사회>(1989)에서는 틀에 박힌 교육을 받고 있는 고등학생들의 마음에 열정을 불어넣는 문학교사였다. <후크>(1991)에서는 보호자를 잃고 고아가 된 아이들을 지키는 피터팬이 되었고, <알라딘>(1992)에서는 아예 길거리 좀도둑 고아청년 알라딘의 소원을 들어주는 지니가 되었다. <미세스 다웃파이어>(1993), <패치 아담스>(1998), <제이콥의 거짓말>(1999), <박물관이 살아있다!>(2006)….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그가 그 모든 작품 속에서 보여줬던 명연기에 대해 밤을 새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훌륭한 치유자들이 종종 그렇듯, 로빈 윌리엄스 그 자신은 일평생을 끔찍한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며 살았다. 어쩌면 그리 이상하지 않은 일일 것이다. 사람을 웃기고 위로하는 일은 상대의 마음을 섬세하게 읽어내는 것에서 시작하는데, 로빈 윌리엄스는 세상 누구보다 그 일에 능한 사람이었다. 로빈 윌리엄스는 눈이 돌아갈 만큼 무례한 농담과 고소하면 100% 처벌당할 수위의 성적인 농담을 구사하는 사람이었는데도, 놀랍게도 그의 농담의 대상이 된 사람들 중 진짜 기분이 나빠진 사람은 없었다. 농담의 대상이 되는 상대보다 자신을 더 낮추고, 무섭게 돌진하는 듯하면서도 가장 아플 부분들은 유려하게 피해가는 섬세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인의 마음을 그렇게 섬세하게 읽는 일은, 몹시도 피곤한 법이다.

<미세스 다웃파이어>

시트콤 <모크와 민디>(1978-1982)로 전성기를 맞이했을 때, 로빈 윌리엄스는 이미 심각한 수준의 코카인 중독과 알코올 의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시절부터 이미 누군가를 웃게 만드는 일이 주는 부담감과 중압감에 짓눌렸던 탓이다. 하지만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 중 그 중압감이 얼마나 거대했는지 제대로 실감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홀로코스트에 관한 영화 <쉰들러 리스트>(1993)를 만들던 시절, 스티븐 스필버그는 지극히 우울한 내용의 영화를 촬영하는 우울함을 견딜 수 없는 밤이면 로빈 윌리엄스에게 전화를 해 자신을 웃겨 달라고 말하곤 했다. 그 무렵 로빈 윌리엄스는 이혼 가정에 관한 영화 <미세스 다웃파이어>를 촬영하고 있었다. 낮에 우울과 폭소를 오가는 감정선을 연기하고 돌아온 뒤 밤이면 전화 너머로 스필버그를 달래주는 삶이 상상이 되는가. 나는 그 무게를 쉽게 상상할 수 없다.

<굿 윌 헌팅> 속 로빈 윌리엄스의 애드리브가 그토록 재미있었던 건, 로빈 윌리엄스가 웃음과 우울이 사실은 동전의 양면처럼 등을 맞대고 있는 감정이란 걸 정확하게 이해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굿 윌 헌팅> 속 숀은 아내를 잃은 슬픔과 분노, 그리고 자기 자신의 우울에 잠겨 있는 사람이다. 숀은 윌에게 치유자인 동시에 자기 자신도 아픔을 간직한 동료의 입장으로 다가갔고, 그래서 정신과 치료를 죄다 사기라고 생각하며 껄렁대던 윌조차도 자신을 열어보일 수 있었다. 세상을 떠난 아내를 향한 지극한 그리움을 우울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다 말고, 얼굴이 새빨개 질 때까지 웃으면서 침대 위에서 방귀를 뀌던 아내 이야기를 꺼내는 숀이 위대한 치유자일 수 있었던 이유다.

살면서 누군가를 위로해주고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는 일이 귀한 건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상대를 진정으로 위로하고 웃게 만드는 일은, 필연적으로 상대의 아픔과 우울을 내가 나누어지는 일일 수밖에 없다. 상대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염려하고, 나의 위로가 제대로 가 닿았을지를 염려하고, 혹시 내 생각 없는 농담이 상대를 더 아프게 한 건 아닐까 내내 살피는 섬세함. 그러니까 웃음과 위로를 건네는 행위는, 사실 당신이 혼자 아프게 두는 대신 차라리 당신과 함께 아프겠다는 다짐인 셈이다.

나는 요새도 종종 우울감에 휩싸일 때면 숀이 윌에게 아내의 방귀 이야기를 하는 클립을 온라인에서 찾아보곤 한다. 로빈 윌리엄스가 진심으로 관객들을 위로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진심을 쏟았는지를 보고 나면, 마음 한 구석이 아리면서도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이 놀라운 남자는 세상을 떠난 뒤에도 이처럼 세상을 위로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어쩌면 그는 진정으로 세상을 떠난 적은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이승한 TV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