싼 맛에 구입한 이케아 가구들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결혼할 때까지만, 내 집을 장만할 때까지만, 정규직으로 채용될 때까지만.. 쓰임의 한계를 정해 놓고 구입한 조잡한 물건들이 마뜩잖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서울, 지방, 해외를 전전하는 생활을 10년쯤 한 뒤였다. '사주에 역마살이 있다'라는 누가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말을 인생 경구 삼아 정말 원 없이 돌아다녔다. 그깟 집쯤. 생각하기 나름이라며, 오늘 내가 머무는 곳이 곧 즐거운 나의 집이지, '일체유심조'의 불교 철학을 빌려 집의 중요성을 가볍게 웃어넘기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를 '한시적'인 것으로 설정하는 삶에 오랜 시간을 두고 아껴줘야 가치를 발하는 덴마크 의자가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늘 몇 달 뒤, 혹은 몇 년 뒤 떠날 공간에 맞게, 딱 그만큼의 애정만 쏟았기에 나에게 집은 항상 2% 부족한, 말하자면 MDF로 만든 싸구려 가구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얽매이는 것이 싫어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삶을 살았고, 그런 삶이 꽤 잘 맞기도 했지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세상에는 뿌리를 내림으로써 단단해지는 삶도 있다는걸. 돌아다니는 것은 이제 그만하고 싶어 덜컥 분에 넘치는 의자를 구입하자, 그에 걸맞은 집을 매입해 보고 싶다는 대책 없는 물욕이 일었다. 그때부터 핀터레스트를 뒤져 사진을 저장하고 집과 관련된 프로그램을 챙겨보았다.
EBS <건축탐구 집>은 건축 전문가와 다양한 집을 둘러보며 집과 사람, 공간에 관한 이야기를 담는 다큐멘터리이다. <넷플릭스>에서 방영하는 <세계에서 가장 경이로운 집>, <도전!협소주택>, <어메이징 인테리어> 등 집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 중 유독 <건축탐구 집>에 눈이 가는 것은 역시 집을 둘러싼 한국인의 애환과 희망이 이들이 건축한 집에 녹아있고, 그 애환과 희망은 나의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건축탐구 집> 이동식 주택 편에 나오는 송씨는 대기업 연구원으로 10년 넘게 근무했다. 남자 동기들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독한 년' 소리를 들어가며 숱한 밤을 새우다 보니 가방 속 우산을 2년 동안 한 번도 펴 보지 못하는 날들이 쌓여갔다. 그렇게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제품 테스트를 마친 어느 날, 같이 근무하던 20대 동료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회의가 밀려왔다. 살기 위한 숨구멍이 필요했으리라. 그는 그길로 퇴사를 하고, 충북 단양에 7평짜리 이동식 목조 주택을 세워 흙을 만지는 주말 농부가 되었다. 도시 연구원으로 살 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삶이었다.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하면 해방되는 기분이라는 송씨. 그렇게 7평짜리 이동식 주택은 그녀를 살게 했다.
<건축탐구 집>은 '유예하는 삶'의 유해성에 대해 생각게 한다. 지금보다 조금만 더 인정받으면, 몇 년만 더 고생해서 '진짜 성공'을 거두면, 그땐 나만의 삶을 살 것이라 다짐하는 유예하는 삶의 낭비적 속성 말이다. 지금의 삶을 '진짜 성공'을 위한 도입부 정도로만 여긴다면, 클라이맥스에 다다랐을 때 제대로 방향을 잡고 자신 있게 뛰쳐나갈 수 있을 것인가. <건축탐구 집>의 많은 건축주들은 단호하게 Nope이라 답한다. 그들은 '지금 당장' 여기서 행복할 것을 명령한다. 그것은 굉장히 설득력 있는데, 그들이 송씨처럼 유예하는 삶에 의해 혹독한 대가를 치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건축탐구 집>은 공간의 쓰임에 대해서도 고찰한다. 공간의 크기로 가치를 판단하는 시대, '이상하게 끌리는 집'편에 등장하는 '루하우스'는 크기가 아닌 쓰임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다. 일명 '일석삼조 하우스'라 불리는 이곳은 주중에는 사무실로, 주말에는 예배당으로, 그리고 평소에는 가정집으로 사용된다.
아침에 출근해 버리면 내 집은 10시간 정도 빈 공간으로 남는다. 같은 시간 어떤 이는 공간을 부러 찾아 헤맬 텐데, 이 공간을 타인과 공유하는 방법은 없을까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있다. 나에게 생각으로 끝난 일을 '루하우스'의 건축주는 멋지게 실현했다.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에 담긴 일말의 진실을 생각해볼 때 누군가에게 자신의 공간을 허한다는 것, 결코 너그러운 마음만으로 베풀수 있는 행동은 아니다.
이는 역시 남에게 공간을 내주는 기쁨을 누리는 삶이 혼자 독식하는 것보다 더 재미있고 가치 있다 생각하는 집주인의 삶의 철학이 반영된 것이리라. 언뜻 자신만의 성을 구축한 듯 보이는 개성 강한 <건축탐구 집>이 소개하는 집들. 놀랍게도 이들 대부분은 ‘루하우스’처럼 타인에게 활짝 열려있다.
<건축탐구 집>이 소개하는 각양각색의 사연을 가진 집을 따라가다 보면 시간이 훅 지나간다. 15평의 작은 구옥에 6.5개의 출입문을 만들어 집의 의외성을 극대화한 젊은 부부, 소설 속 주인공의 감정을 포착하기 위해 창덕궁 후원이 보이는 곳에 터를 잡은 소설가, 고성 산불로 잿더미가 된 추억의 공간에 다시 집을 지은 건축주, 법정 스님이 기거했던 불임암까지. 개성 있는 집에는 사는 사람들의 생활 방식과 삶의 철학이 담겨 있고, 철학 충만한 타인의 인생을 훔쳐보는 것은 언제나 재밌는 일이다.
중년 회사원의 전형인 상사의 책장에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이 꽂혀 있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한 적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한강뷰' 아파트를 향해 소란스럽게 직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누군가는 조용히 자신만의 오두막을 짓는 꿈을 꾼다. 미국의 건축가 레스터 워커는 '인생에서 가장 큰 쾌감 중 하나는 손수 지은 집에서 사는 것이'라 말했다. 직접 집을 짓는 것은 자아와 공간, 그리고 작업 자체에 대한 깊은 통찰을 필요로 하는 고난이도의 작업이지만, 달성했을 때의 성취감도 크다.
<건축탐구 집>에 출연한 한 건축주는 ‘심리적으로 아파트 값의 변화에 해방되고 자유로워진 느낌’이라며 주택을 지은 소회를 밝힌다. 우리는 너무, 내 것이 아닌 아파트값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많은 이들이 ‘화폐화’된 아파트를 직접 보지 않고 구매하고, '시세차익'에 몰두한다. 자아로 통하는 공간을 가꿀 기회를, 오늘을 충실히 살 기회를 그렇게 종종 놓친다.
2천 평의 정원을 가꾸며 사는 한 건축주는 자신의 집에서 호미질하다가 죽는 게 행복이라 말한다. 집과 관련된 몇 번의 분쟁을 겪은 뒤 직접 지은 집에서 비로소 평화를 찾았다고 말하는 또 다른 건축주의 얼굴에는 충만함이 일렁인다. 이들처럼 인생에 한 번쯤은, 내가 직접 지은 공간에서 흘러 넘치는 만족의 순간을 경험 해보고 싶다. MDF가 아닌 손때 묻은 덴마크산 원목 의자에 앉아서 말이다.
문화기획자 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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